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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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0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3 ✦
일을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누가복음 14장 25~33절)
[들어가는 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일이 줄어듭니까, 아니면 늘어납니까? 일은 줄 수도 있고 늘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하게 산다고 해서 일을 안 하게 되거나 일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삶이란 그런 차원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건 동기와 태도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할 때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에 관한 목적의식이 새로워지고, 어떻게 일하느냐에 관한 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선 일의 우선순위를 잘 판단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알지 못하고 행동하면 실타래가 꼬인 것처럼 엉키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을 시작할 때 ‘누가, 언제,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과연 마칠 수 있겠는가를 따져 보는 것입니다.
1. 계산을 잘해야 할 수 있는 일
예수님은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고 나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28~30절)
망대는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망대를 세우기 전에 먼저 준공하기까지 들어갈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짓다가 중단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산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다면, 성을 지키지도 못할뿐더러 흉물스럽게 방치됩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그런 공사를 중도에 그만두면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적들에게 온갖 문제가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입니다. 첫째는 망대를 세울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둘째는 공사 중단으로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되어 내부 갈등이 깊어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하늘나라 잔치 비유’(13~24절)를 통해 천국 잔치에 초청받고도 여러 가지 핑계로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 따끔하게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탈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충분히 따져 보고 나서 따라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잔치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에 수많은 무리가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6-27절)
예수님은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관해 뭐라고 하십니까? 먼저, 자기 가족을 미워해야 합니다. 부모, 처자, 형제,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 강하고 부담스러운 말씀 아닙니까? 이것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겠다 하면서 설렁설렁 대충대충 따라오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팬입니다. 예수님이 인기가 높으시니까 저도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마세요.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진정한 제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진짜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르지 말고 미리 그 비용을 계산해 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모든 것을 드리는 올인(all-in)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가족을 진짜로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보십시오. 다른 어떤 것보다,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머니 마리아를 미워하여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시선을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육신의 형제들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자신을 믿지 않고 비꼬니까 미워해서 제자의 길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어떻게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고, 진리의 길이란 사사로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진리의 길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가 되려면 먼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정확히 계산하라고 하십니다. 망대를 짓다 마는 것처럼 우습게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다 버리고 갈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따져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계산 방식에 승복할 수 없으면 제자가 될 수 없고, 제자의 길로 나서도 안 됩니다.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못 박힐 형틀을 말하는데,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위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기 의지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고, 예수님을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새로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산이 끝나지 않았거나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계산 방식을 점검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다음 비유는 더 직설적입니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1-32절)
전쟁을 시작하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을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못 이길 것 같으면 빨리 화친을 청하고, 전쟁을 단념해야 합니다. 이길 전쟁이면 하고, 못 이길 것 같으면 아예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생명을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면 해야 하겠지만, 목숨도 잃고 패할 게 뻔하다면 왜 전쟁을 시작하겠습니까?
왜 주님은 망대 이야기 뒤에 전쟁 이야기를 하십니까?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확실한 승리의 싸움을 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패배가 두려우면 싸움에 뛰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가 믿어지지 않으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뭔지를 오해하면 믿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하며 다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비용 계산을 해본 적이 없기에 신앙의 길을 가다가 망설이고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처음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도중에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때 무엇이 결정을 좌우합니까? 다른 어떤 것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바른 믿음입니다. 영생이 있음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자신 있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이 있는지, 구원이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은 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꾸로 결정하게 됩니다.
2.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원의 잣대
짐 엘리엇(Jim Elliot) 선교사의 순교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을 졸업한 짐은 오랫동안 준비한 끝에 1952년 27세의 나이로 친구 네 명과 같이 에콰도르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한마디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원주민들에 의해 전원 창에 찔려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의아했던 것은 그들이 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맹수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가져간 것이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했는데, 그러한 그들을 죽이기 위해 가져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음의 상황에서도 총을 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을 무참하게 죽인 아우카 부족을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여자를 해치는 것을 비겁한 짓으로 여기는 풍속 때문에 엘리자베스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담대한 전도로 부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10년 후엔 선교사들을 죽인 장본인 ‘키모’가 부족 최초로 목사가 됐습니다. 또한 순교한 선교사들의 자녀 중 두 명이 아버지가 순교한 강가에서 바로 그 아버지를 죽였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의 딸은 아우카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짐 엘리엇이 순교한 지 36년이 지난 1992년에 순교 현장에서 신약성경 봉헌 예배가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짐 엘리엇은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대학에 다닐 때 쓴 일기장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정확히 이 계산을 한 뒤에 영원을 바라보고 선교지로 떠난 것입니다. 일단 현장에 가보고 나서 계산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순간의 계산으로, 창을 들고 달려드는 원주민들을 향해 총을 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우카족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는 살인을 자책하며 선교사를 그만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짐 엘리엇과 네 청년의 계산법에 관한 세상의 평가는 냉정했습니다. 시사 잡지 <라이프>(Life)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무슨 불필요한 낭비인가!”(What an unnecessary waste!) 이것은 크리스천의 계산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죽음이야말로 너무나 헛되다고 보입니다. 양쪽의 계산은 이토록 극과 극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고 순교한 짐 엘리엇이 얻은 열매가 얼마나 큽니까?
진리의 길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는 계산을 끝내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런 계산을 해본 적 없이 남이 간다고 그냥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소풍 가듯 나섰다가 시험 들면 떠나고 사람이 싫어지면 돌아서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계산해 보고 나서, 더 이상 세상 방식으로 계산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믿음의 길이 시작됩니다. 그 길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all or nothing)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세상의 계산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현세적 가치관을 가지고 계산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출생부터 유력한 바리새인이었기에 그의 인생은 성공이 보장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그의 계산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현세적인 가치를 놓고 계산하며 따지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방식대로 시작과 끝을 맺으라
솔직히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계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업체를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든, 결혼을 앞둔 사람이든, 새 직장으로 옮기는 사람이든,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든,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그 길에 드는 비용을 계산합니다.
그런데 기준이 제각각입니다. 저마다 손에 든 자의 눈금과 길이가 다릅니다. 30센티미터짜리 자를 든 사람은 그 이상을 잴 수 없고, 2m짜리 줄자를 가진 사람도 그 이상은 잴 수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재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정말 긴 것은 짧은 것으로 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수십 마일 되는 것을 30cm 자로 잴 수 있겠습니까?
평생 재다가 시간 다 보내지 않겠습니까?
무한대를, 영원한 것을 이 땅의 잣대로 어떻게 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 땅의 기준으로 영원을 재는 방식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자신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의 진정한 뜻입니다.
무한대는 무한이라는 잣대로, 영원한 것은 영원이라는 잣대로만 잴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물건은 없지만,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예수님의 계산 방식을 따라야 가능하며,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만 합니다. 그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계 22:13)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역사를 시작하셨고, 예수님이 끝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계산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 당연히 자기의 계산 방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산 방식을 존중하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시작이자 끝이신 분이 이렇게 시작하라 하시면 이렇게 시작하고, 저렇게 끝내라 하시면 저렇게 끝내는 것이 정답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일을 시작하고 마쳐야 할지에 관한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성령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영적인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영원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가 옛날 방식, 인간적인 방식으로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산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동시에 끝이 흐릿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자기 일로 만들어 욕심으로 그르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중간에 계산 방식이 바뀌어 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계산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믿음의 길을 걷다가 자꾸만 자기 머리로 계산하면서 영원한 것 대신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드는 길로 잘못 갈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제대로 해야 하는데, 자꾸만 편하게,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너무 푹 빠지면 안 되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하고, 기도와 말씀 묵상과 예배와 봉사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것이 뭔지를 나름대로 계산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아예 예수님을 모르고 믿음이 없다면 모를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잘못 계산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우리가 적당히 따라도 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분이십니까? 우리가 대충 따라도 될 만큼 시시한 분이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침에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만큼 주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끝내도 되지만, 일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그분께서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실 주님을 믿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려면 자기 계산에 매여서는 안 되고, 주님의 계산을 따라야겠습니다.
몇 년 전 한국 군대에 납품하는 무기의 성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되어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군인의 안전을 지키지도 못하는 무기들이 버젓이 만들어지고 또 병사들에게 지급된 것입니까? 그런데 싸구려 재료로 무기를 만들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단지 군인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저지른 자들은 국민이 아닙니까?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아주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길을 따라갈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계산이 내 계산과 다르더라도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때에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히 3:14, 새번역)
어떤 기준으로 일을 시작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가 아닌가가 기준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근심하시는 일인가가 기준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싫어하시는 일인가가 중요합니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그 일은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잠시의 성공이 아니라 영원한 성공이며, 잠시의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내는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라면 끝까지 굳건하게 붙들어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또한 영혼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가운데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