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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8 ✦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마태복음 4장 18~22절)
[들어가는 말]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자신의 저서인 <프레임 전쟁(Thinking Points)>에서 진보가 보수에 맞서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언어가 사고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그 책에서 정확히 파악합니다.
그가 말한 프레임(frame)은 유권자들이 선거를 바라보는 ‘생각의 틀’을 의미합니다. 그는 선거를 프레임 간의 전쟁으로 정의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근래 정치권의 보수 대 진보 프레임 논쟁이 거셉니다. 예수님이 과연 보수인가 진보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프레임에도 갇히지 않으십니다.
1. 예수님의 프레임은 사람 중심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프레임(생각의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프레임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의 최종 목적은 낮은 급의 하위 프레임에 갇힌 인간을 구원하여 상위 프레임으로 사고 체계를 전환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프레임이 바로 최상위 프레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꿔 주셨습니다. 시시한 프레임, 편협한 프레임에서 엄청난 프레임으로 바꿔 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도 프레임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우리 각자 안에서도 매일 프레임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프레임이라고 하니까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살려고 아등바등하며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제거하거나 심지어 죽이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삶의 프레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는 새 프레임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역사가 BC와 AD로 나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프레임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예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분을 따르는 데 갈등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십시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8-20절)
예수님이 제자를 찾아 갈릴리 해변을 다니십니다. 그러다가 어부인 시몬과 안드레 두 형제의 일터를 방문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겠다.”
평생 물고기를 낚아 온 어부에게 사람을 낚으라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배와 그물을 갖추고 물고기를 잡는 프로 어부들입니다. 그동안 갈릴리 호수에서 그렇게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해결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던지십니다.
“너희들은 언제까지 물고기만 낚고 있을 거냐?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프레임이 이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사람을 낚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고기는 그물과 낚싯바늘로 낚으면 되지만,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낚는다는 말입니까? 그들에게는 갈릴리 호수와 물고기가 삶의 전부였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 이상의 프레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소박한 생각의 틀을 한순간에 부수어 버리십니다. 네 사람의 사고 체계를 고정해 온 프레임을 깨뜨리고, 새로운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새로운 프레임이란 무엇입니까? 물고기를 잡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을 건져 올리는 삶입니다. 물고기를 낚으면 물고기는 죽게 되지만, 사람을 낚으면 그 사람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반대가 되는 프레임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의 틀을 바꾸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일과 직업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하심으로써 그들의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십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매일 자기 일터에서 물고기를 잡느라, 즉 일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생업을 유지하느라 허덕입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면 기쁘고 적게 잡히면 기운이 빠집니다. 일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좋아하고, 잘 안 되면 낙심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이익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갉아먹더라도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또 남는 시간에는 자기 가족이 어떻게 하면 잘될 수 있을지, 가족끼리 어떻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지에 정신을 쏟느라 다른 사람들을 돌볼 시간과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삶의 프레임에 갇혀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먹고사는 데 매달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너의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사는 게 인생의 낙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일이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눈을 들어 사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먹고사는 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던 우리에게, 눈을 들어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가치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는 영원에 관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물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프레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22절)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후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부르십니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들을 부르시니까 놀랍게도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제자들을 일일이 모으셨고, 그들을 통해 교회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그 교회 공동체가 세상 모든 사람을 낚는 구원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2. 매너리즘의 위험에서 벗어나라
일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의 가치와 보람에 관한 생각이 멈추고, 하던 일로 먹고사는 데 익숙해집니다. 점점 일과 휴식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족과 함께 더 많이 놀러 다닐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주식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요즘은 코인 같은 가상 자산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식이나 코인 투자로 돈을 번 사람은 사실 극소수이고, 잃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자기 일보다 주식에 더 큰 관심을 둡니까? 일하는 시간에 주식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다가 끝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맞이하고, 당황하며 파멸로 갑니까?
일터에서 일해야 할 시간에 주가를 살피고 주식 매매를 하는 것은 명백한 근무 태만이며 직무 유기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국회 회기 업무 중에도 코인을 거래한 정황이 드러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국회의원뿐이겠습니까? 안 걸렸다 뿐이지, 그렇게 한 사람들이 더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서도 죄의식이나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일이 주는 기쁨보다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것과 주식 매매로 인한 손실과 이익이 주는 희로애락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으니, 일에서 무슨 보람을 찾으며 무슨 성과를 거두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프레임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프레임이 없거나 손상된 사람은 충동적이 되고 맙니다. 크든 작든 프레임이 확실해야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일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진 듯하면 기존의 프레임(생각의 틀)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을 고치거나 바꾸지 않으면, 헐거워진 프레임과 함께 무너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신앙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새롭게 하겠습니까? 말씀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특히 이런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 6:5-7)
지금은 종이 없지만,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 성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볼 때는 열심히 하다가 안 보면 안 하지 말고, 언제나 성실하게 일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프레임을 처음부터 새롭게 점검할 기회를 줍니다. 말씀에는 날마다 프레임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날마다 일터로 나가야 하는지, 왜 이 직장이어야 하는지, 왜 이 사업이어야 하는지,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지 모든 것을 점검하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하는 일에 대한 비전을 말씀으로 새롭게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3. 일의 결국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보통 결정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그들과 같은 결정을 해본 적이 없다면, 프레임에 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프레임이란 거창한 제의나 수락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 공부하고 있는데 친구가 영화 보러 가자고, 아니면 놀러 가자고 불러낼 때 공부를 중단하고 따라나서 본 경험이 있으실 줄 압니다. (아닌가요? 너무 모범생이셨나요?) 바로 그것이 공부 프레임에서 영화 프레임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더라도 ‘나는 프레임을 바꿨다.’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별생각 없이 프레임을 바꾼 그 결정 하나로 어쩌면 인생 전체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대학교의 컴퓨터학과에 가려고 공부하며 준비하던 고등학생이 하루는 공부하다 영화를 보자고 한 친구를 따라 나가서 본 그 영화 한 편 때문에 연극영화과로 바꾸어서 대학에 진학하여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영화에서 주인공이 겪는 사회적인 억압에 분노한 나머지 컴퓨터가 아니라 법대를 선택해서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의 길을 걸을지도 모릅니다. 프레임의 변화는 그와 같은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터에서도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직장이나 일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지금 하는 일을 다 그만두고 따라야 한다고 부르신다면 우리 일상의 균형 전체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돈만 벌기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바꾸어 주는 일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세상의 어떤 프레임도 예수님이 주시는 프레임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프레임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자기가 편안하게 살지에 대한 것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프레임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살릴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15년 동안 목자와 목녀로 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 목자와 목녀로 섬기는 다른 분들도 계십니다. 왜 남들이 보기에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생각할 정도로 계속해서 섬기십니까? ‘목자로, 목녀로 섬기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는 프레임, 생명의 프레임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자, 목녀로 섬기면 좋다. 자원해라.’라고 권면해도 대부분 듣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프레임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 목녀로 섬기면 힘들어진다. 피곤해진다. 쉽지 않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그러니 목자, 목녀를 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 사는 프레임,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프레임으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수요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늘 수요예배나 토요새벽예배에는 나오는 분들만 나옵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니면 직분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 나오는 사람은 왜 안 나옵니까? 나오지 않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프레임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사는지 잘 점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시하는 프레임에 쉽게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프레임에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슈가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모든 것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각 매체마다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이 있고, 그것을 사람들도 동조하게 하기 위해서 프레임을 걸어 보도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실을 약간 비틀거나 부풀리거나 살짝 빼고 내보냅니다.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보수와 진보 매체가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그럼 누가 옳은 겁니까? 둘 다 자기들의 프레임이 옳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프레임을 따라가면 누군가를 추종하는 세력이 될 뿐,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정치 세력의 지지자이거나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프레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프레임을 최우선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주하게 물고기를 잡으러, 일하러 가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19절, 새번역)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득이 되면 따라가고 손해를 보면 안 따라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일에 먼저 관심을 가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프레임은 구원의 프레임이며 생명의 프레임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낚으라고 하신 것은,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크리스천 CEO인 서덕수라는 분은 한동대와 하버드에서 공부한 후 베트남에서 새 삶을 개척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대로 사람을 낚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회사는 베트남에서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한화로 2억에서 5억 정도 하는 고가 아파트를 짓는데, 베트남은 1억 인구에 GDP가 겨우 2,000달러 수준입니다. 그런데 과연 몇 억씩 되는 고가의 아파트를 살 수 있겠습니까? 호치민시에 천만 명이 사는데 정상적인 집, 즉 기둥이 있고 제대로 된 구조물이 있는 집에 사는 사람은 절반밖에 안 되고, 나머지 5백만 명은 짓다 만 집에서 살거나 낙후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트남에서 사업하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을 짓는 게 무슨 의미일까 고민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람을 낚는 건축가로 불러 주셨다고 생각하니, 고가 아파트를 짓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단가를 낮춰서 서민들이 살 수 있도록 지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우리가 지은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짓는 저가 아파트는 당장 돈이 되지 않기에 투자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비전을 공유하는 투자자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우리 회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가 보니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합니다. 미얀마 정부 관계자가 우리가 공급하는 서민 주택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수고했다 덕수야’ 하실 때까지 제가 붙잡을 롤모델은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처럼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위해서 도시를 지을 생각입니다.”
이분의 삶은 참 멋진 인생 아닙니까? 사람의 가치를 세우고 존중하면 하나님이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을 세우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겠습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섬겨야겠습니다. 그렇게 가치 없는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에 자기 생명을 쏟아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인생을 길게 보십시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손해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얻는 기쁨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걸어가는 모든 여정은 참된 영성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사람을 살리는 인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