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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0일 수요예배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9 ✦
“서로를 살리는 일에 힘쓰는 공동체”
(갈라디아서 6장 1~5절)
[들어가는 말]
인도의 성자 선다 싱(Sundar Singh)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히말라야산맥의 한 산을 넘어가던 중 추위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지금 내가 나를 지키기도 힘든데 어떻게 저 사람까지 도와주겠나?’ 하고 생각하며 그대로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따라오던 선다 싱은 그 사람을 발견했을 때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지체없이 자기 등에 업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업었으니 아주 힘겹게 걷다가 한참 걸려 간신히 산을 넘어가 보니 또 다른 사람이 눈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는데 그 죽은 사람은 놀랍게도 몇 시간 전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보라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쓰러져 죽고 말았지만, 선다 싱은 죽어 가던 사람을 들쳐 업고 가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는 너무나 소중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남을 살리는 것이 곧 나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진리였습니다.
믿음의 길은 산행과 비슷합니다. 산길을 가다 보면 너무 힘들어하며 쉬어 가는 사람이 있고, 때로는 지쳐 쓰러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가 힘들어하거나 믿음의 길을 떠나 죄에 빠져 있는 이웃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이 거기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의 길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의 길을 걷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길을 떠나버리는 이탈자가 발생하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특히 코로나 사태 2년 이상을 지나면서 그런 사람들이 교회마다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그러한 일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코로나 사태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세기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AD 47년경 제1차 전도 여행 중에 남부 갈라디아 지역, 즉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는 도시가 아니라 지역 이름이고, 거기에 크게 네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갈라디아의 새 신자들은 얼마 후 찾아온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AD 48년경 자신이 첫 번째로 쓴 편지로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내는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3차 때 썼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 기록된 편지라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 1:6-7)
그렇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은 여러 가지 죄에 빠지게 되었고, 바울은 5장에서 그것들을 죽 열거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그렇게 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2절)
한마디로 말해, ‘서로 짐을 지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말입니다.
2. 서로 짐을 진다는 것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짐을 지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가 죄에 빠졌다면 대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대개는 정죄하고 비난하며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빠진 사람에게도, 판단하는 사람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권고합니까?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절)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온유한 심령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온유한 심령’이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정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 쉽게 이웃을 향해 분노하는 마음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웃의 연약함을 성령을 통하여 꿰뚫어 보는 마음이 ‘온유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만이 인간의 가장 깊은 것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죄 가운데 있는 이웃을 바라보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한마디로 ‘이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형제자매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동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연약함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회복을 돕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회복을 위한 도움을 쥐기 위해서는 그 영혼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이해는 내가 상대방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평소에 그 이웃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쉽게 정죄하기보다 이웃을 연구(공부)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좋은 상담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연구하는 자세로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나쁜 상담자는 다 아는 뻔한 이야기처럼 피상적으로 흘려듣고서 상대방에게 서둘러 결론을 내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가르치거나 쉽게 조언을 주지 말라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주면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대체로 잘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를 계속 배워야 합니다. 중간에 말을 가로채거나 끊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들어주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결국 나에게도 좋고 그 지체에게도 좋습니다.
몇 년 전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에서 한 가지 연구를 진행했는데, 조사 대상자들에게 10명의 이름을 주고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그리고 반대로 자신이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응답자는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자기가 그들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자기는 다른 사람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어떤 처음 보는 사람이 나와 함께 10분 정도 대화를 나누어보고 나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견적이 나왔습니다. 금방 다 파악이 되었습니다. 척 보면 척이죠.”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주 불쾌할 겁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금방 파악했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볼 때는 ‘나는 5분이면 당신을 파악하는 데 충분해.’라고 하는 게 맞겠습니까? 나는 저 사람들을 다 이해하는데 그들은 나를 몰라준다고 왜 억울해합니까? 인간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을 버릴 때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남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2:1, 새번역)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정죄와 비난은 자기가 상대방을 다 안다는 피상적 판단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는 그 사람을 척 보면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려면, 먼저 그를 깊이 이해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를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3. 나 역시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
혹시 다른 사람의 죄가 분명한 사실로 드러날 때에도 우리는 그 사람을 무조건 정죄할 것이 아니라 먼저는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동시에 ‘저런 일은 나도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죄다.’라는 겸손한 태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절)
뒷부분에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도 얼마든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어떤 죄를 범하는 것을 볼 때 나도 저 죄를 똑같이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3-5절, 새번역)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또 다른 주요 원인은, ‘나는 안 그런데 너는 그게 문제다.’라는 식의 태도입니다. 나는 괜찮은데 전부 상대방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얼마든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바로 서고 다른 사람들도 세워줄 수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2)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이자 설교자인 척 스윈돌(Chuck Swindoll)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전에 달라스 신학대학원 총장을 역임했고, 지금 87세인데도 달라스 근교에서 자신이 24년 전 개척한 Stonebriar Community Church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63세에 교회를 개척했다는 말이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도 교회 사역뿐 아니라 방송 사역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주일 설교 중에 척 스윈돌 목사님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법을 잘 지켜야 하며,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교회 사역을 모두 마치고 오후에 교회에서 나와 운전하고 집으로 가던 중 깜빡 다른 생각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교통신호를 위반하고 빨간불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마침 그때 자기 교회 교인 한 사람이 옆 차선에 서 있다가 목사님의 신호 위반을 목격하게 되었고, 하필 그 순간 둘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목사님은 미안하고 창피한 마음에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갔는데, 그날 저녁 그 교인이 전화해서 “내일 점심에 만납시다.”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잡기는 했지만 목사님은 자기를 위선자라고 공격할까 봐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주님께 간절히 ‘주님, 저에게 피할 길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기도 중에 하나님이 한 아이디어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튿날 식당에 가 보니 예상대로 그 교인과 또 다른 교인 몇 사람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윈돌 목사님은 평소에 전혀 차지 않던 목걸이를 하나 차고 들어갔는데, 교인들은 그것을 보고 무슨 목걸이를 하고 오는지 의아했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펜던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I am a sinner(나는 죄인입니다).” 긴장하고 이던 교인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스윈돌 목사님은 갑자기 뒤로 돌았는데, 등 뒤에는 또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그 펜던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치라.”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 얼마든지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살아온 분이 여기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도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웃이 실수할 때마다 관용을 베풀며 품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될 때 이웃이 잘못할 때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교훈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가 나를 위한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4절, 새번역)
자기 스스로를 살피는 삶을 통해 자신의 짐을 지는 삶을 살게 되고, 이렇게 자기 짐을 질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의 짐도 져줄 수 있는 것입니다.
4. 결론은 사랑
1절에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했는데, ‘드러나다’의 원래 뜻은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빠지거든’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동물들에 대한 동영상을 보다 보면, 산 사자나 늑대 같은 야생동물이 덫에 걸려서 꼼짝 못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침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덫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려고 하는데,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줄 아는 짐승은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을 봅니다. 도와주려고 하는데 해치는 줄 알고 그럽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드러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러한 궁지에 빠진 형제자매를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죄를 지어서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면 그들이 회복되도록 도와주라고 명령합니다.
1절 중간의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바로 잡으라’는 단어는 우리 몸의 뼈가 어긋났을 때 뼈를 ‘바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말에는 어부가 못쓰게 된 그물을 수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그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고쳐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복의 사역을 감당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2절, 새번역)
십계명에는 열 개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계명은 오직 하나, 곧 사랑입니다. 십계명 역시 결국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새번역)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요즘 교회들이 좋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새로 믿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절대 마주치면 안 되는 사람들이나 피해야 할 사람들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새로 믿게 될 때 많은 교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를 보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하세요.” 그러나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으세요? 우리를 보세요. 그러면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주님의 참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말이 아니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안 믿는 사람들의 방식에 맞추어주면서 하려고 합니다. 같이 술 마시거나, 같이 계를 하거나, 같이 고스톱 치거나, 같이 가라오케하거나, 그들이 하는 것을 같이 하면서 전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한 영혼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식으로 살면서 접근하면, 겉으로는 재미있다고 함께 놀아줄지 몰라도 속으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구나. 그렇다면 어차피 너나 나나 똑같은데 네가 다니는 교회에 뭐 하러 나가야 하냐? 같은 식으로 논다면 여기가 더 재미있는데 내가 왜 가냐? 너나 잘 믿어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를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세상의 지위? 돈? 명예? 아이들 공부 잘하는 것? 그런 것도 안 믿는 사람이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들은 그것으로 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주님의 사랑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고 희생해가면서 섬기는 그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놀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교회 안으로 들어올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한 역사는 우리가 서로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짐을 서로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고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형제자매의 회복을 도와 다시 일어서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렇게 될 때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나가는 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인 ‘피에타’ 상이 있는데, 이것은 제가 직접 찍어온 사진입니다. 높이 171cm의 이 대리석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미켈란젤로가 자기 서명을 마리아의 옷자락에다 할 정도로 특별히 아낀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년 전 망치를 든 한 괴한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박물관 측은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이 작품을 복원하기 위해 세계적인 조각가들로 구성된 팀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모인 팀원들은 복원 작업에 바로 착수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몇 달 동안을 깨어진 작품을 감상하는 일에만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감상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눈과 가슴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이 미켈란젤로의 눈이 되어 이 작품에 나타난 마리아의 연민과 고통을 보고, 그의 가슴이 되어 그 연민과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그들은 작품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에서 또 목장에서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 입고 깨어진 형제자매를 붙들고 목장 식구들이 함께 또 성도들이 함께 그 사람을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눈과 가슴을 가지는 것, 그래서 그의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느끼는 것, 그리고 마침내 그 지체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회복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자가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마침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회복시켜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에 빚진 자로서 늘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의 짐을 기쁘게 져 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