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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Nxo76Al3Mfw?t=1848

 

 

2021128일 수요예배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창세기 11)

 

[들어가는 말]

 

거대한 유조선이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갑판의 넓이가 축구장 세 개보다도 넓은 큰 배입니다. 그 배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에게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그는 손목에 찬 나침판을 보며 한 걸음씩 정확하게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있는 유조선은 처음부터 북쪽으로 힘찬 항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은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3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경험이 분명한 그리스도인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신앙적인 의미를 삶의 목적과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적인 삶 이상의 큰 그림을 보려고 하지 않고 볼 줄도 모릅니다. 그저 살아 있으니 살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며 삶을 이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래 살거나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애매모호한 삶을 산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단지 숨 쉬는 것을 넘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지식이고, 둘째는 그 계획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해나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이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선언 아래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우리의 실제 삶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책을 찾았는데, 김남준 목사님의 <내 인생의 목적 하나님>입니다. 이 책을 중심으로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다루어보려 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세계의 시작이신 하나님

 

창세기 11절은 구약성경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성경 계시 전체의 시작이며, 또한 모든 세계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에게 설득하려 하지 않고, 가장 첫 부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이 온 우주의 존재 원인이심을 선포합니다. 이 위대한 선언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 둘째로 이 모든 세계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 셋째로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향하여 어떠한 뜻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하고 농담의 소재로도 삼는 시대입니다. 특히 영어 표현에서 뭔가 기가 막히거나 충격을 받을 때 “Oh, my God!”이라고 하는 말까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을 뒤치다꺼리해 주시는 분, 마음씨 좋은 친정어머니 같은 분,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 같은 분, 또는 대단하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분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올바른 하나님 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지으셨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존재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탁월하심 앞에 설 때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엎드리게 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5)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이 하는 많은 일을 대신할 수 있는 로봇들이 개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로봇이 아무리 인간과 비슷하고 오히려 더 똑똑하다고 해도, 로봇을 만든 제작자와 동급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뛰어난 로봇일수록 그것을 만든 과학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더 드러내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계에서 어떤 위대함을 발견하고, 인간에게서 어떤 천재적인 특성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세계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심을 알게 해줍니다. 어떤 천재적인 사람을 보았다면, 그가 위대한 게 아니라 그를 만드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모든 것을 지으셨지만 결코 피조세계의 일부분이 아니십니다. 동시에 피조물 역시 하나님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신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찬란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 질문은 하나님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성을 묻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 위에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에 물질세계와 섞일 수 없으십니다. 하지만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특별히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비참한 자에게는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을, 고통 받는 자에게는 위로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악을 행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정의로움을, 유한한 인간에게는 영원함을, 끊임없이 변덕스러운 인간에게는 신실함을 보여주십니다.

 

 

3)  거룩하신 하나님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들을 통합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피조물과 구별되시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초월성과 완전성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적 차이를 깨닫게 해줍니다.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만이 홀로 높고 높다. 그 위엄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다.” (148:13,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이 계셔서 모든 피조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격차를 느끼게 됩니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위대함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존재적 격차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발견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도 의롭게 살아보려고 애썼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지만,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은 자신이 행한 선이 사실은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덧입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요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2.   너무나 크신 하나님

 

1)  드넓은 우주를 생각함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천지라고 표현합니다(1:1). 드넓은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크기의 우주 앞에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입니까?

 

우주의 크기를 재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우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의 거리를 대략 940억 광년이라고 계산해서 제시합니다. 1광년은 빛이 1년을 달려간 거리로, 빛은 1년 동안 약 625백억 마일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빛이 940억 년을 달려가야 우주의 끝에 이를 수 있다고 하니, 우리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고,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는 수천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의 설명에 의하면 은하계는 행성까지 포함하여 수조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합니다.

 

우리 은하계는 지름이 약 10만 광년, 중심부의 두께가 약 15,000광년인 별들의 무리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별의 군단은 그 중심으로부터 거리에 따라 차등을 두며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데, 수많은 별들이 우주 공간 속에서 각자의 속도와 위치를 지키며 조금의 오차도 없이 조화롭게 비행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타원형의 쟁반처럼 생긴 우리 은하계는 네 개의 팔이 달린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고, 태양은 그 중심부에서 약 26,000광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여덟 개 내지 아홉 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고, 그중 세 번째 별이 지구입니다. 이곳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의 수천 억 개 은하 중 하나, 그 은하의 수많은 항성계 중 하나, 그 항성계의 행성들 가운데 세 번째 행성, 그 행성에서도 북미 지역의 한 도시, 그 중에도 작은 한 장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기억하시고 인도하신다니, 이게 웬 은혜입니까?

 

 

2)  영원을 생각함

 

파리와 하루살이가 놀다가 헤어지면서 파리가 말했습니다. “내일 만나서 놀자.” 하루살이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파리와 매미가 놀다가 헤어지면서 매미가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자.” 일주일 정도 사는 파리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음 주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지만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매미와 참새가 놀다가 참새가 말했습니다. “매미야, 다음 달에 만나자.” 그러나 매미는 다음 달의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해봐야 100년인데,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에서 보자.”라고 하실 때 우리는 원래 그게 뭔지 깨닫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그 영원으로 들어가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무한한 우주 속 영원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생각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100년을 살다 죽는 것이 몇 방울의 손세정제로 죽는 손 안의 세균의 수명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입 속의 구강세정제로 죽는 세균의 수명과 다를 게 뭐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영원으로 들어가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끝없는 공간과 시간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실험하고 도전한 끝에 겨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 한마디로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모든 세계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으로 괴로워할 때 우리와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1-3)

 

 

3)  지성의 한계를 생각함

 

우리가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지성의 한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이 모든 세계가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이 세계에 익숙해진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했고 남편도 아내를 사랑했으며,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는 나밖에 몰라. 내 아내의 마음속에는 나를 향한 사랑밖에 안 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만약 남편이 자기를 향한 아내의 사랑을 찾아야겠다고 하며 아내의 시신을 해부해서 심장을 더듬으면서 나를 향한 사랑이 여기 가득한 줄 알았는데 없네. 아내의 나를 향한 사랑이 어디 있지?”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몸의 기관이 존재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지만, 물질을 찾는 방법으로 정신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신을 능가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물건을 찾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기에 그분의 성품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분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그분께 맡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감당하려 하지만 고통만 올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서 발생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만 그 어느 것도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해답은 하나님께 있고, 영원한 세계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3.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누리는 복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난파된 보물선이 발견되는 경우를 보면, 보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개펄 속이나 바닷물 속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 유물을 끌어올린 후 역사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것들이 언제,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연구합니다. 그럼으로써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생활과 풍습, 문명과 기술의 정도를 추측하여 이전에 사라져버렸던 세계를 현실에 복원해냅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들로 가득합니다. 하나하나를 찾을 때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또 다른 것들과 서로 연결을 짓고 성경의 진리로 해석할 때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1-4)

 

이 시를 쓴 다윗의 고백처럼,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기 때문에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어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리가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왕들과 황제들의 위엄을 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발아래 먼지만도 못할 만큼, 엄청난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존재는 우리와 상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와 깊이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세계에서 역사하시며,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내 자녀가 어느 학교에 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뜻을 갖고 계십니다. 어떤 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속에서 우리를 향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들, 그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한숨까지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 또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6:3)

 

그렇다면 우리가 회개해야 할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삶에서 하나님 알기를 게을리 한 것입니다. 이 땅의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씩 알아가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탁월한 열정과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습니다(11).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따돌림을 받아도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았습니다.

 

환경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도 그들은 의연하게 서서 어두운 시대를 헤쳐 나갔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을 따라 목숨을 버렸으며 자신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의 명예를 미련 없이 버리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서의 영광과 즐거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야만적인 시대에 성결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번영하는 시대에 망가져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통곡하게 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든 사람이 절망하는 시대에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해주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의 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이며 만족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지금도 이끌고 계시는 그분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73:28, 새번역)

 

이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연결 고리가 바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비천한 인간 사이에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티끌 같은 존재인 우리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분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를 깨닫고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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