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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ZkMbBLBhm2Y?t=1681

 

 

20211110일 수요예배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1

예수님의 분노: 사랑하시기에 분노하시다

(마가복음 31~6)

 

오늘은 예수님의 분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데,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영원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책임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바로 사랑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자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셨고, 나라를 빼앗겨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경험하게 하시면서까지 끊임없이 그 길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외아들 예수님까지 보내셔서 죄악 된 길로부터 돌이킬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분노하시는 것을 봅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분노하셨는데, 왜 분노하신 겁니까?

 

안식은 입니다. 기계는 쉼이 없어야 그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기계가 걸핏하면 고장 나 쉬게 되면 기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버려지고 다른 기계로 교체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와 다릅니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쉰다는 것은 마냥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제7일은 만나를 내리지 않고 안식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만나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먹고사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입니다. 둘째, 만나가 내리지 않는 하루 동안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고 묵상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며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안식일 규정을 자세하게 나누어 몇 백 개를 더 만들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그것은 안식일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의도였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규정은 오히려 안식을 잃어버리게 하는 족쇄가 되고 말았습니다. 몇 백 개나 되는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묻기 바빴고, 사람들은 이 규정을 지키기 바빠 본래 안식일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1-2)

 

안식일은 내가 내 힘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되새기는 시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나 자신의 필요보다 이웃과 공동체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규정 자체에만 몰두하면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자기들뿐 아니라 백성들도 안식일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바로 앞인 2장 뒷부분을 보면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것으로 바리새인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을 때 예수님은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언급하시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7-28)

 

그러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으켜 세우고 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옳지 않은지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3-4)

 

손을 펴지 못해 제대로 일도 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참된 안식은 마른 손이 낫는 것입니다. 손 마름으로 묶인 인생이 풀려나는 것이 이 사람에게 진정한 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진정한 안식이 무엇이냐고 바리새인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5)

 

예수님이 진정한 안식에 대해 질문하시자 바리새인들은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에 동의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자 어떻게 합니까?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6)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원래 서로 얼굴도 보기 싫어할 정도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유대 민족을 위하고 헤롯당은 로마 권력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로 손을 잡습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분노합니까? 예수님이 정말로 안식일을 훼손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그들을 위협했기 때문입니까? 손 마른 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기들이 이룩해놓은 거대한 종교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원래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안식일을 훼손하게 된 겁니까? 그들은 너무 잘 믿겠다고 하다가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원래 누구보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그 열심이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 의를 앞세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거대한 종교 시스템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그 열심이 어떤 열심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 열심으로 누군가를 비방하고 결국 다른 길로 가 버린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거나 생명을 살리는 열심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위한 열심일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2.   형식적인 예배 행위로 인한 분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분노를 보인 사람들이 있는데, 놀랍게도 종교생활을 너무 열심히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대상은 하나님을 너무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사람들, 평생 하나님을 연구하고 공부해서 결국 거대한 종교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람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이용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을 엎으며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분노한 대상도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사두개파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모두 대적하셨습니다.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나 양을 끌고 와 성전에서 도살했는데, 그 수가 220만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기드론 시내가 피로 물들 만큼 엄청난 양입니다. 소나 양을 잡는 이유는 그들에게 내 죄를 전가함으로써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에서 파는 소나 양으로만 제사를 지냈습니다. 백성이 가져온 짐승은 흠이 있다고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짐승도 흠이 있다고 억지를 부리며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각종 청탁과 비리가 벌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있어서 유대 땅 먼 곳이나 해외에서 제사 드리러 온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를 낼 수 있는 돈으로 바꿔 주었는데, 그 돈으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제사장들과 그렇게 이권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지적하신 이유는 성전 전체가 비즈니스를 위한 장소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예수님 때의 일만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죄로 인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1:11-14, 새번역)

 

이사야는 예수님 때로부터 약 700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이미 그때도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배드린다고 모여서 하는 그들의 모든 행위가 너무 역겨워서 싫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1:15-17, 새번역)

 

제발 제사는 그만 드리고 고아와 과부와 억압 받는 자들을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위해 정의의 편에 서고 더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라 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7:9-11, 새번역)

 

하나님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를 다 하면서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며 그런 악을 저지르기 위해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지적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5:21-24, 새번역)

 

하나님은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크게 분노하시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전의 타락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셔서 상을 엎으시며 강도의 소굴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신 것이 바로 잘못된 종교입니다. 몇 백 가지 규범을 만들어 사람들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고 뒤로는 악한 일들을 일삼는 종교 시스템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vs. ‘하나님은 날마다 진노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과 하나님은 날마다 진노하신다라는 말은 서로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이 둘이 동시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노가 동반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분노와 에너지가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 아주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분노는 죄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죄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무한히 용서하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날마다 분노하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 거꾸로 합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죄에 대해서는 둔감한 겁니다. 특히 자기 죄에 대해 그렇습니다. 자기 죄에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 자기와 똑같은 죄를 짓는 다른 죄인에게는 분노합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만 분노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도가 바뀌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죄 없으신 분의 분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죄인의 분노는 대부분 다른 죄인들에 대한 분노이지만, 죄 없으신 주님의 분노는 오직 죄에 대한 분노이며 동시에 죄인에 대한 긍휼입니다.

 

죄인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분노는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죄인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죄인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분노가 합쳐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랑과 분노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노는 대개 이기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분노인 반면, 하나님의 분노는 조건 없는 이타적 사랑에서 비롯된 분노입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자기가 볼 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보거나 자기 것을 뺏기게 되면 언제 어느 때든지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게도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다고 인정해주시는 긍휼입니다. 그리고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들고자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한 이타적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와 상관없이 그냥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보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23:34, 새번역)

 

교회 역사 최초의 순교자가 된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7:59-60, 새번역)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나의 감정적인 분노, 이기적인 분노로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처럼 의롭고 거룩하게 분노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며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이웃과 형제자매뿐 아니라 원수까지 용서하시고 그들 모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할 때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의로운 분노가 뭔지 열심히 찾아서 죄인에게 분노하는 게 아니라, 먼저 죄인을 사랑하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또 나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망가뜨린 죄에 대해 의로운 분노를 발할 수가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못된 짓을 하면 당연히 우리는 화가 나고 분노하게 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면 저 사람에게 분노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저렇게 되게끔 만든 죄의 세력, 사탄의 세력, 악한 세력을 향한 분노가 나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며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면,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할 수 있게 됩니다. 죄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신실한 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야고보서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분명히 이렇게 썼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라”(1:19). 왜 그렇습니까?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1:20). 노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노는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분노하고 죄인에 대해서 용서하는 겁니다. 죄인에 대해 분노하는 게 아닙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죄인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의를 이루게 되고 신실한 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받는 인생을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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