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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0일 수요예배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8 ✦
삼손의 분노: 한 사람의 분노로 공동체가 망가진다
(사사기 15장 1~8절)
1. 나실인으로 구별된 삼손의 기행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태양’이라는 뜻으로, ‘태양처럼 빛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아내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이 아들을 나실인으로 키워야 한다는 명령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삿 13:4-5)
나실인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나실인 서약 기간 동안 세 가지를 하면 안 됩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 됩니다. 둘째, 머리털을 자르면 안 됩니다. 셋째, 시체를 비롯한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당연히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한마디로 나실인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 성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자라면서 나실인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삼손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는 갑니다. 자기 스스로 나실인 서약을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셔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많은 나실인의 삶은 스스로 자원해서 결단해도 쉽지 않은데, 자기 뜻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그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에게는 아주 큰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 문제였습니다. 여자 문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심각한데, 삼손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적국인 블레셋 여자들에게만 관심을 보입니다. 하루는 삼손이 딤나라는 곳에 갔다가 한 블레셋 여자를 보고 부모에게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말립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타일렀다. ‘네 친척이나 네 백성의 딸들 가운데는 여자가 없느냐? 왜 너는 할례도 받지 않는 블레셋 사람을 아내로 맞으려고 하느냐?’ 그래도 삼손은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꼭 그 여자를 색시로 데려와 주십시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맘에 쏙 들었습니다.’” (삿 14:3, 새번역)
삼손의 부모는 반대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허락하고 맙니다. 나실인으로 서약한 아들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손과 그의 부모가 함께 딤나로 내려가는데, 아마도 상견례 비슷한 것을 하려고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나게 되고, 삼손은 그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14:5-6).
얼마 후 이제는 딤나의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삼손은 다시 딤나로 가는데, 자기가 죽인 사자 옆을 지나다가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본 삼손은 그 꿀을 먹는데, 살짝 찍어서 먹는 게 아니라 아예 꿀을 퍼다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나실인 규정 중 하나가 부정한 시체를 만지면 안 되는 것인데, 삼손은 사자 주검을 만지는 데 거리낌이 없고, 심지어 그 꿀을 자기 부모에게 갖다 주기까지 합니다(14:9).
당시 결혼을 하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일주일 동안 잔치를 벌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삼손은 혼자 신부 집에 갔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젊은 남자 30명을 불러서 삼손과 함께 있게 했습니다. 신랑인 삼손의 들러리 노릇을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가 무르익자, 삼손은 들러리 노릇을 한 이 30명의 블레셋 젊은이들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냅니다. 그들이 잔치 기간인 7일 안에 답을 맞히면 삼손이 그들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선물로 주고, 그들이 못 맞히면 반대로 자신에게 베옷과 겉옷을 30벌씩 달라고 요구합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삿 14:14)
삼손이 사자를 찢고 거기서 꿀을 먹은 것을 수수께끼로 낸 것입니다. 누가 이런 문제를 맞힐 수 있겠습니까? 블레셋 청년들이 머리를 모아 봤지만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 청년들은 삼손의 신부에게 불살라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답을 알아 오라고 합니다. 신부가 일주일을 조르고 졸라서 마침내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 그들에게 알려 주었고, 그들이 정답을 말하자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참 이런 상황에서도 시적입니다.
이때 삼손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아스글론이라는 다른 블레셋 마을로 가서 30명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 약속대로 딤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는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신부의 아버지는 파혼된 줄로 짐작하고 삼손의 신부를 삼손의 들러리로 왔던 청년들 중 한 사람에게 줍니다. 그 후 문제가 발생합니다. 삼손이 다시 아내를 보겠다고 온 것입니다.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1-2절)
돌아온 삼손을 보고 당황한 신부의 아버지는 삼손이 자기 딸을 미워하는 줄 알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냈고, 그래서 이제 큰 딸 대신 작은 딸을 주겠다고 회유를 시도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삼손은 크게 분노합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3절)
이것은 너무나 큰 비약입니다. 자기 장인이 잘못 알고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낸 것을 가지고 어떻게 ‘이번만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어떤 손해를 끼쳐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합니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이때 분노한 삼손은 놀라운 일을 벌입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4-5절)
거기 여우 300마리가 있었던 것도 신기하고, 또 300마리나 되는데 어떻게 잡았는지 놀랍습니다. 어쨌든 여우 300마리를 두 마리씩 꼬리를 묶고 그 사이에 홰를 끼어서 불을 붙여 추수를 앞둔 밀밭에 풀어놓으니까,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들이 마구 뛰어다니며 밀밭뿐 아니라 포도밭과 감람나무까지 다 태워 버렸습니다. 아마도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 블레셋이 발칵 뒤집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6절)
블레셋 사람들이 방화범을 추적한 결과 삼손의 장인이 아내를 빼앗아 들러리 섰던 친구에게 아내로 주었기 때문에 삼손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신부인 여자와 그의 아버지를 불에 태워 죽입니다. 방화범인 삼손을 대신하여 신부와 장인에게 그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7-8절)
이에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죽이고 에담 바위 동굴로 가서 쉽니다. 9절 이하에 보면, 삼손에게 또 당한 블레셋 사람들은 유다로 몰려와서 삼손을 내놓으라고 위협하는데, 삼손의 분노가 나라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린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삼손에게 ‘너를 블레셋에 넘겨줘야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무사할 것이다.’라고 설득하고, 삼손은 스스로 결박된 채 블레셋 사람들 손길에 넘겨집니다. 이때 삼손은 결박한 밧줄을 힘으로 끊고 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입니다(15).
이 모든 사건들의 발단이 무엇입니까? 삼손이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을 한 것이 첫 번째 원인이었습니다.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 할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삼손의 정욕만이 사건의 발단이 아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삿 14:4)
이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인데, 약간 애매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손의 분노가 블레셋을 응징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삼손의 분노는 정당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이 딤나 여자를 좋아하고 또 분노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삼손의 그런 잘못된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도 사용하셔서 당신이 선한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어쨌든 블레셋 사람 천 명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손의 계속되는 여성 편력입니다. 이렇게 큰 사고를 겪고서 또 블레셋 가사의 기생을 찾아갑니다(16:1). 이때도 삼손의 기행이 계속되는데, 그가 가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잡으러 오자 성문을 뿌리째 뽑아서 산꼭대기에 갖다 놓은 겁니다(16:2-3). 마치 서울에서 남대문 문짝을 번쩍 들어다 남산에 올려 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마침내 들릴라가 등장합니다. 삼손은 또 다른 블레셋 여자인 들릴라를 사랑하고,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에게서 은 천백 개씩을 받기로 약속을 받고 삼손의 어마어마한 힘의 비밀을 캐려고 애쓰게 됩니다(16:5-6).
들릴라는 밤마다 삼손에게 힘의 비밀을 알려 달라고 조르고, 하도 졸라 대니까 삼손은 ‘샤 활줄 일곱으로 결박하면 된다’, ‘쓰지 않은 새 밧줄들로 결박하면 된다’,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 날실에 섞어서 짜면 된다’라고 하며 사실과 다르게 대답해줍니다. 세 번이나 속고 나자 들릴라가 더 집요하게 삼손을 괴롭힙니다. 삼손은 그로 인해 마음이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16:16).
그런데 너무 이상합니다. 그렇게 괴로우면 떠나면 되지 않습니까? 들릴라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빤히 알면서도 삼손은 왜 들릴라 곁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장난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그럽니다. 이것이 삼손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들릴라를 떠나지 못합니다. 괴로운데 여자를 너무 좋아합니다. 결국 삼손은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삿 16:17)
머리를 밀린 삼손은 힘을 잃게 되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결박되어 두 눈이 뽑히고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의문이 생깁니다. 삼손은 어째서 여자들에게는 분노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왜 삼손은 여자한테 복수를 하지 않는 걸까요?
삼손의 이런 심리를 심리학자들은 ‘삼손 콤플렉스’(Samson Complex)라고 부릅니다. 삼손 콤플렉스는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거절과 배신을 당하고, 이로 인해 극심한 분노를 느껴 다른 사람들에게 충동적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성에게 배신과 거절을 당했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들 특히 남성들에게 푸는 겁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 내지 못하면 그 화살이 자신에게 돌려져 자신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분노의 양날입니다. 이쪽에서 당하고 저쪽에 가서 풀고, 그게 안 되면 자기를 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2. 기도로 분노를 제어하라
한국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5-6년간 데이트 폭력 혐의로 입건되는 사람이 평균 8천 명에 이르며,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평균 46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통계가 그렇다는 것이니 현실은 이보다 더 많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이 비정상적인 사랑의 행태는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분노입니다.
삼손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분노조절장애 증세를 보입니다. 데이트 폭력을 감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죽음이 코앞에 이르자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명령을 밥 먹듯이 어기던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8)
그의 마지막은 그의 기도대로 이스라엘을 위한 죽음이 되었습니다. 두 손이 묶인 기둥을 뽑아 버림으로써 거기에 있던 3천 명이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에 깔려 죽게 된 것입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30)
삼손은 20년간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지만, 어느 누구한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무시무시한 힘을 소유한 그를 두려워했을 뿐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삼손은 그 힘과 능력에 비해 너무나 인정받지 못한 사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된 나실인의 삶이 삼손에게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주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세상이 나실인에게 기대하는 부담 때문에 삼손은 더 많은 일탈을 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크리스천 가정에 태어나고 모태신앙으로 자란 자녀가 지나면서 너무 부담이 되는 경우를 봅니다. 자기가 결단한 게 아닌데 부모에 의해 교회에 다니다가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나 다른 삶의 방향을 추구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런 모습이 삼손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실인은 이것도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니까 왜 자기는 못하는가 하면서 분노가 쌓인 겁니다. 삼손의 비정상적인 여성 편력은 해소할 수 없는 그의 분노가 찾은 엉뚱하고 잘못된 답이었습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서 이 시대에도 분노가 쌓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데이트 폭력이 그토록 심각한데, 그러한 분노조절장애자들이 이성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일터에서는 멀쩡하게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을 그렇게 방치한다면 과연 사회가 온전하겠습니까?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에서 배울 핵심 한 가지를 꼽는다면, 화가 나고 분노할 때 우리가 찾아야 할 기도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올 때 기도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나실인 삼손이 일찌감치 하나님께 기도하는 무릎을 가졌다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는데, 비정상적인 성적 충동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지 못한 게 삼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힘으로 눌렀지만 자신의 잘못된 욕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잘 알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기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 내면에서 일렁이는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분노를 녹입니다. 그 사랑이 충분히 흐르지 않을 때 가정 안에서 자녀의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고 시간이 갈수록 그 분노가 커져 결국 누구도 손쓸 수 없는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가정 내의 사랑이 부족해서 이 시대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목말라하고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을 찾아다니는 사랑 결핍이 많은 문제의 원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폭력의 시대, 분노의 시대, 음란의 시대 가운데 구별되어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을 이 더러운 세상의 물결로부터 지킬 수 있겠습니까?
결국 말씀과 기도 외에 우리에게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기도해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말씀을 붙드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마음을 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내가 한 번 결단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날마다 결단하는 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고, 그래서 어떠한 세상의 흐름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