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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3일 수요예배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0 ✦
“은혜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히브리서 4장 14~16절)
1.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우리의 믿음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히 12:1, 새번역)
당시 이 경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고향의 명예를 짊어지고 달리는 로마 시대 올림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때까지 질주하는 선수에게는 오직 승리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지난주 동계올림픽이 있었는데, 거기서 스케이트 선수가 ‘나는 져야지’ 하고 경기하는 선수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 승리하기 위해서 경기에 참여합니다.
그러한 선수들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라고 하는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가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길이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고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 12:2, 새번역)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시련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4-15절)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배고픔과 가난함, 고통과 불편함, 그리움과 보고 싶은 것, 인간으로부터 받는 배신과 모욕 등 모든 것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한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예수님은 지금 모든 사역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서 푹 쉬시는 게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한 것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연약한 것을 당신도 체험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우리의 대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며 동정하실 수 있고, 우리 편에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말합니다(15).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서 시련과 역경을 만나는데, 그럴 때면 마치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제사장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죽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하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 7:25)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굉장히 많았지만 대제사장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직무는 1년에 한 번, 대속죄일(Yom Kippur)에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함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히 9:7)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죄인들의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게 하는 것이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제사장들 중에서 뽑힌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중보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특권을 받았고, 제물로 짐승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죄 사함을 위해 제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제사는 하나님과의 일시적인 화목의 효과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죄를 지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 사이가 다시 막히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제사는 매년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드린 제사는 완전한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대제사장들과는 다른 제사를 드렸습니다. 인간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 7:27)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어 구원받을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히 단번의 제사를 드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
1) 보좌 앞에 나아가라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실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7-38)
이 휘장은 아주 두꺼운 천이었고 탄탄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 이 천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라졌고,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제사장들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해주므로(벧전 2:9), 이 모든 것은 이제 대신 빌어 주어야 하는 인간 대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을 모든 백성의 대제사장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 때문에 우리는 인간 대제사장의 도움이 없이 제사장이 되어 성소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보좌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좌 앞, 곧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6절)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이며, 또한 우리가 어떠한 인생의 시련과 역경을 만나든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역경에 처한 우리를 돕고, 사망의 위협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한없이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십자가 죽음이 주는 고통의 깊이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는 은혜의 표시입니다.
2)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16절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필요한 때에 도와주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을 더욱 필요로 하는 때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해야 할 때,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내해야 할 때, 시험을 당하거나 유혹을 받을 때, 나 혼자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특별한 때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와주시는 분이니까 그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은혜 받기 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은혜의 통로들이 있습니다. 흔히 드는 예인데, 폭우가 쏟아질 때 거기 컵을 갖다 놓으면 그 안에 물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막에서 갈증이 심한 사람이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그릇을 놓을 때 거기 비가 채워져 물을 마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그릇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한 방울도 그릇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안 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놓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 그것도 신자들이 그릇을 거꾸로 놓아서 은혜를 주시는데도 못 받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큰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릇을 제대로만 놓으면 은혜의 단비가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은혜의 통로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상황에서 어렵지만 이렇게 꾸준히 예배를 드리고, 특히 수요일에는 직접 예배당에 나와 드리는 분들이 줄었지만 시간을 내서 일부러 운전하고 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됩니다. 안 하는 사람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 삶 공부도 꾸준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마음을 다해 주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와 예배와 말씀묵상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은혜의 통로들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시련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힘, 연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믿음의 도리를 끝까지 붙잡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3) 담대히 나아가라
히브리서는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는데(16), 왜 굳이 ‘담대히’라는 말을 썼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살 때에도 우리를 에워싼 삶의 상황은 우리를 향해 속삭입니다. ‘너는 희망이 없다. 네가 가진 모든 자원과 능력보다 너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 훨씬 더 강하고 크기 때문에 너는 승리할 수 없다.’라고 하며 우리를 압박합니다.
여러분, 그런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아무래도 안 돼. 상황이 안 좋네. 도저히 할 수가 없어.’라는 음성을 자꾸 넣어주는 것이 사탄의 음성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십자가로 인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십자가를 의지하면 됩니다.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안 돼. 너는 못 이겨. 너는 가망이 없어.’라는 음성이 자꾸 들리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읽고 예배하는 겁니다. 자기 혼자 힘이 부족하면 찬양을 틀어놓고 같이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요예배 때 같이 모여 찬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공로를 통하여 그분의 몸에 속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닙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도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입니다. 은혜의 능력을 십자가 때문에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시련과 역경과 어려움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에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막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이 막힌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렇게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요즘 잘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감히 기도하기가 죄송합니다. 성찬식도 주님의 살과 피를 잘못 먹고 마시면 죄가 된다니까 지금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완전히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죄가 많을수록 더 나와야 합니다.
그 말이 뭡니까? ‘내가 요즘 죄를 많이 지어서,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기도도 못하겠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와 예배를 못하겠습니다.’라는 것을 거꾸로 보면, ‘내가 기도를 잘하고 말씀도 잘 읽고 예배도 잘하는 등, 모든 걸 내가 잘하니까 당당히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해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자기가 잘하면 길이 열리고 자기가 잘못하면 길이 막히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완전히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겁니다. 나와 상관없이 이 길은 예수님 때문에 열려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열려 있습니다. 막힌 게 아닙니다. 그 길을 감히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시련이 몰려오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히 12:1).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영혼이 곤고해졌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원래 죄인이 감히 걸어갈 수 없었던 거룩한 길입니다. 아무도 그리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보좌에 이르는 길을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그 끔찍한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을 아무렇게나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었던 길을 열어주셨는데도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빠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깁니다.
그렇게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정말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뭔가를 잘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비록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반대로 살았더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용서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다시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진실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히 10:19-20, 새번역)
우리가 할 일은 자기 의를 모두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진 휘장을 지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거기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
예배 끝에 축도를 할 때 저를 비롯해서 고전적인 형태를 따르는 목사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런데 축도를 들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십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성부 하나님이 먼저이고, 성자 하나님이 두 번째이고, 성령 하나님이 세 번째이어야 할 텐데, 축도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에 접근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도의 고전적인 형태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보다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삶이 곤고합니까? 위기를 만났습니까? 힘이 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고, 아들의 고난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시며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며, 늘 우리를 실제적으로 인도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잠시 넘어졌다고 해서 우리는 영원히 넘어진 게 아닙니다. 쓰러졌다고 해서 영원히 쓰러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실패했을 때 관두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이미 예비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의 생명과 사랑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기서 힘을 얻고 또 나아가는 것입니다.
보좌에 이르는 ‘새로운 살 길’(10:20)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 무한한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비록 넘어질 때가 있더라도, 다시 은혜를 주셔서 실패를 이기고 소망의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이렇게 마음껏 나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를 기억하며 십자가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혼자 집에서 성경 읽고 기도할 때도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가!’ 하며 제사장이 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인하여 이렇게 마음껏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