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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9일 수요예배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8 ✦
“하나님의 선하심”
(시편 34편 6~8절)
1. 선을 경험하라
1) 선: 창조 목적에 맞는 상태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처럼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로부터 차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왔을 때 다윗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들에서 양을 돌봐야 했습니다(삼상 16:11). 또 목숨을 건 전쟁터에 다른 아들들도 있었는데 막내인 그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야 했습니다(삼상 17:17-18).
또한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는 했지만 그 아내는 자신의 신앙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삼하 6:20-22).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기뻐서 춤추다 옷이 벗겨지니까 그것을 비난했습니다. 또한 질투와 시기심에 눈이 먼 장인이자 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격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강간범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삼하 13:1-14). 자신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 반란의 괴수도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삼하 15:1-13).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와 고난을 겪은 다윗은 8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다윗의 그 많은 시편들 중 압도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탄? 괴로움? 호소?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은 영원불변하는 것이었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 끝까지 가득 찬 광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그런데 이 선이라는 것은 단순히 ‘보기에 아름답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선’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은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3-4a)
여기서 ‘좋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토브)는 ‘선한’, ‘좋은’, ‘훌륭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첫째 날 빛이 있었을 때 그 모습이 정말 보기에 아름다운 모습이었을까요? 그때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창 1:2). 그때 빛을 비추어 그 모습이 밝히 드러났을 때 정말 보기에 좋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이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창조되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상태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2) 존재하는 선과 경험된 선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하게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선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삶이 꼬이고 복잡해집니다.
그러한 생각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자신의 존재가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는 것보다, 하나님은 그저 내가 원할 때만 오셔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도와주시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성화의 삶은 하나님의 선을 나의 선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에게도 선하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부서지고 더 깨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날마다 죽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부서지고,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깨뜨려지고,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살려는 자아중심적인 욕구가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어떤 것이라고 알려주시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도 더 깊이,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나를 무엇으로 빚으시든지 그것이 가장 선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면 나 보기에도 좋은 것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8절 상)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쓴 시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촉구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 때에야 정말로 하나님의 선을 자신의 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선과 경험하는 선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 계시며,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은 있다 없다, 좋은 분이다 나쁜 분이다 하고 떠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태양처럼 변함없이 거기 계셔서 당신의 선하심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약 1:17, 새번역)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스스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선하심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한 영적 지식이 자신의 삶 안에서 주관적으로 경험될 때에만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안 믿는 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말로 맛보고 경험하고 알아야 합니다.
2. 선하신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실 때
1) 선하심을 경험하는 믿음
우리가 애매한 고난을 당하든지 혹은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고난을 당하든지,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당신의 선하심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선을 베푸십니다. 그 좋은 예가 요셉입니다.
요셉은 슬픔의 사람이었고,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방의 땅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창 37장). 언어와 문화가 다른 땅에서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여기에서 요셉이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종으로 팔려온 자신이 잘 풀려서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으로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신 일을 가리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요셉이 필요했고, 그는 총리라는 높은 지위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거꾸로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왕의 인정을 받아야 했고, 그 일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를 천거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옥되어야 했고, 투옥되기 위해서는 모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모함을 받으려면 그가 주인의 집에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지위에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의 총무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갈 때 그 상황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창 37:28). 또한 노예생활을 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창 39:20), 어떻게 그것을 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도움을 잊어버림으로 요셉이 감옥에서 2년을 더 지내야 했을 때도 그것을 선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창 4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요셉에게 정말 놀라운 점입니다. 그에게는 참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들의 곡식단이 모두 일어서서 자신의 곡식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하나님의 꿈을 기억했습니다(창 37:7, 9).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노예생활을 하면서 또 감옥에 갇혀서도 그 꿈을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에 지금 이 힘든 상황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고통의 시간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믿음이 요셉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집에서 살 때는 머리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믿었는데, 노예생활과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자신과 동행하시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그 한 사람을 구원하신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2) 선하심을 경험하는 사람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 그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지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 3:22-26)
25절에서 ‘기다리는’은 ‘간절히 바라는, 앙망하는’이라는 뜻이고, ‘구하는’은 ‘추구하는, 따라가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여기서 기다리며 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막연히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하게 앙망하며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에 나타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라는 망했고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슬피 우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도록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의병을 조직하고 나라를 해방시킬 일꾼들을 모아야 하지 않습니까? 건축헌금을 거두어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추구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데,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상황과 싸우며 환경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사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사느냐, 얼마나 큰 집에 사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높은 지식을 쌓았느냐, 얼마나 유명하냐도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그 방향입니다. 올바른 방향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가기 원하십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며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간절히 당신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상황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들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존재 자체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에야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도 어려움을 당할 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전심으로 추구하며 살아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복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행복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다윗도 비참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8절 하)
히브리어에서 복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베라카’와 ‘에쉐르’입니다. ‘베라카’는 물질적인 유익을 얻는 기쁨에서부터 정신적인 즐거움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의 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에 비하여 ‘에쉐르’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받을 수 있는 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 8절에서 ‘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라카’가 아니라 ‘에쉐르’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가 벗어났을 때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고, 자신의 손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받는 복을 방금 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진 것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남자의 존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치광이 행세를 함으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던 다윗의 신세는 사람들이 볼 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룩한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쉐르’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고통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즉시 물질적인 복을 부어주지는 않으십니다. 나의 건강을 금방 회복시켜 주시거나, 나를 괴롭히던 사람을 멀리 보내버리지 않으십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에쉐르’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에게 즉시 위로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죄악에서 건지시며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로 불러주십니다. 이전까지는 기도할 수 없었지만 이제 기도하게 하시고, 이전까지는 절망과 슬픔 속에 잠들었지만 오늘은 소망과 기쁨 속에서 새 아침을 맞게 하십니다. 즉각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에쉐르’의 복입니다.
2) 참 행복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종종 우리의 수많은 죄악이 생각나고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이 주님의 진노의 심판이 아닐까 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행한 죄 때문에 우리에게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부어주십니다(약 1:17).
탕자를 멀리 떠나보냈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눅 15:11-32).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와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입혔고, 아버지는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받는 유산을 미리 받아 간 게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손해와 상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은 손해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쉽게 잊힙니다. 그리고 나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의 잘못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떠나 혼자 살아가고 있을 그가 당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오히려 마음 아파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도 미처 알지 못하는 죄와 완고함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그대로 가지고 살면 행복할 수 없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고 우리의 환경을 흔드십니다.
환경이 흔들리면, 즉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의 마음도 흔들리면서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몸부림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죄와 완고함이 우리에게서 발견되고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연합을 이룸으로써,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세계를 바라보며 기뻐하시고, 인간은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복을 당신 안에서 다시 누리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것을 만세 전에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4-5, 새번역)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이루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선한 일들을 우리가 이루어드림으로써 이 땅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끝까지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우리 삶에 역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이 세상 끝 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게 된 믿음의 사람들로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아갈 때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또 그것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