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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3일 수요예배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0 ✦
마르다의 분노: 분노를 합리화하지 말라
(누가복음 10장 38~42절)
오늘 본문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며 저도 여러 번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분노’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른 각도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크게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순위를 잘못 세우면 분노가 일어난다
본문의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지간인데, 마르다가 언니이고 마리아가 동생입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 일행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집에 초청했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8절)
자기 집에 손님들을 초청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초청하고 보니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청소도 해야 하고 장도 봐야 하고 음식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으니까 그 수는 최소 13명이었고, 그들 외에도 함께 다니는 사람들(70명,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수가 같이 다녔다고 보면 최소 20~3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겠다고 올지 모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대접할 생각을 하니까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어느 순간 동생 마리아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찾아보니까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39-40a절)
그 순간 마르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둘이 힘을 합쳐서 일해도 이 많은 손님들에게 줄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인데 마리아는 돕기는커녕 자신에게 모든 일을 맡겨 두고 태연히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겁니다.
통상적으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의 발치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제자들 중에서도 서열 1위의 제자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경우에도 랍비의 발 앞에 여자가 앉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광경을 바라본다면 마리아는 보통 대담한 여자가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한바탕 싫은 소리를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0절 하)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을 도와주라고 말해달라는 겁니다. 이 상황은 지금 마르다가 예수님께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 명령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초청했을 때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했는데, 상황과 분위기가 예상과 다르게 흐르니까 화가 난 겁니다.
예수님은 일단 마르다의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이 상황을 보고 있는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주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41-42절)
마리아는 자기가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 마르다도 괜히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그냥 좋은 것 한 가지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내용만 놓고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는 꾸짖고 마리아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조를 직접 듣는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르다를 꾸짖으신 게 아니라, 마르다에게 일을 대하는 다른 관점을 가지라고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화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마르다 스스로 돌아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1절, 새번역)
분노는 소용돌이치는 마음의 번잡함이 그 원인입니다.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감정들과 생각들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잃고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다가 처한 상황만 놓고 보면 마르다가 잘못했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손님을 초대한 사람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마르다가 분주한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하십니다. 음식을 장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으면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르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분노하고 있습니다. 손님을 초대했으니 대접하는 게 당연한 일이고, 그 때문에 분주한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지금 여기 계시는데도 마음의 평화가 깨져서 화를 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모셔 놓고 집 주인이 화가 나 있다는 것도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왜 화가 났습니까?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예수님을 놓아두고 자기 앞에 닥친 일들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기쁨이 깨지고 화평이 무너진 겁니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7세기 초반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1618)라는 그림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르다가 매우 심술궂은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짜증스런 표정으로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벨라스케스는 틀에 박힌 예배라는 형식에 몰입해서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의 성난 얼굴은 형식적인 예배에만 치중해서 행함을 놓치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얘기입니다. 마치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절대 그가 가르친 진리와 동떨어지지 않았다.”라고 외친 야고보의 지적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르다의 상황은 그러한 벨라스케스의 관점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열심이 결과적으로 화가 나는 이유가 되었다면 과연 그 열심은 무엇일까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좋은 일을 하는데도 왜 화가 나느냐고 물으십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주인이 오전 일찍부터 그날 일을 마감할 때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일꾼을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그날 일을 마치고 주인이 일당을 지급하는데, 맨 마지막인 한 시간 전에 데려온 사람들에게 각각 한 데나리온씩 줍니다. 그러자 그들보다 일찍 온 일꾼들은 그보다 더 많은 일당을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까 불만을 가지고 따집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2)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느냐며 따지고 들자, 주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3-14)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의 열심과 하나님의 기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은혜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 자기 기준의 덫에 빠지면 분노가 일어난다
이와 비슷한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큰아들은 집에서 열심히 일하며 아버지를 섬기는데,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받아 집을 떠나서 흥청망청 탕진해버립니다. 그 후 그는 고민 끝에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열어주는 겁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큰아들이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9-30)
이 비유들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가 화를 냅니까?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 자기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어떤 직장인이 있었는데, 직장생활 25년 동안 제대로 된 휴가를 반도 누리지 못했고, 나머지 휴가는 자진반납 했습니다. 남들이 휴가 갔을 때도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휴가철이면 비위가 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사인 자기는 휴가를 반납하는데 꼬박꼬박 휴가를 챙기는 부하 직원들이 얄밉고 보기 싫었습니다.
그는 남보다 두세 시간 일찍 나와 남보다 두어 시간 늦게 퇴근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6시만 되면 칼 퇴근을 하는 사람들은 월급이나 축내는 게으른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가 사장도 아니면서 화가 났습니다.
이렇듯 자기 기준이 분명한 사람은 그 기준이 도리어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기준에 어긋난 사람에 대해서는 점점 분노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손님 대접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르게 구성해서, 예수님께 청하는 사람을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로 바꿔보면 어떻겠습니까? ‘주님, 마르다 언니가 제발 일 좀 그만하고 여기 와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라고 해주세요. 왜 언니는 중요한 말씀은 안 듣고 저렇게 부엌에서 일만 하는 걸까요?’
마리아가 그랬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아마 예수님은 ‘네 언니 마르다를 내버려둬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도 외골수 신념이 된다면 열심히 일하는 것만을 지고의 덕목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3. 취향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이 은사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휴가까지 반납하고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휴가지에서 누리는 자유를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취향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입니다. 취향이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분노하는 것은 편견이고 교만일 뿐입니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감당하려고 하면 분주해짐으로 염려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한꺼번에 여러 일들을 하는 사람도 사실은 순차적으로 한 가지 일을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예수님과의 관계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습관이 내 눈에 거슬리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나중에 마리아는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요 12:1-8). 사실 마리아의 그런 행동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머리를 풀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요 12:7, 새번역)
만일 마르다가 오로지 기쁨으로 음식을 준비했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마르다가 자신을 위해 기쁘게 음식을 준비한 것이 참 귀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21세기 사람들은 모두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사실 바쁠수록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관계를 해칠 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일을 왜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분노가 많습니다. 집에까지 일을 싸 들고 와서 바빠 죽겠는데 왜 귀찮게 하느냐고 가족한테 신경질을 냅니다. 하지만 일하느라 배우자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자녀와 함께할 시간도 없다면, 도대체 그 일은 왜 하는 거냐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만약 마르다가 자기 능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준비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다면 마리아를 혼내 달라고 예수님께 무례한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일 중독자들은 마리아처럼 빈둥거리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우선순위이고 기준일 뿐입니다. 자기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므로 그것으로 남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는 옳고 마리아는 틀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인데, 교만한 사람들은 평생 우월감과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듣고도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 11:20)
마르다는 바깥까지 뛰어나온 데 반해, 마리아는 방 안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묵상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사람입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 가만히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제 분노하고 왜 분노합니까? 돌아보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 때문에 화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 기준에 맞지 않다고 틀렸다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기준을 우리에게 갖다 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해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못났습니까? 연약하고 불순종하고 비겁하고 형편없지만, 예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참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러셨더라면 우리 중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시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주님 앞에서는 어떤 실수도 용납됩니다.
어쩌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더 예뻐하시는 것 같아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아끼신다면 마리아더러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셨을 텐데 그렇지 않으신 것을 보니 자기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도 꼴 보기 싫었지만, 그런 마리아를 받아주시는 예수님에게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보다 저를 더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저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무한한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알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관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분노하는 일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혹시 우선순위를 잘못 세우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일보다 항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르다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분주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 분주함 때문에 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도 사랑하셨지만 마르다도 사랑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 삶의 최우선순위를 드리며 나아갈 때, 염려와 근심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분노가 아니라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나 봉사로 초점이 옮겨가면 화가 나고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께 최우선순위를 두며 나아감으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