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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8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1 ✦
나훔(위로의 기도): “우리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으소서”
(나훔 1장 9~15절)
[들어가는 말 – 나훔의 이름의 의미]
나훔은 우리가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아주 중요한 이름입니다. 우선 이 나훔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가버나움 때문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셨던 곳으로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가버나움이라는 이름이 바로 ‘나훔의 마을’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이름의 의미 때문입니다. 나훔의 뜻이 바로 ‘위로’이고, 이 단어를 사람에게 붙이면 ‘위로자’가 됩니다. 성경에는 위로, 혹은 위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영적으로 민감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예로 구약에서는 느헤미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나훔과 여호와가 합쳐진 이름으로 ‘여호와가 위로하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이름처럼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노아도 위로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바나바가 있습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 레위인으로서 그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그의 삶을 보고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바’(‘바르’=아들, ‘나바’=위로)라는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는 정말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해도,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 한마디로 하나님에게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에 감동된 성령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는데,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로하던 위로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의 의미와 같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로했던 위로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훔의 특징입니다.
1. 성경이 말하는 위로자
우리가 생각하는 위로는 보통 어떤 의미입니까? 어딴 사람의 인생에서 이미 끝나 버린 상황을 보며 이제는 더 이상 상황이 바뀔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주려고 하는 것을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위로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대단히 연약한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성경의 위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로는 결코 연약한 단어가 아닙니다. 위로라는 의미로 사용된 ‘나함’이라는 단어가 때로 하나님에게 쓰이면서 ‘후회’나 ‘한탄’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탄은 정말로 뭔가를 잘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그런 후회나 신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후회와 하나님의 후회는 다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대표적인 본문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6-7)
여기 나오는 ‘한탄’을 새번역에서는 ‘후회’로 번역했습니다.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아, 내가 사람을 괜히 만들었어.’라고 그냥 후회하고 끝내는 분이시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실수하신 것이고 패배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결코 우리처럼 잘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거나 ‘한탄’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후회는 슬퍼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우셔서, 인간을 그렇게 만든 죄를 그냥 두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입니다.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후회에서 노아의 홍수가 나왔고, 하나님의 한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볼 때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죄 때문에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일어나서 그 죄를 향해 싸울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위로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나훔 또한 바로 그런 ‘위로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2. 원수를 심판하고 백성을 위로하심
나훔서를 읽어보면, 나훔은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도록, 신앙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나훔서에 나오는 나훔의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위로를 줍니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2-13절)
여기서 ‘그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니느웨 사람들을 말합니다. 나훔은 니느웨를 향한 경고의 묵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훔서에 가득 차 있는 이야기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판의 말씀이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나훔서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니느웨에게 주어진 메시지이기 때문에,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였습였습니다(지금의 이라크 모술). 그러다 보니 남 유다 사람들에게는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니느웨 사람들이 증오스럽고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동시에 니느웨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초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는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나훔의 메시지는 위로가 됩니다. 그런 악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강력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가장 크게 무너질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고난당할 때도 힘들지만, 정말 힘든 때는 불의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잘될 때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고난이나 시련은 참고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원수들의 형통함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혼란이 찾아오면서 마음이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시편 73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시 73:1-3, 새번역)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살면서 보니까 악인이 잘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며 넘어지고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아삽)는 자신의 시험 드는 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시 73:4-9, 12, 새번역)
아삽은 자기가 지금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악인이 의인인 자기보다 더 잘 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합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시 73:13, 새)
이러한 마음은 아삽 같은 시편 기자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 모두가 겪는 고통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단순히 질투 이상의 도전이 아니라 매우 강렬한 영적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무너지고 힘든 마음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바로 나훔의 메시지입니다. 아삽은 바로 그러한 메시지를 듣고 주님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시 73:17-20, 새)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삽의 마음이 한참 상해 있을 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고, 그러한 가운데 나훔이 전한 위로의 메시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시 73:27-28, 새)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습니까? 시험에 들어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하나님의 성소로 가서 예배를 드리자고 위로의 메시지를 건낸 겁니다. 그리고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3. 세상의 결론을 꿰뚫어 보라
니느웨에 대한 나훔의 예언은 니느웨가 멸망하기 수년 전에 선포되었습니다. 그는 앗시리아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또는 멸망 후에 이것을 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나훔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 너무나도 실감나고 단호하게, 그리고 사실 그대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14-15절)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쓸모없게’(14) 되었다는 것과 ‘진멸’되었다는(15)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결론을 꿰뚫어 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군사력을 의지하며 힘으로 누르고 악을 행하는 앗시리아가 엄청나 보이지만 그래봤자 악인이고 결국 쓸모없는 것으로서 진멸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나가고 대세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려는 우리보다 그들이 훨씬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이 옳은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완전히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봤자 결국 그 모든 것은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결론을 꿰뚫어 보는 메시지이며,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신앙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위로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잘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 속한 것들의 결론은 죽음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망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실감나게 체험해야 합니다. 나훔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이다.” (나 1:1, 새)
여기서 ‘묵시’가 히브리어로 ‘하존’인데, 이 말은 입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나훔은 그냥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들어간 상태에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영화를 볼 때 평면 스크린으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처럼 실제로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시의 초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너무나 크고 강했습니다. 그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훔은 ‘하존’ 상태에 들어가서 니느웨의 멸망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그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체험한 것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악의 최후를 꿰뚫어 보고, 죄의 결말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마지막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부러워하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천하를 가지더라도 결국 생명을 잃어버리고 멸망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기도와 말씀묵상과 예배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시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며 더욱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가게 되고 세상을 향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아가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안 믿는 사람이 나보다 잘 나가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봐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존’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흔들렸던 마음을 다시 잡아 가면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며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훔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나아감으로, 세상 속에서 낙심해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나아가는 위로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성공을 선포하는 고귀한 인생으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