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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3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8 ✦
느헤미야: 인내의 기도 - “종이 형통하여 은혜를 입게 하소서”
(느헤미야 1장 1~11절)
들어가는 말: 느헤미야는 누구인가?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유다 포로의 자손으로 페르시아의 고관이었습니다. 그는 BC 444년경 유다 백성의 3차 귀환을 인도하고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외부의 수많은 역경과 반대 및 내부의 분열을 무릅쓰고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영적 리더십의 표본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단기간에 완공할 만큼 탁월한 리더십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과정에 있어서도 신앙인의 참모습을 보여 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신실한 신앙이었는지는, 페르시아 수산 궁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에게 성벽 건축보다 훨씬 더 힘들고 중요했던 것이 페르시아 수산 궁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을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이었는데, 당시 고대 근동에서 술 관원은 아주 높은 관직으로, 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직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왕들에 대한 암살이 주로 음식이나 음료수를 통한 독살을 통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함부로 먹거나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왕들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을 술 관원으로 임명하고 그 사람이 주는 것만 마셨습니다.
페르시아에서 느헤미야의 직분이 바로 그렇게 중요한 술 관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다는 것은, 그가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후손으로서 중앙정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 느헤미야는 정말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그렇게 높은 지위는 느헤미야에게 굉장한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안락한 환경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치와 의미가 있어야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됩니다. 그런데 그 가치와 의미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지 않는 한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라
느헤미야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편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갈림길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삶을 사는 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길을 걸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길을 걸을 수도, 그런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느헤미야는 정말 아름다운 신앙인이었고, 영적 능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정말 힘든 상황에서 또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인도하심을 구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쉬운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만사형통하고 편안하고 좋은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의 시작은 바로 어느 날 그에게 들려온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1-3절)
이때는 스룹바벨의 인도로 진행된 제1차 포로 귀환으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때이고, 에스라의 인도로 진행된 제2차 포로 귀환으로부터는 10여 년 지난 시점입니다. 1차 때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했고 2차 때 에스라가 영적 재건운동을 벌였지만, 예루살렘의 상황은 여전히 너무나 비참하고 어려웠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나라와 민족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있었지, 현실적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자기가 뭔가를 꼭 해야 하는 책임을 맡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형제 중 하나인 하나니와 또 다른 몇 사람이 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전해준 것을 듣고 나니, 그 동안 마음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마음에 강력한 도전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이렇게 가슴 아픈 소식을 듣고 도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결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의 결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동족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들었지만,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에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지금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상황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페르시아의 고관인 자기 삶을 포기하고 그리로 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습니다. 왕에게 임명받은 직책을 자기 마음대로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2. 기도함으로 기다리라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그 중요한 비밀이 그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4절)
결단에 대한 답은 이 구절의 뒷부분에 있습니다. 단순히 울고 슬퍼하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울고 슬퍼해도 그것이 영적인 역사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이때 느헤미야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결단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그가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도전받으며 감정적으로 울컥하고 속상해하면서 끝난 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전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기도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단순히 슬픔을 느끼고 우는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은혜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도전받고 은혜를 받았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갑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겹고 억울하고 답답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역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보여 준 비밀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단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첫걸음을 떼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전 과정이 기도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다림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기다림입니다. 인도하심을 받을 때 기다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우리의 기다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이 기다림은 영적인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강하게 도전받고 은혜를 받아도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다려야 될 때 거기에서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잘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혹시 기다리게 되더라도, 기다리다가 도전과 은혜를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도전과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서두르지 않을 수 있는 기가 막힌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기다림은 그냥 시간만 흘려보내는 기다림이 아니라, 기도와 함께하는 기다림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처음에 품은 결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결코 자기 힘으로 먼저 서두르지 않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 2:1)
1장 1절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은 때는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기슬르 월’이었는데, 2장 1절에서는 제20년 니산 월입니다. 기슬르 월은 양력으로 11월이고 니산 월은 3월이니까 약 4개월이 흐른 겁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받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4개월이라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 사이에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기간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기도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하면서 바뀌다가 결국 그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냥 기다린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처음 주신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두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받아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 신앙인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한 결단이 왜 흔들리거나 없어집니까? 생각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생각은 얼마나 많이 합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아니야, 요렇게 해야 돼.’ 그런데 몇 시간 지나면 ‘아니야, 조렇게 해야 돼.’ 다음 날이 되면 ‘아니야, 이렇게 해야 돼.’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에이, 다 관두자. 내가 이래보았자 뭐 하나? 다 부질없다.’
왜 그렇게 자꾸 바뀝니까? 그리고 왜 포기해버립니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생각만 하니까, 이랬다저랬다 바뀌다가 결국 흐지부지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 기회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열린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포도주를 드리러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느 2:1b-3)
왕이 신하의 안색을 살피고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왜 이때 느헤미야가 두려워합니까?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엄한 일인데, 자기 안색이 좋지 않음으로 왕이 신경을 쓰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조심스럽게 자기 상황을 아룁니다. 이때 느헤미야의 심장은 쿵쿵 뛰었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 2:4)
왕 앞에서 감히 수심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인데, 놀랍게도 왕이 느헤미야를 걱정해줍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 느헤미야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놀랍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보인 느헤미야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는 이 순간 무엇을 합니까? 느헤미야는 ‘곧 하늘의 하나님에게 묵도’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는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순간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난 4개월 동안 그가 계속 기도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즉시 하나님 앞에 속으로 기도한 후에 자신이 품은 생각을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기도하면서 기다렸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만이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역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회를 주셔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잡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영성입니다. 어디를 가서 기도하고 온 게 아니라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 왕의 질문 앞에서 잘못 대답했다가는 죽거나 심한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왕과 대화하는 중에 잠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했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훌륭한 신앙인이며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4.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의 역사를 경험하라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우리가 일하면 그냥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놀라운 역사를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일으키시고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경우를 보십시오. 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짧은 순간 기도하고 나서 그 동안 기도하며 생각해 왔던 것들을 즉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길 바라면서 대답한 것입니다.
“왕에게 말씀드렸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을 좋게 여기시면, 소신의 조상이 묻혀 있는 유다의 그 성읍으로 저를 보내 주셔서, 그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느 2:5, 새번역)
객관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무엄한 요구입니다.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성벽을 건축하게 했다가 잘못하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 오묘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 옆에 앉아 있었다. 왕은 ‘그렇게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왕이 기꺼이 허락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얼마가 걸릴지를 말씀드렸다. 나는 왕에게 덧붙여서 말씀드렸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소신이 유다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몇 통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또 왕실 숲을 맡아 보는 아삽에게도, 나무를 공급하라고 친서를 내리셔서, 제가 그 나무로 성전 옆에 있는 성채 문짝도 짜고, 성벽도 쌓고, 소신이 살 집도 짓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 주셔서, 왕이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느 2:6-8, 새)
느헤미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단지 가는 것만 허락해 준 것이 아니라, 통행증과 건축에 필요한 목재 등 유다에 돌아가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의 삶은 그분의 선하신 손길이 반드시 함께하는 삶입니다. 당장은 아닌 것처럼 보이고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아름다운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 때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에는 정해진 틀이 없습니다. 그래서 답은 하나입니다. 계속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계속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이 선하신 손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늘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보살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놀라운 역사를 풍성하게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