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동영상: https://youtu.be/6vQYfgPb9s0?t=1812
2020년 12월 16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6 ✦
히스기야: 관계의 기도 -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이사야 38장 1~8절)
1. 히스기야의 기도
우리 교회가 소속된 미국장로교단을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회들은 개혁 신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신앙은 개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 신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개 보수적인 교회들은 세상과 교회를 나누면서, 세상은 악한 것이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신실한 신앙인들은 세상의 악한 것과 더러운 것을 다 끊어버리고 외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개혁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이 악하고 그 문화가 타락했어도,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혁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개혁은 진짜로의 개혁, 참됨으로의 개혁입니다. 종교 개혁 때도 그랬지만, 개혁은 하나의 새로운 사상, 혹은 그동안 없었던 또 다른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변질되었기 때문에 본질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상뿐 아니라 신앙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진짜였습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도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진짜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절대로 종교개혁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 중에서 이러한 개혁주의적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남 유다 왕 중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세 명 중의 한 명으로, 다른 두 사람은 여호사밧과 요시야를 꼽습니다(다윗의 길로 걸음). 그 중에서도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Top 2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 두 왕을 남 유다에서 가장 뛰어난 왕으로 꼽는 것입니까? 그들은 모두 종교개혁을 행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신앙이 진짜가 아니면 개혁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신앙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몸부림치다가 나온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특별히 어떤 면에서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까? 그는 바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진짜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를 빼놓고 참된 신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자, 보십시오. ‘저 사람이 기도생활은 잘 안 하지만 그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말씀을 안 읽고 묵상도 안 하지만, 그래도 참된 신앙인이다.’라거나, ‘저 사람이 예배는 잘 안 드리지만, 그래도 참된 신앙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기도를 안 하고 말씀을 붙들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참된 신앙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 안에 그런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개인기도나 통성 기도 등 기도하는 스타일, 말씀을 읽는 스타일, 예배하는 스타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서, 예배하지 않으면서 진짜 신앙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기도에 있어서, 히스기야는 그만이 가진 독특한 기도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히스기야의 기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특징들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지만,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특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는 기도
히스기야는 삶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흔히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 앞으로 달려갈 거라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을 막는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 앞으로 달려간다는 점에서 히스기야는 신앙적으로 아주 철저하고 확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삶의 어려움 앞에서 무조건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는 그의 기도의 영성이 얼마나 철저하고 대단한지를 봅니다. 하루는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데, 그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절)
기도하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쩌면 살려주실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살 수 없으니 유언이나 남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나님의 사람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시험의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에게 닫힐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 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이때 하나님에게로 달려갑니다. 가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하면 어떻게든 고쳐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 간 것이 아니라, 너무 절망적이고 어려우니까 그냥 달려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무서운 신앙입니다. 계산하고 판단하고 요리조리 재는 신앙보다, 마치 이런 본능과도 같은 신앙이야말로 정말 놀라운 신앙,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몸에 베어 영적 습관이 된 신앙입니다. 그냥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은 사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신앙입니다. 아무리 의심을 집어넣으며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냥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히스기야의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래 전 들었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이 교회를 핍박하던 이야기입니다. 공산군이 교회당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총을 겨누며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하나둘씩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학교 어린아이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공산군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물어볼게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어쩌면 신앙은 이 아이와 같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마음에 의심과 회의가 가득한 순간에도, 우리가 정말 시험에 들었을 때에도, 그 마음 그대로 들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신앙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이사야로부터 병들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앗수르(앗시리아)에게 공격받아서 상황이 매우 급박할 때였습니다.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6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유다가 지금 앗수르의 공격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급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 한복판에서 히스기야가 병든 것입니다.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사람들은 대개 한 번은 버팁니다. 그러나 똑같은 어려움이 반복해서 닥쳐오면 대부분 무너집니다. 한 번 왔을 때는 버티는데 또 다른 어려움이 함께 오는 순간 모든 영적 의지와 능력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면서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든 사람이 겪는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상황이 딱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런 신앙이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가 보여 주는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것을 차단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2절)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는 구절이 그의 기도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면벽수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문관’(無門關), 곧 ‘관계를 맺는 문이 없는 방’에 들어가 벽을 보고 앉아서 오직 진리만을 구하고 수행하다가 득도하면 그 무문관을 부수고 나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그것과 비슷해보이지만, 불교의 면벽수행은 홀로 수행하는 것인 반면, 히스기야의 벽을 향한 기도는 혼자가 아닌 하나님 앞에 집중하는 기도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께만 집중하며 아뢰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기도원에 올라가서, 때로는 굴에 들어가서, 아니면 작은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필요할 땐 세상을 다 차단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벽을 향해 앉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기도할 때 눈을 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하면서 때로 눈을 감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에게 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사를 외우는 게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정말 중요합니다.
3)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3절)
사실 이 부분은 당황스러운데, 어떻게 보면 아주 교만하고 무례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했고 선한 일을 많이 행했으니까 그것을 보고 살려 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은 그 동안 살아온 그의 신앙의 삶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이런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았던 그 모든 시간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어서 행복했던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그렇게 섬길 수 없다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내용이 확실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나중에 히스기야가 고침을 받고 부른 노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하겠구나. 사람이 사는 땅에서는 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하겠구나. 내가 다시는, 세상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겠구나.’” (사 38:11, 새번역)
다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뵙지 못하게 될까 봐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올에서는 아무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주님을 찬양하듯,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일러줍니다.” (사 38:18-19, 새)
결국 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나는 제대로 살았으니 살려주셔야 합니다.’라는 교만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가 얼마나 특별한 관계였는지, 주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게 얼마나 소중했었는지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냥 먼 곳에 계신 하나님, 일반 백성들의 관념 속에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나의 하나님, 나와 특별한 관계 속에 계셨던 하나님, 나의 삶 속에 함께 계셨던, 내게 가장 행복했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기도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는 진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입니다. 기도는 저 하늘 높이 또는 저 까마득한 우주 어딘가에 멀리 계시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본입니다.
히스기야의 표현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접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아들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가운데 살았던 접니다. 주님을 섬겼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접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이러한 고백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 마치 고생했던 아이가 부모를 만났을 때 부모 앞에서 서러움이 폭발하듯이 그 서러움이 하나님 앞에서 터져 나오면서 통곡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진짜 기도인지 아닌지는 첫마디에서 결판납니다. 첫마디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이미 기도는 끝난 것과도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신지를 보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 계신지 보십시오. 그때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모든 걸 토해 내고 울 수 있는 관계인지 보십시오.
내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분, 내 속에 있는 아픔을 가장 잘 아시는 분, 그러면서 세상 어떤 관계보다도 가까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에게 마치 집 밖을 헤매고 다니다가 집에 돌아온 아이 같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마음을 물을 쏟아 붓듯이 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처럼, 바로 그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2. 진짜 기도와 진짜 응답
히스기야의 기도는 진짜 기도입니다. 세상에서 쉽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감당하면서 어느 날 자신도 감당 못할 충격적인 통보에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드린 기도입니다. 우리도 연약한 인생,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기도가 바로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바로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는 강력한 기도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기도가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응답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5절)
너는 죽을 것이라고, 살지 못할 것이라며 네 집에 유언하라고 말씀하신 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 앞에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히스기야가 갖고 있던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앗수르에게서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하스의 해시계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초자연적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6-8절)
여기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지금 히스기야를 돌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아픈 것을 아시고, 그의 마음이 흔들릴 것도 아시며 그를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우리도 그처럼 간절하게, 그처럼 가까이, 그처럼 치열하게 기도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부르짖어도 응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응답이 안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사랑으로 돌봐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짜 응답입니다.
바로 이런 진짜 기도, 진짜 신앙, 그래서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 그 은혜를 진짜로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