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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1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7 ✦
“사역자들을 위한 기도”
(데살로니가후서 3장 1~5절)
1.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
‘사역자’라는 말이 영어로는 ‘minister’라고 하는데, 보통은 목회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사역자는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전적으로 교회 사역이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일꾼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역자는 복음을 위해 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보면 목회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들을 신실한 사역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교회 안에 말씀사역자인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를 세우신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equip, train) 즉 훈련하여 그들로 ‘봉사의 일’, 즉 사역을 잘 감당하는 사역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신실한 사역자로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역자를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 내용에서 이 시대의 사역자를 위한 기도제목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선교 팀을 이루어 제2차 전도여행(AD 50~53년) 중에 데살로니가교회를 개척한 바 있습니다. 그때 선교 팀은 바울 자신과 실라, 디모데, 그리고 누가였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행 15:40-41)
2차 전도여행 직전에 바나바와 갈라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1-3)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진 루스드라에 다시 왔을 때 디모데를 만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디모데도 합류하여 3명이 됩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10)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드로아입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본 바울은 자기 선교 팀과 이것을 나누고 그들은 함께 마게도냐로 가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결정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와 “우리를”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이 드로아에서 선교 팀에 합류하여 4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 17:1)
그런데 빌립보에서 그 다음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왔을 때 다시 “그들이”가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누가를 빌립보에 두고 실라와 디모데만 데리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
데살로니가후서의 시작도 내용이 전서와 똑같습니다(1:1-2).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조폭까지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쫓아와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흩어져서 바울은 혼자 저 남쪽의 아덴(아테네)으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갑니다.
나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의 소식을 가지고 고린도에서 합류하여 거기서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의 이름은 없고 바울, 실루아노(실라의 로마식 이름 표기), 디모데의 이름만 전서와 후서에 나오는 것을 보아도, 누가는 그때 고린도에서 함께 하지 않다가, 나중에 마게도냐에서 다시 합류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한 것이 주후 51~52년(또는 54년)경인데,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면서 그들이 바로 얼마 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떠나온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두 번에 걸쳐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데살로니가 교회를 걱정하는 내용만 쓰는 게 아니라, 어디에서나 효율적인 선교 사역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 부탁을 합니다.
2. 바울이 부탁한 사역자를 위한 기도제목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탁한 사역자를 위한 기도제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1) 주님의 말씀이 퍼져나가도록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1절)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말씀이 신속하게 퍼져나간 것처럼,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자신들을 통해 말씀이 속히 펴져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퍼져 나가”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달리다’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신속하게 빨리 달려가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지역들에 전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느리게 걸어서 전해지기에는 너무 절박한 것입니다.
몇 달 전 주일설교 때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기록한 고린도에는 이스트미아 제전(Isthmian Games)이 2년마다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트미아 제전은 올림픽 제전(Olympian Games), 피티아 제전(Pythian Games), 네메아 제전(Nemean Games)과 함께 고대 그리스 4대 경기였습니다. 지금은 올림픽만 남았습니다. 당시 이스트미아 제전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 주자가 성화를 들고 마지막 골인 지점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마라톤 주자가 골인 지점을 바라보며 달리는 그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고 또 고린도에서도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그 기간이 1개월에서 6개월 미만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영향력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전 1:6-8, 새)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가 있는 마케도니아(그리스 북부)와 아테네와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그리스 남부)에만 알려진 게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도 이들의 좋은 소문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 짧은 시간에도 말씀 안에서 성장하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신뢰한다고 말합니다.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4절)
이처럼 복음이 지닌 생명력은 강력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대제사장이 로마의 유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바울의 죄목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행 24:5)
그는 바울을 보고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전염성을 빙자하여 비꼬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임팩트’(Impact), 즉 ‘충격’ 혹은 ‘영향력’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임팩트가 사역자들을 통해 신속하고 강력하게 나타나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임팩트를 이미 데살로니가에서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살전 1:5, 새)
이런 임팩트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머문 기간을 한 달 이내의 짧은 기간으로 보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데살로니가에서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복음을 듣고 양육을 받았지만, 너무나 복음 안에서 신실하게 자라나는 놀라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역에서는 시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역의 임팩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했느냐’도 안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래 꾸준히 한다는 것은 아주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래 질질 끄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역에서 주님의 말씀의 임팩트를 나타내는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맨 날 하는 거니까 대충 오래 질질 끌며 하는 게 아니라, 강력한 임팩트가 나타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사역에 헌신하는 복음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저를 위해, 당회를 위해, 제직회를 위해 기도해주실 때, 말씀의 임팩트가 나타나는 사역이 되도록,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신속하게 퍼져나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 악한 자에게서 지켜주시도록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가 누구이겠습니까? 마귀입니다. 그는 악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전쟁을 치렀던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1-13)
‘간계’라는 말은 간교한 계략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싸움에 룰이 없습니다. 아주 치사하고 악하게 합니다. 악마는 모든 악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악한 자들을 충동해서 복음의 전파를 가로막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기도를 부탁합니까?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2-3절)
복음을 전하며 전도할 때 예외 없이 등장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때 데살로니가에서 자기를 핍박하고 쫓아낸 악한 유대인들을 생각하고 쓴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도 그랬고, 여기서도 그렇고, 선교 현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너무 흔들리지도 마시고, 그들을 너무 미워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은 사탄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못되게 구는 그 사람이 나의 상대가 아닙니다. 그들의 배후에서 ‘악한 자’가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굳게 해주시며 인도해주실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자에게서 건져주시고 지켜주시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주기도문’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악’은 본래 ‘악한 자’ 마귀를 뜻합니다. 악한 자, 즉 악마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역할 때 우리는 그를 경계하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자신의 먹이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경고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존 버니언(John Bunyan)의 <천로역정> 책을 보면, 길을 역주행하는 순례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이 ‘겁쟁이’와 ‘불신’입니다. 그들 앞에 사자가 턱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제대로 안 될 때 그 원인이 바로 두려움과 불신입니다. 사역자들이 흔들릴 때도 두려움과 불신이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나 선교사를 위해 기도할 때, 악한 자(사탄)에게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하기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아군끼리 총을 겨누고 발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 영적전쟁을 해야 하는데 크리스천들끼리 싸우게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리더들끼리 갈등하고 다투며, 교회가 분열하여 깨집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위해 마귀의 공격에서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날 때 그 중심에는 초신자나 VIP가 있는 게 아닙니다. 예외 없이 목사들과 장로들이 있고 또 집사들과 권사들이 있습니다. 교회 리더들끼리 싸우고 갈라집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보며 누가 웃겠습니까?
얼마 전 제가 ‘목회편지’에 “마동탁과 베드로”라는 제목으로 쓴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를 언급하면서 마동탁에게 감독이 한 말을 썼습니다. “지금 네 녀석은 저쪽에서 바라는 대로 놀아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
지금 교회에서 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싸울 때 ‘저쪽에서 바라는 대로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미워지고 보기 싫어질 때, 다투고 분열이 일어나려 할 때, 바로 내 뒤 어두운 곳에서 음흉한 표정으로 씩 웃고 있는 사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정작 마귀가 바라는 대로 놀아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사역하다 보면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갈등과 어려움과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놀랍게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화해하고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일 때, 마귀는 충격을 받고 창백한 얼굴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3) 사랑과 인내로 채워지도록
평생 신실하게 복음 증거에 헌신한 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의 열매를 위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들은 두 가지 덕목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인내’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역할 수 없고, 인내하지 않는다면 사역할 수 없습니다. 사역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향한 것인데,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사역을 하다 그만두는 이유는 더 이상 사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인내입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때 인내로 버텨야 하는데 그냥 도망가 버립니다.
특히 갈등이 일어나려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랑과 인내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역의 열매를 기대한다면 사랑과 인내, 이 두 가지는 포기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절)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 이 두 가지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그 사랑을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사역은 무슨 일이 아닙니다. 자꾸 일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일을 열심히 잘하기만 하는 것이 사역자가 아닙니다.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무슨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랑이 없으면 사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자기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역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십자가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 그 인내가 함께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역자들을 위해서도.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히 12:2-3, 새)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사역은 사랑하는 것, 인내하는 것, 십자가를 지기까지 참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대표적 사역자로 귀한 분이 한국교회 역사에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고(故)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 목사님이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자들을 돌보던 해인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 때, 당시 반란군이었던 안재선이란 사람이 친미이고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분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을 총살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이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안재선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며 또 구타를 금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펼쳐서 결국 그를 살려냈습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자기 아들 하나도 아니고 둘을 죽인 사람인데 아들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여 가족으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딸 손동희가 그것만은 안 된다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동희야, 성경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를 살리고 지옥 갈 그를 구원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느냐?”
그 후 실제로 안재선의 집안에 목사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한센병 환자촌인 ‘애양원’의 목자로 자신의 소명을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그럴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는데, 백범 김구 선생의 전화였습니다. “목사님, 서울로 오셔서 학교를 맡아주셔야 하겠습니다. 목사님 같은 교육자가 이 땅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무렵 마침 김구 선생은 <서울신문>에 한 칼럼을 썼습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다. 이 땅의 정치가들이 손 목사와 같은 포용성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 목사님은 그런 김구 선생의 요청을 사양하고, 살 썩는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며 사람들이 지옥이라 부르는 나환자촌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나환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씀하며, 입으로 그들의 피고름을 빨아내면서 밤낮으로 그들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역을 이어가다 공산당의 총에 순교하셨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심정을 보여주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꽃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땀을 쏟는 염천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열매 맺는 가을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추운 겨울 주릴 때도 주의 위로 더할 것은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 유혹의 손길 되나
고생 중에 인내함은 최후 승리 이룩하네
손양원 목사님의 위대한 사역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였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사역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자신이 그런 사역자가 되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또 다른 분들도 그런 사역자가 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채워지도록 기도해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놀라운 교회로 계속해서 쓰임 받기 원합니다.
➤ 결단의 기도
1) 주님의 사역자들을 통해 말씀이 신속하게 퍼져나가도록
2) 주님의 사역자들을 악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3) 주님의 사역자들이 사랑과 인내로 채워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