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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9일 수요예배
✦ 탕부 하나님 6 ✦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이사야 35장 1~10절)
1. ‘본향 집’을 향한 온 인류의 향수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읽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문맥은 그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이 이야기를 ‘방랑’과 ‘귀향’이라는 성경 전체의 주제에 비추어 읽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개인적 구원의 한 감동적인 이야기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사실은 인간이 타락하여 방랑하다가 하나님의 집으로 귀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류 전체의 이야기를 보여주시면서 온 세상의 소망을 약속해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먼 나라로 떠나지만 곧 실망합니다. 굶주리던 그는 아버지 집에 있는 양식을 떠올리며 점차 향수에 빠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고향’, 또는 ‘본향’은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우리처럼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는 데 들이는 돈이 매년 수십억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이라고 느꼈던 장소와 시절과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있게 마련입니다. 한국에 가보시면 옛날 어릴 때 자랐던 곳에 가보셨을 겁니다.
‘집’이란 강력하면서도 아득한 개념입니다. 고향집을 생각할 때 느끼는 여러 감정들은 그 어딘가에 대한 깊은 갈망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실제의 장소나 가정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지, 그런 바람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실제로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제가 어린 시절 자랐던 동네에 가보았는데, 아파트와 학교 건물은 그대로 있었지만 풍경은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전혀 옛날 분위기가 없었습니다.
고향집에 대한 추억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특정한 풍경이나 소리, 심지어 냄새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갈망을 자극하기만 할 뿐이지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에 크게 실망하는 경험을 합니다. 명절을 준비할 때는 ‘내가 드디어 올해 그 뜻깊은 곳에서 가족 모임이 있으니까 평소에 늘 그리워하던 푸근함과 기쁨과 위로와 사랑을 맛보리라.’ 하는 기대를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그런 모임은 사람들의 큰 기대와는 달리, 실패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이민을 와서 몇 년 동안 오직 한국이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신학교에 가서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 1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너무 좋았습니다. 옛날 친구들도 만나고, 다니던 교회도 가보고 아주 좋았습니다. 물론 그때 결혼도 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간지 얼마 안 되었던 9월에 한국은 추석이라 학교가 다 닫고, 밖에 나가보니까 갈 데도 없고, 친척들도 자기 고향에 가고, 제 친구들도 자기 친척집에 가니까, 저 혼자 멍하니 있다가 ‘아, 한국이 내 고향이 아니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깨달은 것은, 장소가 고향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은 사랑하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향수’를 가장 많이 다룬 작가는 영국의 지성인 C. S. 루이스인데, 유명한 설교인 “영광의 무게”에서 그것을 잘 설명합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순간을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부른 뒤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 듯이 행세하는 것이라고 루이스는 지적합니다. 유명한 시인들의 방법은 자기 과거의 특정한 순간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다 속임수입니다. 설령 자기가 과거의 그 순간들로 돌아갔다 해도 그것 자체는 만나지 못하고 생각만 되살아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그냥 기억일 뿐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품고 살지만, 거기에 의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그 속에 있지 않고 그런 통로로 왔을 뿐이며, 그 통로로 온 것이 그리움입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추억은 우리에게 참된 갈망의 대상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면 그것이 우상으로 변하고, 그러면 그 우상 숭배자를 슬픔에 잠기게 만듭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 그리움이 항상 있습니다. 봄을 타거나 가을을 탄다는 말이 있고,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고국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움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에 살고 있어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향수 같은 것이 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 방랑자로서 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항상 떠돌이로 살 뿐, 결코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의 건물은 삶의 중간에 묵어가는 여인숙일 뿐이지, 진짜 집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지만, 거기가 본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이 이토록 중요하면서도 우리에게 아득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장 일관된 주제 중 하나를 살펴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갈망과 그리움은 우리 영혼 속에 남아 있는 더 큰 이야기의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모두 자신을 방랑자처럼 느끼고, 여기가 정말 본향이 아닌 것처럼 느낍니까? 그 이유는 창세기의 첫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곳은 사랑을 떠나 이별할 일도 없고, 괴로움이나 질병도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삶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흠모하며 섬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알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닮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가 본래 우리의 집이었고, 우리는 그 나라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그 집의 ‘아버지’이신데 우리가 그분의 권위에 반감을 품었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간섭 없이 살고 싶어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그분과 멀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잃은 것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도 집을 잃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방랑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뒤로 우리는 영적 방랑자가 되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제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에 들어맞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는 질병과 노화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사랑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세월과 함께 끊어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결국 죽어서 우리를 떠나거나 우리가 죽어서 그들을 떠납니다. 일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도 끝없는 좌절에 부딪칩니다.
우리의 희망과 바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집을 다시 만들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집은 우리가 피해서 도망쳐 나온 하늘 아버지의 임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주제가 성경에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본래의 집에서 쫓겨나 유랑한 뒤에,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땅을 정처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훗날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가 여러 해 동안 방랑합니다. 그 후에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는 기근 때문에 고국을 떠나 이집트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다가 모세의 인도 하에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수배자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합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포로가 되어 다시 방랑길에 올라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마다 방랑이 뒤풀이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인류 전체가 귀향을 시도하는 방랑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죄로 망가진 세상, 쉽지 않은 귀향길
유명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고용인의 죽음(The Death of the Hired Man)”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이란 우리가 그곳에 가야 할 때 우리를 받아 주어야만 하는 곳이다.” 참 잘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비유 속 둘째 아들이 알고 있듯이, 성공적인 귀향이 반드시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죄가 장벽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벽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이 거부당하여 계속 유랑자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 인류의 귀향길에 얼마나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는지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과 귀향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결국 유다 백성은 바벨론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 고국에 돌아간 유대인들은 소수에 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이후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로도 그리스, 시리아, 로마 순서로 세상의 강대국이 줄곧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지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압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작은 해방과 작은 귀향이 나오지만, 그것들은 선지자들이 약속했고 사람들이 갈망하던 궁극적이고 완전한 귀향을 끝내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의 내면이 망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여전히 이기심과 교만과 죄에 빠져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과의 끊임없는 충돌과 전쟁 못지않게, 우리 마음속의 온갖 싸움도 우리를 압제합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주변이 망가져 있다는 것입니다. 방랑의 상태에는 인간의 도덕적 악 이상의 것이 존재합니다. 성경을 보면, 지금 우리는 타락한 자연계에 살고 있습니다. 본래는 이렇게 질병과 자연재해가 넘치고 모든 것이 죽는 세상에 살도록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본향집이 아닙니다. 최종적이고 진정한 귀향이 이루어지려면,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물질세계 자체에도 근본적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역하실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방랑하는 중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의와 압제와 고통이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완전한 귀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바라던 귀향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해방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 곧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왕은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권력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와서 인정과 영접을 받은 뒤에 승리로 이끌어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모여들어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었지만, 그분은 그들의 기대하던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태어나신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의 밀짚 깔린 구유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분이 형편없는 나사렛에서 난 줄 알았습니다.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심지어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려던 사람 중에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정치와 경제와 권력의 바깥쪽에 머무셨고,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격증을 얻으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생애 마지막에 그분은 도성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방랑자의 생생한 상징이었습니다. 죽임 직전에 그분은 처절하게 외치셨습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이것은 영적으로 버림받고 본향을 잃어버린 실향에 대한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그 민족을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압제자 로마를 포함해서) 죄와 악과 죽음 자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류를 본래의 집,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강함으로 오지 않으시고 약함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겪으신 유랑은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쫓겨나서 우리 대신 극한의 절망과 어둠 속에 내던져지는 영적 소외를 겪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가 외쳐야 하는 말인데 예수님이 외치셨습니다. 인류의 반항에 대한 모든 저주와 영적 실향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셨습니다. 우리를 진정한 집으로 맞아들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3.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대잔치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사흘 만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멸하신 것입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 2:14-15, 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심으로써 죽음과 타락과 무질서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오셔서 그 승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회복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4) 하고 말합니다. 어떻게 구하실 것인지 그 구체적인 모습이 그 뒤에 죽 나와 있습니다.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5-10절)
두 탕자의 이야기는 귀향의 잔치로 끝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종말을 기록한 요한계시록도 잔치로 끝이 납니다. 바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계 19:7-9, 새)
어린 양은 우리를 용서하여 집으로 데려가려고 세상 죄 때문에 희생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잔치가 벌어질 곳은 새 예루살렘, 즉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이 도성에는 하나님이 친히 거하실 뿐 아니라 놀랍게도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이 이제 “만국을 치료”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물론 이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종말에는 온 땅이 다시 하나님의 동산이 되며, 죽음과 부패와 고난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더 이상 없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3-4)
하나님의 장막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잘 섬기다가 흘렸던 그 모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다른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인간의 평범한 삶에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어떤 신비주의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흰 가운을 입고 날개를 단 채 허공을 둥둥 떠다니거나 하프나 켜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을 경배하는 가운데 서로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웃고 춤추고 사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과 기쁨의 정도를 지금 우리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시 우리의 완벽한 집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을 이사야에서, 성경 곳곳에서, 또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늘 방랑자로서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정착하지 못하던 상태가 사라질 것입니다.
놀랍게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행복할 것 같은데,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들 중에 굉장한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엄청나게 성공한 사람들 중에 안타깝게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성공과 부귀영화가 그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갖다 부어도 그 방랑의 상태가 해결되지 못합니다.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어도 계속 끝없는 그리움, 고향을 향한 갈망이 계속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향 집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맞이하여 끌어안으시며 우리를 기쁨의 천국잔치에 맞아들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혹시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특히 내가 주님을 제대로 믿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제대로 하려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매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