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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4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3 ✦
“삶의 균형을 위한 기도”
(빌립보서 1장 3~11절)
[들어가는 말]
유명한 옛날 영화들 중에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수에즈 운하를 두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아랍의 참전을 끌어내서 오스만 제국과 대결하게 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 중위를 아랍에 파견합니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 당시 사막을 지배하던 아랍 독립군 지휘자 파이살 왕자를 만나, 그로 하여금 연합군에 협력하게 만들어서 터키군의 후방인 아카바 공략에 성공합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영국과 아랍 양쪽에서 모두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의 조국인 영국을 사랑했고, 또한 아랍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로렌스의 기대처럼 아랍과 연합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아랍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영국과 연합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영웅이었던 로렌스는 나중에야 자신이 국제 정세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좌절에 빠진 그가 조국인 영국에 돌아와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몰다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마는 비극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그의 사랑의 마음은 순수했지만, 그에게는 국제 정세를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다가 사랑을 남기고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와 회상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회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생각나는 것은 전부 독설을 쏟아낸 것, 미워한 것, 화를 낸 것만 있으면 불행한 인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살면 주변 사람들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 있어도 삶에서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이 없다면, 로렌스의 비극은 우리의 비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여러분, 이 세상은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로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순결하기만 하면 안 되고,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이던 주후 52년경에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빌립보 교회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약 10년 후인 61-62년경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 교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였고 바울의 사역을 끝까지 도운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관계의 갈등이 일어나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이 그들을 권면하기 위해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교회가 건강해지고 성도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건강하게 사는 데 필요한 삶의 균형 두 가지는 사랑과 분별입니다. 분별을 잃은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분별은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선한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삶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기도합니다.
1.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한 사랑으로 자라가라
우선 사도 바울은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가치인 ‘사랑’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9절)
여기에서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가 바로 ‘아가페’(agape)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풍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 마귀의 이상한 모습이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뭔가 영적으로 잘못된 상태입니다. 사랑하기는 하는데,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거나 편한 사람만 사랑하고 나에게 불편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 5:43-47, 새)
‘세리’는 그 당시 대표적인 죄인이고, ‘이방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지독한 죄인이나 안 믿는 사람도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사랑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 번 하면 결정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성장해 나갑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나 소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중요하지만 사랑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신령한 은사를 받도록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들이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며 유익을 끼칠 수 있지만, 그것들도 역시 사랑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위 ‘사랑 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끝냅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고전 13:1-3, 13, 새)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단순히 사랑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는 사랑’이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는 사랑이어야만 맹목적인 사랑(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막무가내로 사랑하는 것)이나, 감상적인 사랑(감정에만 집중하는 사랑)이나 이기적인 사랑(자기편만 사랑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9절에서 ‘지식’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어진 경험적이고 영적인 지식을 말하고, ‘총명’은 ‘통찰력’(insight)을 말합니다. 그런 지식과 총명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참된 영적 지식과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사랑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사랑은 건강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 지식과 통찰력이 없이 사랑하면, 편 가르기가 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스토킹(stalking)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온통 그런 잘못된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자기는 분명히 사람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그런 사랑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일어나고 자기가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사랑, 건강한 사랑이 아니라 거짓된 사랑, 병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한 소녀가 평소에 자기가 흠모하는 오빠가 있는데 항상 그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오빠를 기쁘게 해줄까만을 생각하며 선물 세례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빠를 사랑한 나머지, 오빠가 모르게 그 집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오빠가 잘 때 나와 옆에서 그의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너무 흐뭇해하고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을 ‘스토커’라 하는데, 그런 스토커의 집착을 건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부모가 5살짜리 아들을 너무 사랑해서 아들이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코카인 마약을 너무 해보고 싶다고 애원하니까, 부모는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코카인을 사다가 아들이 들이마시기 편하게 최고급 빨대로 잘 준비해서 아주 정성껏 먹입니다. 그런 맹목적이 돌봄을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니며, 각자 배우자가 따로 있습니다. 아무리 둘이서 열렬히 사랑하고 그 사랑이 진심이더라도, 그렇게 가정을 깨는 사랑을 건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교회 리더가 주님의 말씀을 너무 사랑하여 교회 내에서 정의를 외치고 불의와 맞서 싸웁니다. 그런데 그 뜨거운 말씀과 정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교인들이 편이 갈라지고 대립하며 싸우다 결국 교회가 갈라집니다. 그렇게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랑을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지식과 총명이 함께 하는 아가페 사랑으로 풍성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이처럼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해지는 사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 선한 것을 분별하라
바울은 빌립보 형제자매들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자라가도록 기도하는 동시에, 또한 그들이 분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0절)
여기서 ‘분별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위조 화폐를 구별할 때, 또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자기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사랑이 참된 사랑, 건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분별의 삶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분별하라는 것입니까?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이 ‘지극히 선한 것’이란 말은, 1세기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들에 의해 많이 쓰이던 표현으로서 ‘최고의 선’을 말하는데, 그들은 ‘최고의 선’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분별해야 할 최고의 선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분별해야 할 ‘최고의 선’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알려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된 인생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도 그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마음에 새로운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은 그저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소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야말로 최고의 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또한 10절에는 ‘진실하다’와 ‘허물이 없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분별하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가 진실하고 허물없는 인격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이러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분별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격은 진실하고 허물없는 인격이 되고,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하다’라는 말은 ‘내적인 단순성’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진실하지 않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사람을 보십시오. 참 복잡하게 삽니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해야 하고 거기에 또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서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아주 복잡합니다. 그리고 늘 골치가 아픕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은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같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하며 기쁨이 넘칩니다.
또한 ‘허물이 없다’는 것은 외적 행동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외적으로도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즉시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은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의 ‘최고선’으로 수용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목표로 인생을 살고자 하면, 진실하고 허물없는 인격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분별을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은 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서라 하시면 서고, 가라 하시면 가면 됩니다.
오래 전에 나온 복음성가 중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곡이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x3)
No turning back, No turning back
요즘은 “돌아서지 않으리”라는 곡으로 편곡되어 젊은이들 사이에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어떠한 시련이 와도 수많은 유혹 속에도
신실하신 주님 약속 나 붙들리라
세상이 이해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여도
신실하신 주님 약속만 붙들리라
결코 돌아서지 않으리
3. 의의 열매를 맺으라
삶의 진정한 균형은 사랑하고 분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통해 우리가 결국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1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죽으면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의의 열매를 맺으며,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으로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한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받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선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8-10, 새)
우리 중에서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은 이후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하면 ‘구원받았는데 어떠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구원을 의심해볼 만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일’이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의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살면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면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합니다. 의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날마다 그분께 우리의 삶을 드릴 때,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 의의 열매가 가득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나가는 말]
처음에 언급했던 아라비아의 로렌스 중위가 남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로렌스는 아랍의 족장 대표들과 함께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을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등 여러 명소에 데리고 갔는데, 그 아랍 족장들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가장 흥분하며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바로 호텔 방에 있는 수도꼭지였습니다. 사막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돌리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도꼭지가 너무나 신비로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랍 족장들이 호텔을 떠날 때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수도꼭지를 떼어가기 위해서 그들 모두가 자기 방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로렌스 중위가 그들을 뜯어말리면서 수도꼭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물이 나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내 힘만으로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그것은 마치 수도꼭지만 뜯어가면 물이 콸콸 나올 줄로 알고 뜯어갔지만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분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믿음이 나와 그분을 연결시켜줍니다. 그렇게 주님과 연결된 후에 믿음이 역사하게 하는 힘, 바로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사랑의 생수, 분별의 생수, 의의 생수가 넘치게 됩니다.
만약 지금 나 자신에게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기도의 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되거나 뭐가 어떻게 되어서가 아니라, 나의 기도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주님의 은혜를 기도로 구할 때입니다. 그러면 은혜와 사랑과 지식과 총명과 선함과 진실과 의의 생수가 넘쳐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 놀라운 사랑과 분별과 의의 은혜를 누리는 복이 우리 모두의 인생 가운데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결단의 기도
1)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2) 사랑과 함께 선한 것을 분별하는 균형을 갖도록
3) 우리 삶에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