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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5일 수요예배
✦ 탕부 하나님 3 ✦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누가복음 15장 28~30절)
1. 행복을 찾는 막다른 두 길
오늘 제목인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라는 말만 읽어보아도 마음이 뜨끔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충성을 많이 했어도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버리면 죄라는 것을 오늘 말해줍니다.
비유에 나오는 형제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 시도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아 발견의 길입니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성을 발휘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 자유로운 영혼의 삶입니다. 둘 다 인생관에 색깔을 입히는 렌즈이자 세계관을 형성하는 틀입니다. 둘 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길이고, 세상의 악을 해결하는 길이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길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형(맏아들)은 도덕적 순응의 길을 대변합니다. 윤리 도덕적인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지만, 그 신분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복과 최종 구원을 받으려면 말씀(특히 구약 율법)에 엄격히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틀이 물론 아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의 규범을 개인의 만족보다 앞세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행복을 얻고 세상을 바로잡는 길은 올바른 도덕성을 갖추는 것뿐입니다. 물론 간혹 못 지킬 때도 있지만, 그럴 때 우리가 심판받는 기준은 얼마나 비통하고 간절하게 뉘우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대로라면 우리는 실패한 와중에도 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반면, 비유 속의 동생은 자아 발견의 길을 대변합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도 그런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런 예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많습니다. 이 틀의 주장대로라면 각 개인은 관습과 규범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목표와 자아실현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관점에 의하면, 전통과 편견과 위계적 권위 등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벽이 약화되거나 제거될 때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됩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한쪽에서는 뭔가를 지켜야 한다고 외치고, 다른 쪽에서는 ‘아니다, 자기 선택대로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슈는 많지만, 항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삶의 길과 그 둘의 충돌이 오래 된 미국 영화 <위트니스(Witness)>(1985)에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아미쉬(Amish) 교도인 젊은 과부 레이첼은 아미쉬 교도와 거리가 먼 경찰관 잔 북(John Book)과 사랑에 빠집니다. 시아버지 일라이는 레이첼에게 그것은 금지된 일이며 장로들이 벌을 내릴 거라고 경고하면서 그녀의 행동이 철없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레이첼이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예요.”라고 반박하자 그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쏘아붙입니다. “아니! 그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다. 또 내가 판단할 문제이기도 하지.... 네가 나에게 망신을 준다면 말이다.” 레이첼은 두려워 떨면서도 당당하게 “당신이 망신을 자초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한 뒤 그를 떠나가 버립니다.
이 영화 내용에 두 가지 길이 정확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우리 전통과 공동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반면, 자아 발견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내게 옳고 그른지를 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그런 삶으로부터 참 자아와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서구 사회는 뿌리 깊게 이 두 접근으로 양분되어 있어 누구도 그 외의 삶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내가 그중 한 쪽을 비판하거나 거리를 두면, 두 그룹의 사람들 모두 내가 다른 쪽을 택했다고 단정합니다. 양쪽의 접근 모두 온 세상을 두 가지 기본 집단으로 갈라놓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순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멋대로 구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다. 해답은 도덕적인 사람들에게 있다.” 하지만 자아 발견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는 완고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다. 해답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쪽 모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길이 곧 세상을 바로잡는 길이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둘 중 하나에 반드시 속한다고 결론지어야 합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질상 도덕적 순응의 삶이나 자아 발견의 삶 중 한 쪽으로 끌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인생의 시기에 따라 이쪽을 시도하다가 저쪽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도덕적 순응의 틀을 따라 살아보다가 거기에 짓눌려 자아 발견의 삶으로 홱 돌아선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 반대로 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 성격 안에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전통적인 형이지만 몰래 동생처럼 처신하는 비밀 생활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생각과 생활방식이 아주 자유분방하고 종교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오히려 자기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최악의 바리새인처럼 독선적으로 상대방을 깔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들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그것은 두 가지 주된 삶의 방식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메시지는, 양쪽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안을 비유 속에서 암시해주십니다.
2. 다른 방법, 같은 마음
1막에서 예수님이 둘째 아들을 통해 묘사하신 죄는 누구나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그는 집안을 욕되게 하며 허랑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완전히 통제력을 잃고, 비유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와 멀어집니다.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방탕하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것이고, 비유를 듣던 사람들도 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2막의 초점은 맏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다 순종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는 대단한 인내로 자신을 완전히 통제합니다. 이 두 아들을 보통 기준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하지만’, 사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두 아들 다 사랑의 잔치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비유 속의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하나는 멀리 떠나 있고 하나는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둘 다 멀리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이 ‘두 아들의 비유’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막의 결론은 우리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예수님은 일부러 맏아들을 멀어진 상태로 놓아두십니다. 못된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는데, 착한 아들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8절)
창녀들과 놀아나며 재산을 모두 탕진한 사람은 구원받는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여전히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배웠던 모든 내용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거기서 끝내지 않으시고, 충격은 더욱 깊어집니다. 형은 왜 들어가지 않습니까? 자신이 직접 이유를 밝힙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절)
이것을 잘 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맏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착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가 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맏아들과 아버지를 갈라놓은 원인은 어떤 악한 죄악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자신의 도덕적 삶에 대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를 아버지의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그의 악이 아니라 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두 형제의 마음과 그것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 삶의 길이 언뜻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삶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재산의 지분에 대해 아버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게 싫었습니다. 스스로 결정하여 자기 몫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쓰고 싶었습니다. 얼마를 쓸지, 어디에 쓸지, 뭘 하는 데 쓸지,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뜻을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대담하게 공격적인 작전을 펼쳤습니다. 지역사회의 규범에 보란 듯이 저항하여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도 자기 몫을 달라고 하여 받아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반면, 맏아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가 원한 것도 동생과 똑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도 동생 못지않게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맏아들도 아버지보다 아버지의 재물을 원했습니다. 다만 동생은 멀리 떠난 반면, 형은 옆에 남아 ‘명을 어김이 없었을’ 뿐이었던 겁니다.
자기 뜻을 통과시키는 방식만 동생과 달랐을 뿐이지, 사실 그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그는 무언으로 이렇게 요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아버지께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 인생의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놀랍게도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 하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려 했습니다. 둘 다 아버지를 조종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두 아들 모두 반항한 것입니다. 단, 방법이 달랐습니다.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아주 착하게 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신 겁니까?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고 했을 뿐이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해서 즐거워하고 아버지를 위해 섬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반항해서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그분께 반항하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니,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일입니까?
3.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이 죄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죄’의 개념을 훨씬 깊이 가르쳐주십니다. 그분이 알려주지 않으시면 우리 중 누구도 이것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의하시는 죄는 그 이하는 아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갑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구주이신 예수님을 피하려면 모든 도덕법을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권리’가 생겨납니다. 무슨 권리입니까? 도덕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도 응답, 행복한 삶, 죽음 이후의 천국 입장권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값없는 은혜로 자신을 용서해줄 구주는 필요 없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자기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의 태도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집안의 옷과 반지와 짐승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사실상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며, 자기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워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엄격한 윤리와 경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에게 축복과 형통을 베풀어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돕는 자나 감명을 주는 모범은 될지언정 자신의 ‘구주’는 되시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구주의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두 형제가 행동에 있어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마음의 동기와 목표는 같습니다.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마음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목표물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고 믿습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맏아들에게 아버지를 참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잔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잔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노하여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28), 그에게는 아버지의 행복이 자신의 목표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자, 자기 유산의 지분이 줄어든 맏아들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는 갖은 수를 써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상처를 입힙니다.
만약 우리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우리의 모든 윤리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정말 원하는 것들을 그런 식으로 그분께 받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영화로도 나온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희곡 <아마데우스(Amadeus)>에서 젊은 살리에리(Salieri)가 하나님께 벌이는 흥정이 그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소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오만한 기도를 몰래 올리곤 했다. ‘주여, 저를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하소서! 음악으로 주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고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사랑하는 하나님이여,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해져 불멸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가 죽은 후에도 제 작품이 사랑받고 제 이름이 영원히 회자되게 하소서! 그 대가로 저는 주께 제 순결과 근면함과 가장 깊은 겸손과 삶 전체를 드리겠나이다. 또한 사람들을 최대한 돕겠나이다. 아멘, 또 아멘!’”
처음에 살리에리는 이 맹세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고, 열심히 음악을 공부하고, 많은 음악인들을 무료로 가르치고, 빈민들을 계속해서 돕습니다. 자신의 길이 음악 쪽으로 잘 풀리자 그는 하나님이 거래 조건을 잘 지키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때 음악적인 재능이 살리에리보다 훨씬 뛰어난 모차르트가 등장합니다. 그의 천재성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게 분명합니다. 모차르트의 Middle Name인 “아마데우스”는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속된 방종을 일삼는 ‘둘째 아들’ 부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모차르트에게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부어주신 재능은 살리에리의 마음속에 신앙의 위기를 일으킵니다. 살리에리의 말은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의 말과 섬뜩하리만큼 비슷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재능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려고 본능적인 욕망마저 다 물리치고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탕한 짓을 일삼는데도 아무런 징계가 없었다.” 결국 살리에리는 하나님께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서로 적입니다”라고 선언하고는, 그때부터 어떻게든 모차르트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안타깝게도 희곡에서는 하나님이 침묵만 지키고 계셔서 결국 원한과 증오와 절망이 살리에리를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맏아들이 그런 감정에 빠지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그를 건지려고 손을 내밉니다.
살리에리는 순결과 자선에 부지런히 힘썼으나 사실 그것은 지독한 욕심의 산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빈민은 실제로 자기를 위해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고 스스로에게도 늘 말했지만, 사실상 희생은 없었습니다. 모두 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고, 명성과 큰 돈과 자존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그 자가 나타나고부터 나 자신이 싫어졌다.”라고 말합니다.
살리에리가 하나님과 빈민을 섬겼어도 그는 그토록 원하던 영광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에 살의를 품었습니다. 이제 곧 점잖고 도덕적이었던 살리에리가 아주 속되고 부도덕한 모차르트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종교와 담을 쌓은 사람은 아마데우스(‘하나님께 사랑받는’) 모차르트지만, 결국 하나님과 훨씬 더 멀어진 쪽은 독실했던 살리에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너무나 똑같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살리에리의 경우보다 더 은근한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년간 기독교 사역에 몸담았는데, 중년에 큰 병에 걸리자 절망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마음속 깊이 이런 생각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그만큼 해드렸으니 그분도 자신에게 더 나은 삶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잘못된 믿음 때문에 수렁에서 헤어나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결국은 그것을 극복했는데, 자기 내면에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 같은 사고방식이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 변화의 돌파구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맏아들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원하며 얻으려는 것, 즉 그분을 닮고 사랑하고 알고 즐거워하려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스스로 옳고 그름을 정한다고 하지만,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구주와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을 거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가리켜 일련의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잘못을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 역시 가장 방탕하고 부도덕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철저히 잃어버린바 된 상태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이시고 주인이시며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몰아내려던 두 아들처럼 말입니다.
살리에리도 이와 같다고 누군가 말해 주었다면 젊은 그는 절대 안 그렇다고 부인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순결을 지키고 자선을 베푸는 삶은 그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그렇게 그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분의 순전한 은혜에 의지한 게 아니라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워서 그분을 조종하려 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자신의 구주로 행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우기며 모차르트를 향해 원한과 살의를 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스스로 재판장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어기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지키며 극도로 착해지는 것입니다.
4. 둘 다 틀렸으나 둘 다 사랑받다
예수님은 세상을 도덕적인 ‘착한 사람들’과 부도덕한 ‘나쁜 사람들’로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보여주시듯,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력 구원(self-salvation)에 몰두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하여 스스로 권력과 통제력을 거머쥐려 애를 씁니다. 방법만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틀렸는데도 아버지는 둘 다 소중히 여기며 사랑의 잔치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전혀 다른 차원의 영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나 무종교, 도덕이나 부도덕, 도덕주의나 상대주의, 보수나 진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극단 사이의 중간 어디쯤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런 모든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틀렸으나 모든 사람이 사랑받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불러 그 사실을 깨닫게 해서 변화시킵니다.
반면에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우리처럼 착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나쁜 사람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저 나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둘째 아들 부류의 사람들도 똑같이 말합니다. ‘아니다,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이 실세이고 꽉 막힌 고집불통들은 잘못됐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바로 옹졸한 저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퇴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8:14). 자신이 별로 선하지 못하거나 마음이 넓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대로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두 아들 모두 틀렸고 모두 사랑받았으나 이야기는 서로 다르게 끝납니다. 왜 예수님은 줄거리를 그렇게 구성하셨겠습니까? 왜 한 명은 구원받고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지만, 다른 한 명은 그렇지 못합니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하려는 자력 구원 시도는 둘 다 틀렸지만 똑같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 비유의 아이러니가 하나 더 드러납니다. 둘째가 아버지를 피해 떠난 일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그는 마음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몸으로도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반면, 맏아들은 집에 남아 있었지만 사실은 동생에 비해 아버지와 더 멀어졌습니다. 눈이 멀어 자신의 진짜 상태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도 역시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에 반대하고 있다.’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는 분하여 길길이 날뛰었을 것입니다.
눈이 멀어서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맏아들 같은 바리새인들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혹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어떻게 나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하는가? 나는 교회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항상 교회에 있는 사람인데! 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인데! 항상 성경을 읽는 사람인데!’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찍이 이렇게 가르친 랍비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착하게 살지 말라거나 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신실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