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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12일 수요예배

탕부 하나님 5

용서를 위하여 누군가는 값을 치러야 한다

(누가복음 1529~32)

 

1.   의의 뿌리까지 다 회개하라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계속 살펴보며, 우리가 곧 그들임을 깨닫습니다. 동생이든 형이든 각자의 잃어버린바 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속의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이 기쁨과 사랑과 감사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입니다. 비유의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먼저 나가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아버지는 저 멀리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대문간에서 기다린 게 아닙니다. 조급하게 서성대며 저기 아들놈이 오는군. 큰 사고를 쳤으니 납작 엎드려 기어들어 와야지!’라는 식의 말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는 달려가서 그 나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20). 아들에게 자백할 겨를조차 주지 않습니다. 아들의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일으킨 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입니다. 아버지의 아낌없는 사랑 덕분에 아들이 참회를 표현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 것입니다. 부드럽고 너그러운 부모님 앞에 잘못을 아뢰는 것은 쉽지만, 부모님이 너무 엄격하고 무서우면 그렇게 하기가 힘든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분노와 원망을 품은 맏아들에게도 나가서 잔치에 들어오라고 다독입니다(28). 이 장면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한편으로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도 똑같이 잃어버려진 상태라서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바리새인에게도 진정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이 마지막 당부는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직접 듣던 청중을 떠올리면 특히 더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상대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결국 그분을 로마 당국에 넘겨 처형당하게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비유 속의 형이 받은 것은 매서운 정죄가 아니라 독선적인 분노로부터 돌이키라는 사랑의 당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적들조차 사랑으로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대하실 때 바리새인과 같지 않으셨고, 자칭 의인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바로 그러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완고하고 강퍅한 종교적인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식이 각기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아들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극적으로 우리를 와락 얼싸안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이 생생히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계속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맏아들의 경우처럼 그분은 차분하고 끈기 있게 우리를 설득하실 때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설득하고 계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자신의 길 잃은 상태가 점차 느껴지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갈망이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순간 그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이 비유에서 배워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개별적인 죄를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올 때 둘째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자기가 회개했음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 둘째아들과 같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려면 내 죄의 목록을 꺼내 항목별로 그분께 사죄해야 한다.’

 

물론 죄에 대해 하나하나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상태는 죄의 목록으로 접근해서는 충분히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잃어버려진 채로 아버지의 사랑의 잔치 바깥에 있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은 딱히 죄의 목록에 올릴 게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

 

그는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아버지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도덕규범에 관한 한 그에게 흠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려진 상태이지만 목록에 올릴 만한 죄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여기서 오해가 없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죄와 구원에 대한 위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세부 사항 하나하나까지 다 문자적으로 억지로 끌어다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어떤 인간도 죄나 실수나 흠이 없다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행동상의 결점에만 집중하면 그만큼 본질을 놓친다는 게 핵심입니다.

 

바리새인은 죄를 지을 때 비참한 심정으로 회개했습니다. 자신을 벌하거나 자기 연약함 때문에 비탄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나면 그들은 여전히 맏아들입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의 회개는 깊이가 없어 문제의 핵심에 닿지 못합니다.

 

그 핵심이란 무엇입니까? 맏아들을 아버지의 기쁨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입니다. 형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빚을 지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통제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듭니다.

 

맏아들의 영적 문제는 자기 가치의 근거를 자기가 뭔가를 이룬 성취와 행위에 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불안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옳다는 느낌을 계속 가지고 있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선행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선행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자기 기준의 선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여전히 그냥 맏아들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도 회개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합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죄의 이면과 모든 의의 이면에 깔려 있는 죄, 즉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려 한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동안 자신의 소망과 신뢰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었으며, 잘못된 행동과 올바른 행동 모두를 통해 하나님을 피하거나 통제해서 그것들을 얻고자 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죄악과 착한 행실 양쪽 모두의 뒤편에 자기 스스로 구주와 주인이 되려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한 행위에 대한 해결책은 단순히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하나님, 자기, 다른 사람들, 세상, 직업, 자신의 죄와 덕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 부르는데, 그만큼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지 문턱까지만 이를 수 있을 뿐, 핵심까지 닿은 게 아닙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이켜야 하는지만 알 수 있을 뿐, 무엇 또는 누구를 향해 돌이켜야 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주도적 사랑이고 복음에 합당한 더 깊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2.   진정한 맏아들이 오셨다!

 

1-2절에 나와 있듯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한다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가 아닌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4~7). 어떤 사람이 100마리의 양 떼를 치던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습니다. 목자는 손실을 감수한 게 아니라 나가서 찾아다닙니다.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자 그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 하고 말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입니다(8~10). 비유 속의 여자는 집에 있던 은화 열 개 중 하나를 잃어버립니다. 여자 역시 손해를 보았다고 포기하기는커녕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8). 마침내 동전을 찾게 되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9) 하고 말합니다.

 

세 번째 비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비유마다 양, 동전, 아들 등 뭔가를 잃었다가 도로 찾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마다 잃었던 것을 되찾은 데 대한 흥겹고 기쁜 잔치로 끝납니다.

 

그러나 세 번째 비유와 처음 두 비유들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두 경우에는 누군가가 나서서잃어버린 것을 부지런히 찾습니다. 찾는 이들은 그 무엇에도 한눈을 팔거나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에서 잃어버린 아들에 대하여 들을 때쯤이면, 당연히 우리는 이번에도 누군가가 찾아 나설 것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일부러 듣는 이들의 허를 찌르신 것입니다. 세 비유를 나란히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은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의문을 일으키십니다. ‘,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나섰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예수님은 성경을 모두 잘 아셨으므로, 성경 맨 앞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다른 형제의 이야기도 당연히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9-10)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가 죽인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모른다고 하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분노에 찬 교만한 형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 네가 네 동생을 지키는 자니라.”

 

진정한 형은 동생이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사는 것을 알았을 때 마땅히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아버지, 동생이 어리석어 삶을 망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서 동생을 찾아 집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예상대로 재산을 다 날렸다면 제 몫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을 다시 집안에 들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형의 태도입니다.

 

사실 동생은 형의 희생으로만 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동생이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이미 유산을 분할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전 재산에 대한 배당은 이미 끝났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몫인 3분의 1을 가져다 완전히 날렸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1)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한 말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남은 가산은 한 푼도 빠짐없이 다 형의 것입니다. 모든 옷과 반지와 살진 송아지의 소유권이 그에게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비유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동생의 회복에는 아무런 대가나 속죄가 보이지 않는다는 피상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동생이 배상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말렸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가 전혀 값없이 집안에 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와 사랑은 이처럼 항상 값없고 무조건적이야 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하게 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명예 회복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을 욕하고 그를 짓밟으면 됩니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는 상대를 비방하지 않으면서 누명을 풀어야 하는 더 어려운 길입니다. 용서란 가해자에게는 값없고 무조건적이지만, 용서하는 사람 쪽에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일입니다. 자비와 용서는 가해자 쪽의 공로 없이 거저 베풀어져야 합니다. 공로를 요구한다면 이미 자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를 베푸는 쪽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릅니다.

 

비유의 1막이 아버지의 값없는 용서를 보여준다면, 2막은 그 용서에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동생의 지위가 값없이 회복된 것은 형의 엄청난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아들을 그냥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형의 희생이 아니고는 아버지도 그를 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진정한 형은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구원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키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상황입니다. 이 동생의 형은 오히려 바리새인과도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경우는 다릅니다. 한참 부족한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님은 진정한 형을 상상하고 바라도록 우리를 유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형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찾으러 옆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까지 오셨습니다. 높은 액수의 재물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 우리를 하나님의 집안에 들어가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빚이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과 같든 동생과 같든, 우리는 다 아버지께 반항했습니다. 그런 우리는 사실 배척과 거부를 당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용서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값을 치러야 합니다. 형이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동생이 다시 한식구가 될 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옷이 벗겨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벌거벗겨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격 없는 존엄성과 신분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버림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은혜로 값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영원한 형벌의 잔을 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의 잔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진정한 형의 희생이 없이는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받아 주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과 분노가 어떻게 사랑과 기쁨과 감사로 바뀔 수 있습니까? 여기 그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치러진 대가를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의 핵심적 차이는 마음 깊은 곳의 동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대로 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욕구 때문이고, 그 욕구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은 그분을 정말 신뢰하거나 정말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깐깐한 상전일 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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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9년에 나와 호평을 받은 영화 <쓰리 시즌(Three Seasons)>이 있는데, 이 영화는 월남전 이후 베트남의 삶에 대한 작품으로 세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 중 한 이야기에 시클루(자전거 인력거)를 끄는 하이와 아리따운 매춘부 렌이 등장한다. 두 사람 다 못다 이룬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하이는 렌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호텔로 데려갈 돈조차 없습니다. 지독히도 가난한 렌은 자기 눈으로 봤을 때 낙원과 같이 안락한 고급 호텔에서 살기를 꿈꾸지만 거기는 그녀가 몸을 파는 곳일 뿐, 정작 손님으로 투숙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매춘으로 돈을 벌어 돌파구를 만들고 싶어도, 그 일은 오히려 그녀를 짐승과 노예처럼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하이는 얼마 후 인력거 경주에 나가 우승합니다. 상금으로 렌을 호텔에 데려가 숙박비와 화대를 치른 그는, 뜻밖에도 그녀가 잠드는 모습만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돈의 힘으로 그녀의 육체를 산 게 아니라, 그녀에게 평범한 하루를 보낼 자리를 사주고, 그로써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던 그녀의 갈망을 채워준 것입니다.

 

처음에 렌은 하이가 이것으로 자기 발목을 잡으려는 줄 알고 그의 이런 호의에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가 돈으로 그녀를 농락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섬기려는 게 분명해지자 그녀도 차츰 달라지고, 이제 매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많은 것이 우리를 해방시킬 것처럼 보였으나 우리는 바로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힘을 소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우리를 보시고 자신의 영광을 비워 종이 되셨습니다(2).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2:5-8, )

 

그분은 광대무변한 자신의 본체를 버리시고 친히 목숨을 바쳐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아버지의 집을 우리에게 사주셨습니다.

 

하이의 사심 없는 사랑이 렌을 변화시켰듯이, 우리도 그분이 그렇게 하셨음을 마음 깊이 알게 되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분께 어찌 스스로를 바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속의 불신 때문에 우리는 동생이나 형이 되는 것인데,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속의 불신을 허물어뜨려줍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한쪽은 동생처럼 하나님을 떠나 우리 마음의 욕심을 따르는 길이고, 또 한쪽은 형처럼 욕심을 억압하고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큰 희생과 대가를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아름다운 일을 보면 그것이 우리 마음을 그분께로 이끌어줍니다. 지금까지 온갖 엉뚱한 데서 찾으려 했던 사랑과 위대함과 위로와 영광이 바로 그분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두려움도 없애줍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그런 일을 대신 당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다른 길에는 이런 자유와 기쁨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토록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경고하시고 미워하셨던 이유입니다. 우상숭배의 길은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만큼 우리는 동생이나 형을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결핍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내 마음의 욕심을 따르는 길도 아니고, 억지로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길도 아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엄청난 희생의 사랑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바라보며 날마다 사랑과 감사함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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