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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7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5 ✦
“육체의 가시를 위한 기도”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들어가는 말]
20세기 초반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이자 영문학자이기도 했던 씨에스 루이스(C. S. Lewis)가 쓴 책 중에 <고통의 문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2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통의 문제를 둘러싼 하나님의 정의를 논하는 신학적 담론을 가리켜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heodicy라고 부르는데, ‘theos’(신)+‘dikee’(정의)의 합성어로 ‘세상에 고통이나 악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우신가?’라는 질문을 다루는 논의를 의미합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악을 그대로 두신다면 그는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만일 그가 악을 다스릴 능력이 없으신 분이라면 전능한 신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존귀하고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을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을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
여기 사용된 ‘가시’의 헬라어 원어는 ‘스콜롭스’(skolops)라는 단어인데, 작은 가시가 아니라 뾰족한 막대기를 의미하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찔러대는 무서운 고통을 뜻합니다. 신약학자들은 이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해오는데, 대체로 바울을 괴롭히던 어떤 육체적 질병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어떤 질병이었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1차 전도여행 때 구브로에서 육지로 올라온 다음에 바울이 말라리아 열병이 걸렸다는 의견도 있고, 간질병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가장 많은 의견은 안질설인데, 아마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강력하고도 초자연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눈으로 봄으로 평생 안질을 앓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이런 견해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갈 4:14-15, 새)
조금 뒤의 6장에서는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갈 6:11, 새)라고 하는데, 큰 글자로 직접 썼다는 것은 바울이 자기 시력에 대한 어려움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 또는 ‘사탄의 사자’가 어떤 질병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던 유대주의자들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바울에게는 이런 시험거리와 극심한 고통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없어서 그 신실한 사도 바울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 겁니까, 아니면 바울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신 겁니까?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몰려오고 특히 육신에 질병이 생길 때, 하나님이 내버리신 상태가 되는 겁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구하라
우선적으로 할 일은, 바울처럼 그 가시가 떠나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여기서 ‘세 번’이라는 것은 바울이 전심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한 횟수를 의미합니다. 그냥 바울이 ‘병 낫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하고 가볍게 세 번 기도한 게 아닙니다. 40일 금식기도와 같이 비장한 기도를 세 번 한 것입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40일 또는 어떤 작정한 기간을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물을 마셔도 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시며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광야에서는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세 번 시험을 받으셨고, 겟세마네에서는 “이 잔을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세 번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세 번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실 바울은 회심 직후부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눈이 실명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행 9:8-9)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된 종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시고 그를 위해 안수하게 하십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행 9:17-19)
사실 눈이 안 보이니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주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분의 능력으로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을 확실하게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치유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은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기적의 도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런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만날 때의 장면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로 ‘그대의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행 14:9-10, 새)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하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던 중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 19:11-12)
또 얼마 전 주일 설교 때 살펴본 대로, 드로아 교회의 ‘유두고’라는 청년이 다락방 창문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떨어져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행 20:9-10). 그 후 28장에서는 멜리데(몰타) 섬에서 뱀에게 물렸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3-5절). 또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라는 사람의 부친을 비롯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도 일으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행 28:8-9)
이처럼 바울은 여러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도구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모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도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약 5:14-16, 새)
여기서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의 영적 리더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은 병자를 위해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병이 영적인 문제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오히려 병에 걸렸는데도 스스로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요청도 해야 하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질병이 발생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도 먼저 기도하는 동시에 지체하지 말고 주변 리더들과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또 중보기도실에 치유를 위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 요청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2. 가시를 허용하신 이유를 발견하라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기도가 치유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치유받을 수 있는데, 아주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또 두 명이 같은 암에 걸려서 함께 열심히 기도했는데, 한 명은 낫고 한 명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럴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생명을 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의 병이 탁 나았습니까? 사실 우리 중 누구보다도 더욱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건 세 번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했던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제가 이토록 간절히 세 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시는 데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하고 여쭤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용하신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9-10절)
9절에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은 ‘내 능력이 네가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찌르는 육체의 가시의 고통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찔러서 고통스럽게 해놓고는 막 좋아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실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다른 말로 “사탄의 사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병이 있거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그러시는 게 아니라, 사탄이 주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자기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나 큰 사람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수건만 놓아두어도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12장 1~6절을 읽어보면, 심지어 셋째 하늘(천국)에 끌려 올라가는 놀라운 체험도 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만일 건강한 몸까지 주어졌더라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 된 듯 착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허용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이렇게 약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나온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에게서는 약하고 마는 것이 정상인데, 이 약한 사람에게서 엄청난 강함이 나오는 게 주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많은 은사와 재능과 건강을 가짐으로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자기를 우상화하며 사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는 것, 그래서 육체의 가시를 지닌 채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그에게 좋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번에 김연수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세상에서 너무 잘 풀리고 돈 잘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축복이라고 하며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저주라는 것입니다.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망하고 잘못되고 떨어지고 길이 막혔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게 되었다면,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러한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어 내 교만을 꺾으시고, 내 목을 길들여 주님의 멍에를 메도록 하셨나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사를 마귀 되게 한 것이 교만이고, 사람을 천사 되게 하는 것이 겸손이다.”
고대사회의 왕들은 모두 자기가 신이 되려고 신격화했고, 지금도 독재자들은 자기를 신격화합니다.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신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를 허용하신 이유는, 그를 겸손한 당신의 종이요 신실한 사도로 만들고자 하신 그분의 섭리였습니다. 그래도 조금 괜찮게 해주시지 왜 그러셨을까 하고 느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기도했는데 그래도 떠나지 않는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했는데 아직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셔서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 있습니까?
가끔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을 봅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그러면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 안 나오다가 아예 신앙을 떠나버립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이고 또 아주 교만한 태도입니다.
혹시 ‘기도해도 안 되던데요?’라고 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그분에게 도로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셨는데요?’ 바울처럼 목숨 걸고 세 번을 기도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바울처럼 세 번 목숨 걸고 기도해보지는 않았지만, 조금 기도하고서 ‘하나님이 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나?’ 하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정말 생명을 건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랬는데도 그 육체의 가시가 떠나지 않고 계속 있다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왜 그런지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허용하시는 뜻을 알게 해주십니다.
3. 가시를 압도하는 은혜의 능력을 간구하라
그렇다면 아무리 기도해도 떠나지 않는 육체의 가시에 대한 주님의 뜻을 헤아리게 된 후에는 무엇을 놓고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나를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를 압도하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그래서 그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은혜의 능력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시를 압도하는 은혜의 능력이 임하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안고서 이런 위대한 사역을 한 사람입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주님의 일을 아주 훌륭하게 감당했던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당했습니다. 은혜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9절, 새)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자신이 약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강한 능력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10절에서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나를 찌르는 가시의 고통이 아플수록, 더 엎드려 주님의 은혜를 더 간절히 구해보시기 바랍니다. 가시를 압도하는 은혜의 능력이 내 삶에 부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을 섬기는데도 일이 잘 안 풀리고 길이 막히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저주하셨다’라고 하거나, ‘저 사람은 뭔가 죄를 지었나 보다. 뭔가 문제가 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보여줍니다. 어떻게? 은혜의 능력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계속 기도하며 나갈 때, 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더라도 은혜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그 능력이 육체의 가시를 압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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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클라호마 주 시골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목사였던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습니다. 그 소년은 어릴 때부터 늘 교회에 다녔지만, 아버지에게 칭찬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가 되면서 그는 동성인 남자 아이들과 사랑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성애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후에 오클라호마 크리스천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대학에서도 비밀리에 동성 친구와의 은밀한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멜린다라는 여학생을 만나게 되면서 이성과의 사랑을 시도해보게 되었는데, 결국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그녀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멜린다가 인간적으로는 너무 좋았지만,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그는 너무나 큰 고통을 느끼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살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신학교에 갈까 고민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신실한 크리스천 친구 하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이 꿈에서 너에게 음악을 주실 거라고 말씀하셨어. 그 노래는 온 세상에서 불릴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넌 음악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같은 시기에 그의 어머니도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음악을 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당분간 집에 들어와 함께 살며 노래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는지 제안했고, 그는 신학교에 가는 것을 일단 접고, 집에 들어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피아노 앞에 앉아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노래를 써내려가면서 시편과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생애를 읽었고,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마침 그 지역에서 ‘사도행전 2장 콘서트’라는 것이 열려서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콘서트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도 없고, 치유하지 못하실 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죄를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죄는 용서하셔도 자기 죄는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깨달아지면서 그것을 정말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는 손을 들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새롭게 하고자 부활하신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립니다.’ 하고 고백했고, 그때 동성애로의 끌림이라는 육체의 가시보다 훨씬 더 큰 은혜가 자기 삶에 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를 통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한국어 번역이 좀 확실하지 않아서, 원래 영어 가사를 다시 번역해보았습니다.
1. 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 내가 약할 때 주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You are the treasure that I seek 주님은 내가 찾는 보물이십니다.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십니다.
Seeking You as a precious jewel 귀중한 보석이신 주님을 찾으면서
Lord to give up I'd be a fool 그것을 포기한다면 나는 바보일 것입니다.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의 이름은 존귀합니다.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의 이름은 존귀합니다.
2. Taking my sin my cross my shame 나의 죄, 나의 십자가, 나의 수치를 가지고서
Rising again I bless Your name 다시 일어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When I fall down You pick me up 내가 넘어질 때 주님은 나를 일으켜주십니다.
When I am dry You fill my cup 내가 목마를 때 주님은 내 잔을 채워주십니다.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의 이름은 존귀합니다.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의 이름은 존귀합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은 데니스 저니건(Dennis Jernigan)입니다. 1959년생인 그는, 변화된 이후 대학 시절 헤어졌던 멜린다와 다시 만나 결혼했고,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두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변화된 그는 새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삶에 강력하게 임하여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으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결단의 기도
1) 우리의 육체의 가시(고통, 어떤 문제)가 떠나도록 기도
2) 그 가시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허락하신 이유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
3) 그 가시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