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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5일 수요예배
✦ 탕부 하나님 4 ✦
“둘째 아들 못지않은 탕자인 맏아들”
(누가복음 15장 28~30절)
1.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서 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들려주신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3-7)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고, 두 번째 비유(8-10)에서 여인은 잃었던 동전 한 드라크마를 되찾습니다. 그리고 소위 ‘탕자의 비유’(11-32)가 세 번째 비유인데, 그 ‘탕자’, 즉 잃어버린 존재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이 방식만 다를 뿐이지 둘 다 잃어버린 존재인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그런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구조 작전, 즉 구원하고 구출하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삭개오의 경우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영적으로 ‘탕자’ 또는 ‘잃어버린 자’의 상태란 무슨 뜻입니까? 이 비유에서 ‘동생의 잃어버린 상태’는 그가 처한 돼지우리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무절제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행위 때문에 돈과 친구가 다 없어졌습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마침내 둘째는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삶을 새롭게 세워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또 다른 종류의 잃어버린 상태를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더욱 미묘하지만 똑같이 참담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곧 ‘맏아들의 잃어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상태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맏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가 하는 말마다 원망이 뚝뚝 떨어집니다. 맏아들과 같은 태도를 품은 사람의 첫 번째 증상은, 삶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라 분노와 원한이 깊어진다는 점입니다.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착하게 살면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으며, 자신이 규칙을 따라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실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맏아들이라고 할 때, 착한데도 삶이 엉뚱하게 풀릴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도덕 기준대로 잘 살아 왔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하나님께 격분하게 됩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반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상태에서 뭔가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에는 어떻겠습니까?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서 자기혐오와 내적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미워하다가 또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양극단 사이를 비참하게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맏아들 같은 사람들은 고난에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르는데, 그것은 그들이 지키는 도덕 윤리가 결과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선한 행실 자체가 즐겁거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행으로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벌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상을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사실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에 보상이 따르기를 바라면서 따르는데, 거기에 뭔가 보상이 없으면 혼란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선행과 깨끗한 삶을 자기 공로로 내세워 하나님으로부터 행복한 삶을 얻어 내려고 한다면, 우리 삶은 혼란과 분노에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상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늘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몫보다 덜 받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남들의 삶이 더 잘 풀리는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잘되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이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러냐고?’라고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혼란스럽고 화가 나는 원인은 다른 사람이 잘되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삶을 컨트롤하려고, 즉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분노의 물결이 시작됩니다.
또한, 맏아들은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수준이 ‘창녀들과 놀아난 자’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를 지적합니다. 동생을 동생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경멸에 찬 말투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0절)
맏아들 같은 사람들의 자아상의 근거는 자신이 부지런히 노력한 것, 높은 도덕성, 자기가 소속된 그룹의 탁월함, 그리고 아주 똑똑한 지식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 우월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경쟁적 비교야말로 맏아들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주된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하고 계급 차별을 하는 것입니다. 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현상이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때는 맏아들 인간들이 자신의 올바른 종교를 최고로 내세울 때입니다. 만일 어떤 그룹이 자기네의 교리, 예배 방식, 윤리적 행동이 참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믿는다면, 거기까지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들은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품게 됩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뒤에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게 되면, 진리의 이름으로 미움과 압제를 정당화하기가 쉬워집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맏아들의 태도는 인종차별과 계급주의를 일으킬 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용서에 인색한 비판적 자세를 낳습니다. 그런 형은 동생을 용서할 수 없는 겁니다. 동생이 사회에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가산을 날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형이 무엇을 강조하는지 보십시오. 그는 동생이 “창녀들”(30)과 놀아나는 동안 자기는 집에서 깨끗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라면 저렇게 악한 짓은 절대로 못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들 중의 하나로 보지 않기 때문에 미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상대를 향해 우월감을 품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만 나면 못 참고 물건을 때려 부수는 사람인데, 나처럼 화를 잘 내며 때려 부수는 사람을 보면 그럴 때는 용서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나도 그 사람보다 전혀 나을 바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나도 똑같이 형편없는데 어떻게 남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맏아들의 죄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신앙적 모습과 착한 행동 밑에 꼭꼭 숨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를 향해서든 당연히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거짓말하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우습게봅니다. 그런 사람이 피해를 입히기라도 하면 그들은 가해자를 향해 화를 낼 권리와 그 잘못을 두고두고 지적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자신의 삶에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결혼생활이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번번이 가족들을 크게 실망시킵니다. 중독자의 아내는 고생의 결과로 엄청난 자기연민과 독선적인 태도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형편없는 남편을 나 몰라라 하면서도, 그의 잘못은 계속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럴수록 중독자는 더 자기혐오가 깊어져서 그 이유로라도 술을 마십니다. 파멸의 악순환인 것입니다.
어쩌면 맏아들에게는 자신의 잘못된 자존심을 떠받치기 위해, 늘 고집불통인 동생이 비난의 대상으로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동생은 잘난 척하는 형 때문에 변화되기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동생이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가 그를 환영해 주자 맏아들은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기존의 구도가 깨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형이 자신의 본마음을 알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방식만 다르다 뿐이지 나도 동생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있어. 나는 동생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권리가 없어.’ 만약 그랬더라면 그도 아버지처럼 거리낌 없이 동생을 용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입니다.
2. 두려움과 이기심이 동기가 될 때
맏아들의 태도를 품은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은, 기쁨 없이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입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고 자랑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절)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라는 말 속에 숨겨진 동기와 태도가 드러납니다. NIV 영어 성경에는 “Look! All these years I’ve been slaving for you(보십시오, 이 모든 날 동안 나는 아버지를 위해 노예처럼 일해 왔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섬겨’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둘류오)에도 ‘종처럼 섬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충실하려면 어느 정도 의무감이 필요합니다. 꼭 해야 할 일인데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을 때에는, 성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오로지 의무감 때문에 아버지에게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기쁨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맏아들 인간들은 윤리 규범을 꼼꼼히 지키고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에서 모든 전통적인 책임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 없이 억지로 일하는 노예인 것입니다. ‘노예처럼 일한다’라는 말에는 강요당하거나 떠밀린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마음이 끌려서 자원하는 게 아닙니다. 노예는 두려움 때문에 일합니다. 자기에게 내려질 안 좋은 결과가 두려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맏아들의 근본 동기입니다. 결국 맏아들 인간들이 착하게 사는 것은 기쁨과 사랑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느 명문 경영대학원 과정에서 한 교수가 기업윤리를 가르치면서, 정직한 기업이 되어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거짓말하거나 속이면 발각될 수 있고 그것이 기업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이 정직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면 직원들의 사기가 올라가 경쟁업체들보다 한 수 위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정직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논리가 부추기는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수익이 감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경쟁업체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교만입니다. 결국 그 교수의 조언은 이런 것입니다. ‘정직하며 진실을 말하라. 그게 너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했다가 큰 손해를 볼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의 거짓말로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정직해지려는 동기는 사라져버립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벌어진 미국 재계 최악의 스캔들 중에 독실한 크리스천들이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맏아들의 순종은 노예처럼 마지못해 법을 지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위하고 진실을 위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두려움 대신 사랑이 동기가 된 사람은 법도 잘 지킬뿐더러,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며 투명하고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게 됩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정직은 세상 악의 근본 원인인 인간의 이기심을 없애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도덕은 오히려 악을 더 크고 깊게 만듭니다. 맏아들 인간들의 선행은 결국 자기이익을 위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는 있으나, 깊은 차원에서 보면 그 목적은 둘 중 하나입니다. 종교적인 형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내는 것이고, 세속적인 형들의 경우는 착하고 너그러운 존재로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에 어떤 농부의 밭에서 아주 큰 당근이 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왕에게 가져가 아뢰었습니다. “폐하, 제가 오랫동안 당근을 재배했지만 이렇게 큰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폐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제 마음의 표현으로 이것을 바칩니다.” 농부의 본심을 알아차리고 감동한 왕은 돌아가려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잠깐! 그대는 실로 땅의 훌륭한 청지기로다. 그대의 밭 옆에 있는 내 땅을 하사하노니 거기에서도 농사하도록 하라.” 깜짝 놀란 농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귀족이 왕궁에서 이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세상에! 당근 하나를 바치고 땅을 얻었으니 그보다 더한 것을 왕께 바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생각에 이 귀족은 이튿날 준수한 검은색 종마를 이끌고 왕 앞에 가서 꿇으며 아뢰었습니다. “폐하, 제가 말을 사육해 보았으나 이렇게 실한 것은 전무후무합니다. 하여 폐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제 마음의 표현으로 이것을 바치나이다.” 그러나 역시 그의 본심을 알아차린 왕은 말을 받고나서 고맙다고만 한 뒤 그에게 나가보라고 했습니다. 귀족이 어리둥절해하자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상을 안 줘서 이상한가? 그 농부는 당근을 나에게 주었으나, 그대는 말을 그대 자신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선행 자체가 즐겁거나 사람들을 사랑해서 선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실상 그들이 음식과 옷을 베풀어주는 대상은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이기심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험담과 다툼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착실하게 살다가 갑자기 추악한 죄에 빠지는 이유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는 사심이 없어 보이지만, 그 밑에 엄청난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도덕의 의무는 종종 사람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됩니다. 맏아들 인간들은 행복하고 편안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숨 막히게 살아갑니다. 도덕군자 같던 형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의무의 쇠사슬을 벗어 던지고 동생처럼 살기 시작하여 주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맏아들 같은 태도의 마지막 징후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내게는 ……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라고 말합니다. 그가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는 춤이나 흥겨움이 없습니다. 선행으로 하나님을 조종하여 구원을 얻어내려 시도하는 사람은 지금껏 자신이 그분께 충분히 착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런 확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이미 언급했습니다. 삶이 잘못되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자신이 뭔가 잘못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또 다른 증상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때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참히 무너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으로 느껴져 자신의 삶에서 진정한 능력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까, 사람들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정도 못 받으니까 못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의 또 다른 증상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고 지은 죄가 있으면 회개한 후로도 오래도록 양심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회개가 충분히 깊었는지 자신할 수 없기에 계속 자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에서도 확신이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상은 메마른 기도 생활입니다. 맏아들 인간들은 기도에 열심을 낼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에는 경이로움이나 친밀함이나 즐거움이 없고 아주 딱딱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거래처 직원이 있고, 이것저것 함께 즐기는 친구가 있고, 서로 사랑에 빠진 나의 애인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래처 직원과의 대화는 다분히 목표 지향적이 되고, 사적인 대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친구에게는 나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인에게는 상대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싶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 종류의 말은 각각 ‘간구’, ‘자백’, ‘찬양/경배’라는 기도 형태에 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깊을수록 인정과 칭찬이 오가는 인격적인 대화의 비중이 커집니다. 맏아들 인간들은 기도 시간을 꾸준히 지키는 데는 훈련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기도는 필요한 것을 늘어놓는 간구가 거의 전부입니다. 사랑의 기쁨에 겨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찬양과 경배는 없습니다.
사실 많은 맏아들 부류 사람들이 그토록 종교적이라고 하지만 기도 생활은 거의 없습니다. 삶에 문제가 터지면 혹시 기도에 매달릴지 모르지만, 그나마 상황이 좋아지면 끝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들이 기도하는 주된 목표는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3. 어디서 답을 찾을 것인가
예수님은 잃어버린 형의 상태도 그 동생의 상태 못지않게 잘못되고 해로운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게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먼저, 세상의 맏아들들은 반드시 이 거울로 자신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맏아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매우 위험합니다.
맏아들들은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구할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문제도 못 보기 때문인데,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병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의사에게 가지만, 병이 있는 것을 모르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있다가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의 동생들도 반드시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 속의 형의 태도를 보면 애초에 동생이 집을 나가고자 한 이유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종류를 막론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는 이유는, 주요 종교마다 형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게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전혀 안 다니는 사람들은 종교야말로 세상의 불행과 갈등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비유를 통해 그들의 생각이 맞는다고 하십니다.
형 부류의 사람들의 분노와 우월감은 모두 정서 불안과 두려움과 내적 공허감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찌든 영적 맹인을 대거 만들어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 불의, 전쟁, 폭력 등의 큰 원인이 됩니다.
종교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대개 기독교도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형들이 넘쳐나는 교회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또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그 말이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를 불러 동생의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이 형의 도덕주의도 꾸짖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들에는 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형들이 중심을 이룬 교회를 피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대개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세속적인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으나, 뜻밖에도 교회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거기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고 대도시로 온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탕부 하나님>의 저자 팀 켈러 목사님은 사역을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 200-300명 중 비신자가 1/3, 신자가 1/3, ‘다시 돌아오는 신자’ 즉 비유에 나오는 동생 부류의 사람들이 1/3분이었다고 합니다. 형들에게 상처받고 화가 나 있는 동생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동생들이 기꺼이 리디머 교회에 나온 이유는 복음과 종교적 도덕주의를 명백히 구분하는 교인들을 보았기 때문이고, 이로써 자신들에게 기독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볼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동생들로서는 기독교가 형의 태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복음, 즉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가능성에 너희 마음을 열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희망을 얻습니다. 그것은 도덕주의와 종교의 폐단에 빠지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길이 있다는 희망입니다.
[나가는 말]
형 부류의 사람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보다 더 쉽게 형의 태도와 형의 무감각한 영적 상태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교만, 정죄, 염려, 정서 불안, 기쁨 없음, 분노 등에 쉽게 지배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삶의 상황에 대해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쓰라린 원한이 오래가고, 인종이나 종교나 생활방식이 다른 이들을 얕보고, 기쁨 없이 고역에 시달리듯 살아가며, 기도 생활에 친밀함과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또 정서 불안이 심해 남의 비판과 거부에 대해서는 과민한 반면 남을 정죄할 때는 가차 없고 냉혹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렇다고 반항하는 동생의 길이 더 낫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동생 부류의 사람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중독이나 방탕한 삶 등 동생이 범한 죄에 일부나마 다시 빠질 위험성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인생관 모두에 자체적으로 파멸의 씨앗이 들어 있고, 양쪽 다 심각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두 가지 잘못된 길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만 하면, 내가 어느 쪽 출신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