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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5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4 ✦
“요한이 전한 복음: 예수를 통해 누리는 영원한 삶”
(요한복음 20장 30~31절)
1.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우리는 신약성경의 순서를 따라 4복음서부터 시작하여 복음의 핵심을 묵상해오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하기 위해 왜 하나로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고, 네 명의 각각 다른 저자를 통해 복음서를 기록하도록 했겠습니까?
우선 네 명의 저자가 복음서를 쓴 대상이 달랐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썼고,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대상으로 썼으며, 누가복음은 그리스(헬라) 문화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관점이 비슷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과 90%의 내용이 다른 요한복음은 모든 지역 사람들, 즉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어떤 분은 사회에서 민감한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각각 다른 관점을 가진 네 종류의 신문을 읽는다고 합니다. 2개는 보수적 관점이고, 두 개는 진보적 관점의 신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쪽의 매체만 접하게 되면 ‘확증편향’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쪽만 보면 계속 그렇게만 흐릅니다. 진보적이면 진보적인 것만, 보수적이면 보수적인 것만 듣고 보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균형이 잡히지 않게 됩니다.
복음서도 네 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하면서 서로의 관점을 보완하며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이 나온 지 한참 된 후에 요한이 거의 말년에 썼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90%가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미 나와 있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4복음서를 예수의 생애를 노래하는 4중창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4복음서는 서로 보완적 관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기도 중에 주님이 계시는 하늘의 보좌 가운데와 주변에 있는 네 생물의 환상을 봅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계 4:7)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유명한 교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바로 이 구절을 보고, 이 네 생물들이 바로 4복음서의 기자들이 증언한 예수님의 네 가지 특성과 일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의 별명을 짓기를, 마태복음은 사자 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 누가복음은 사람 복음,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바티칸에 가보면,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 조각을 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사자는 정글의 왕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초점을 둡니다. 소의 특징은 헌신적으로 노동하는 것인데,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누가복음은 참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을 지닌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어린 아기 시절의 강보에 쌓인 예수라든가, 12살 때 성전에서 박사들과 토론하는 예수의 모습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독수리는 하늘의 왕입니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곧 그분의 신성을 증언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항상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만 한다’라고 하시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이나 VIP 분들이 듣는 ‘생명의 삶’에서 처음 요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성경 전체를 기록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1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는 것이야말로 요한이 증거한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요한은 그 증거로 표적들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0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기적들 외에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지만,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고 한 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기적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7가지 기적들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개역성경에는 ‘표적’, 새번역에는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사인(sign)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적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언하는 독특한 목적을 지닌 사인(sign)이라는 것입니다.
사인(표지판)은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I-71 고속도로 쪽으로 가면 “71, North, Cleveland” 또는 “South, Columbus”라는 사인이 있습니다. 그 표지판 자체가 클리블랜드나 콜럼버스가 아니라 클리블랜드 또는 콜럼버스로 가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이 가리키는 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곧 예수님의 신성의 증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2. 요한복음의 표적들
1) 가나의 혼인잔치 (2:1-11)
이 기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으로서, 질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기적입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에 이런 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신다는 사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일어난 최대의 변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 5:17, 새)
‘새로운’(kaine)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질적인 새로움’을 뜻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곧 구주로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질적인 새로움을 가리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 이후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요 2:11, 새)
여기에서 “표징”이 바로 ‘표적’인데, 거기에 주가 달려 있는 것을 읽어보면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질적인 변화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4:46-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요 4:54)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 이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거쳐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는데, 첫 번째 표적을 보여주신 가나로 가십니다. 그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와서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의 아들은 가버나움에서 앓고 있었는데, 가나와 가버나움은 당시에 걸어서 하루 반나절 이상(6~7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아마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고쳐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
놀랍게도 이 사람은 그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납니다. 그가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 종들도 거꾸로 가버나움에서 떠나 길을 오다가 서로 만납니다. 그래서 ‘아드님이 살아났습니다.’ 하고 말해줍니다. 언제 나았느냐고 물으니까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각인 “어제 일곱 시”(오후 1시)에 아이의 열이 떨어지고 나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이 두 번째 표적은 그분이 공간과 거리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5:1-9)
38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맨 기간을 연상시키는 절망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14에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입구인 세렛 강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38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그의 병이 오래된 줄을 아시면서도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그리고 8절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고 명령하시니까 그는 곧 치유를 얻어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38년이라는 이 긴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38년이면 지금부터 볼 때 1980년인데, 그때부터 아파서 계속 누워 있었다니 얼마나 오랜 시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렇게 긴 시간을 앓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문제가 얼마나 오래되었든지 상관없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진정으로 해답이 되시고 구원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판(사인)인 것입니다.
4) 5병2어로 5천 명을 먹이심 (6:1-15)
다른 복음서에 보면 남자만 5천 명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때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1만 5천내지 2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수였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기적을 베푸십니다.
바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4복음서에 다 나오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다른 면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원래 어떤 작은 아이의 도시락이었다는 사실, 그것을 안드레가 가지고 와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것 등, 다른 데 안 나오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내부자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다 알고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하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돈이 없습니다. 가서 사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금 닥친 문제가 얼마나 크냐 작으냐,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은 전혀 그분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아뢰면서 그분을 참으로 신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말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요 까짓 것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전도가 우리의 말재주로 되는 게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아뢰기만 하면 주님께서 사랑으로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크고 작음이나 많고 적음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해답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정말로 신뢰하며 그 문제를 들고 나오는가가 정말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 인생의 문제의 양이나 크기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만나게 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불렀던 찬송 가사처럼 “불가능한 일 행하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며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5) 파도와 바람을 잠잠하게 하심 (6:16-21)
사실 요한복음에는 물결을 잠잠하게 하신 것은 안 나오고 물 위를 걸어오신 것만 나옵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하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시고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철야기도를 하시다가 보니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제자들이 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생만 합니다. 그래서 큰 바람과 사나운 파도로 인하여 어려워하는 그 순간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나타나십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이 무서워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그분을 배 안으로 영접하자 바람과 파도는 멎고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이 파도와 바람을 다스리는 자연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연 법칙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물과 파도와 바람을 만드신 분이심을 알게 된 제자들은 그 앞에 엎드려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경배를 드리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4:33, 새)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난 것입니다.
6)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심 (9:1-12)
이 사건은 날 때부터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을 둘러싼 제자들의 질문으로부터 이 사건이 시작합니다. 2절에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보편적 편견을 드러내는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어느 쪽이든 운명론적 인과론, 즉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이 기대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요 9:3, 새)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칠 때, 아니면 날 때부터 안 좋은 것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장애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기서 씻음으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신학자는 진흙을 바르게 하신 것은 인간을 본래 진흙으로 빚으신 그가 바로 창조주이심을 연상시켜주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운명을 초월해 일하시는 분이시며, 사람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는 창조주 자신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11:1-44)
죽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절망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을 얻어 죽게 되었습니다. 11장 3절에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였는데도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도 병이 들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이 들고 힘든 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 사건이고 죽으면 다 끝난다면 거기에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11:25-26, 새)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을 막은 바위를 열게 하시고 죽은 지 나흘 된 그를 향해 큰소리로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 그러자 그가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44).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영적 드라마인 부활의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죽은 자들의 부활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물론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부활은 아닙니다. 나사로는 어차피 또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을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3. 요한이 전한 복음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질적인 변화의 주인이시고, 공간을 초월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시고, 양을 초월하시고, 어떤 상황도 운명도 초월하시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부활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생은 죽은 다음에 누리는 천국의 소망만이 아닙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영생을 지금 여기에서 현재 누리는 것으로 증언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요 5:24)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다음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요 6:47, 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영생은 오래오래 계속되는 생명일 뿐 아니라, 풍성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십시오. 가지 된 우리 성도들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 누리는 삶이야말로 바로 영생의 삶의 본질입니다. 기도의 풍성한 응답의 삶,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의 삶, 그리고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 새)
그래서 사도 요한은 드디어 요한복음에서 이 영생의 본질, 복음의 핵심에 대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17:3, 새)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누리는 충만한 기쁨, 이것이 바로 복음적 삶의 본질입니다. 이 복음을 다시 말하면 ‘예수가 내게 모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예수면 다냐?”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예수가 전부다!”
예수가 부활이고 예수가 길이고 예수가 진리이시고 예수가 생명이시고 예수가 구원이시고 예수가 소망이시고 예수가 기쁨이시고....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 예수를 영원토록 알아가는 기쁨, 이 땅에서도 그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저 영원한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요한이 전해준 복음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