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8년 10월 24일 수요예배
✦ 치유기도 15 ✦
“올바른 경계선을 세우는 삶”
(마가복음 3장 31~35절)
1. 통제는 사탄의 속성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면 그들이 자기를 위협하지 않게 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마음은 곧 주술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술(마술)이라는 것은 요상한 술수를 써서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조종(manipulation), 위협(intimidation), 지배(domination)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된 목표는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통제하고 싶은 사람보다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알면 상대방을 조종하려고 시도하고,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되면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지배하려 듭니다.
많은 가족관계에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화를 내며 아내를 위협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여 힘으로 지배하려 들고, 아내는 눈물과 슬픈 얼굴로 남편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남편을 조종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협하거나 지배하는 일도 흔하게 나타나고, 자녀 또한 부모를 조종하는 일에 아주 능숙합니다. 여기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조종되고 있지 않은지 잘 봐야 합니다.
그런데 통제의 주된 무기는 바로 죄책감입니다. “네가 엄마를 정말 사랑한다면 이런 것들을 해줄 수 있겠지?” 그러한 엄마의 요청을 거절하게 될 때 아이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거절한다는 것은 곧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아이로 하여금 늘 엄마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함으로써, 그 죄책감을 통해서 악한 영이 그 아이의 인생에 장난을 치도록 문을 열어주는 엄청난 실수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선교헌금을 걷으면서 뼈만 앙상한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고, 헌금하지 않으면 마음에 죄책감이 들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자발적인 헌신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아주 귀한 일이지만, 죄책감 때문에 마지못해 헌금한다면 바로 그것을 통해 악한 영들이 역사할 틈을 주어, 불평, 불만, 원망, 비난 등이 일어나 교회가 분열되게 하는 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역이든 자발적인 헌신으로 해야 하지, 죄책감에 근거하여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회사에서도 상사가 부하직원을 위협하거나 사회 전체에 일어나는 소위 ‘갑질’의 행태, 나라의 지도자가 적대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많이 있어 왔습니다. 정치인들은 광고를 통해서 대중을 선동하거나, 기업들도 광고를 통해서 사람들이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도록 만들고, 살 능력이 없는데도 탐심을 자극하며 부추깁니다. 그런 식의 수단과 방법을 쓰는 것은 곧 주술이 다른 모습으로 위장을 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거대한 주술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조종하거나 위협하는 사람은 조종하는 대상을 영적인 노예로 만드는데, 바로 그런 것이 사탄의 속성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기 위해 주신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교묘히 이용해서 우리를 통제하려고 듭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통제했던 사람은 회개하고 통제하려는 욕구를 버려야 하고, 통제 당했던 사람은 통제에 굴복했던 것을 회개하며 묶여 있는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2. 부부 밖의 경계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세우신 제도가 두 개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가정이고 두 번째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가정과 교회를 깨려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특히 가정의 기초가 되는 부부의 관계는 사랑과 신뢰와 헌신을 기초로 한 결혼이라는 제도적 결합입니다.
그런데 2015년 한국의 이혼율은 OECD 35개국 중 9위였고, 아시아에서는 1위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의 가정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두 사람의 결합인 결혼은 서로 약속을 위반했거나 부정행위를 저지를 때 손상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너무나 음란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의 손길이 여기저기서 몰려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을 깨뜨리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요즘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듣는데, 그 중에는 목회자들도 종종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예 성적으로 타락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몇몇 케이스를 봐도, 결혼생활에 문제가 일어난 젊은 여성이 목회자와 상담을 하다가 잘못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단기선교를 갔다가, 선교팀원 중 이혼한 한 여자 성도의 어려움을 상담해주던 목회자가 그녀와 불륜에 빠진 경우도 보았습니다. 동정하는 마음이 연민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발전하여 영혼결합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여성을 도와주려는 남성 정신과 의사나 카운슬러에게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담할 때는 부부가 동반하거나, 동성 카운슬러에게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성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면 감정이 통하면서 생각을 공유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혼적인 묶임(영혼결합)이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부부는 다른 이성과의 사이에 항상 경계선을 그어 그것을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대개 부부는 기질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달라서 생각, 감정, 행동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실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다르기 때문에 연애할 때 서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하나님이 남자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는데, 이것을 보아도 서로 부족한 부분을 상호 보완하며 삶의 균형을 맞추라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삶 속에서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정적인 영혼결합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경계선을 먼저 확실히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3. 부부 안의 경계선
부부관계에서 잘못된 묶임으로 결혼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주된 원인은 배우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며 통제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폭력이나 외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소위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경우가 거기 해당됩니다.
1) 이세벨 유형의 아내
이세벨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아합 왕을 바알 우상숭배자로 만든 사악한 여인의 대표격입니다. 이런 아내의 지배하에 공처가로 사는 남편은 진정한 자신의 인격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런 부부관계에서는 아내가 자신의 삶을 휘두르도록 방치하거나, 남편 대신 아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허용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남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의존적 성향을 부추기고 남편을 점점 더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건강하지 못한 부부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더 심할 경우, 완고하고 강한 의지를 가진 아내가 남편의 인생을 통제하며, 경계선이 없이 무례하게 남편의 영역을 마구 드나들기도 합니다. 이런 부부관계는 조만간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골 3:18)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2-24)
이처럼 대부분의 남편들에게는 순종의 언어가 아니면 아내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순종의 언어는 남편을 인정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는 말씀은 남편이 더 우월한 존재라는 성 차별이 아니라, 가정에서 남편의 영적 리더십을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세벨 유형의 아내는 남편을 들들 볶거나 자기가 주도적으로 행동함으로 남편을 주눅 들게 만들고 제대로 남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무능하다며 답답해하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설칩니다. 그런 이세벨 유형의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을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순종의 언어를 통해 아내에게서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 아내가 감당해야 하는 영적 훈련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내가 보기에 남편이 존경할 만합니까? 존경한다면 정말 훌륭한 남편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답답하고 한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런 남자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복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그것이 영적 훈련인 것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힘든 영적 훈련이지만 이것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평소에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 복종하는 훈련을 하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됩니다.
2) 마초맨 유형의 남편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닐 때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새로 장년부 전도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신학을 늦게 시작해서 당시 40대였지만 아직 전도사였고, 교회에서 함께 사역할 때 보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친절하고 항상 웃으며 교인들을 대했고, 제게도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제가 당시 20대 중반의 싱글이었는데도 제게 항상 깍듯이 존댓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루는 저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대접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아이들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놓고는, 사모님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엄격하다 못해 완전히 자존심 상할 정도의 언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있는데도 “이거 맛이 왜 이래? 이걸 음식이라고 했어? 다시 해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민망해서 “아니요, 맛있습니다. 전도사님, 괜찮아요.”라고 했는데도 “가만있어 보세요.” 하면서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내 말 안 들려? 빨리 해와!” 하면서 계속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와 고개를 마주했을 때는 그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손님이신데 최고로 대접해드려야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당황했고 그 자리가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 사모님 보기도 너무 민망해서 서둘러 그 집을 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그분이 완전히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느껴졌는데, 제가 보는 앞에서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유형의 남편은 강한 남성다움을 강조하면서 아내에게 비인격적인 복종을 강요합니다.
가부장적인 남편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강한 성격이거나 경제적 강자인 남편이 상대적 약자인 아내를 괴롭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열등감이 많은 남자들이 가정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데, 남편의 폭력적인 언행이 아내를 괴로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9)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5)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를 둔 A가 있었는데, 장로님 아들로서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고 명문 의대를 나와서 의사가 되어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감성을 가진 아내가 비를 좋아해서 비가 오는 것을 보며 “아, 비가 오네!” 하니까 남편은 “또 철없는 소리 한다. 비가 오면 옷도 젖고 다니기 힘들지.”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하루는 눈이 오니까 아내는 “어머나, 눈이 와요!”라고 좋아했습니다. 그것을 본 남편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눈이 밥 먹여 주냐? 나는 바람도 안 피고 매일 소처럼 일만 하는데 한가하게 눈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소리가 나와?” 하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남편의 마음에 악한 의도는 없었고 불륜이나 도리에 벗어난 행동을 한 적도 없지만, 늘 그런 식의 말과 행동으로 아내의 마음에 못을 박으며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었겠지만, 그 말씀에 불순종하며 아내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3) 남자의 필요와 여자의 필요
한 크리스천 가정사역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여자와 비교할 때 남자의 연약함은 크게 세 가지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욕, 탐심, 나태함인데,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기서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윌라드 할리(Willard F. Harley)가 쓴 <그 남자의 욕구 그 여자의 갈망(His Needs, Her Needs)>이라는 책에 의하면, 남편의 다섯 가지 필요가 있고 아내의 다섯 가지 필요가 있습니다.
*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원하는 것 5가지
(1)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
(2) 자신의 취미에 동참하고 함께 재미있게 노는 것
(3) 아내가 매력적이고 멋지게 보이는 것
(4) 아내가 육아와 가사를 성실하게 하는 것
(5) 남편을 존경하고 칭찬하는 것
남자는 단순한 반면 자존심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받고 격려 받으면 아내를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겠다고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언행을 최대한 삼가면서 반대로 “당신이 최고야!”라고 칭찬해보십시오. 남편의 놀랍게 달라진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여자의 연약함도 크게 세 가지인데, 교만, 시기, 질투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다른 여자와 비교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사랑의 느낌을 주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것 5가지
(1) 부드럽게 보살펴주는 것
(2) 대화를 나누는 것
(3)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해주는 것
(4) 재정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
(5) 가정에 헌신하는 것
이렇듯 아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언어와 단순한 반응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정도만 잘해도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부가 한 몸이라고 해도 서로 경계선을 침범하지 말고 존중하며 예의를 갖출 때 사랑의 관계가 오래 가고 깊어집니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평소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렇게 주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잘하는 남편일수록 아내를 사랑하기가 쉬워집니다.
4) 이타적인 삶의 유형
희생만 하는 사람, 특히 한국의 장남, 장녀가 여기에 속합니다. 동생들을 위해 아버지 역할, 어머니 역할까지 하는 장남, 장녀는 정작 본인은 의지할 곳이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착하고 사람까지 좋으면 부모는 물론 형제자매들이 시도 때도 없이 경계선을 침범해 넘어옵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와 형제자매를 뒷바라지하고, 평생 자녀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섬기는데, 정작 본인은 별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다 보니까 자신의 삶은 없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경계선뿐 아니라 자신의 경계선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경계선은 서로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며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새)
주님께서 닫혀 있는 문을 깨부수고 들어올 힘이 없으십니까?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노크를 하고 우리가 문을 열어 주님을 초청할 때까지 문밖에 서서 기다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상이 가십니까?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만왕의 왕께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드릴 때까지 우리의 결정과 의지를 존중하시며 몇 년, 몇 십 년도 기다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절대 그렇지 않고, 틈만 보이면 허락도 없이 강도처럼 들어와서 거짓말하고 조종하고 통제하며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려고 시도합니다. 자녀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강요하거나, 연약한 배우자를 무시하고 조종하며 억압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지, 결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닙니다.
4. 결단과 치유
사실 그러한 혼의 묶임(영혼결합)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되고 이어져온 결과입니다. 한국의 경우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문화의 영향이 강해서, 크리스천이라고 단번에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의 결단입니다. 어떤 결단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혼결합 상태인 동안에는 자신이 누군가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묶임이 있을 때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자유롭지 못하며, 따라서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호한 자세로 올바른 경계선을 긋고 세우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올바른 경계선을 세우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33-35절)
여기서 예수님이 육신의 가족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올바른 경계선을 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생각해서 위기에 처한 예수님을 잡아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경계선을 침범한 것이었습니다. 올바른 경계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혼결합의 중심부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며, 두려움의 대상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가난을 두려워하면 돈의 노예가 되어 돈돈 하게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죽음의 노예가 되어 건강에 대해 벌벌 떨게 되고, 자녀의 인생에 대해 두려워하면 자녀의 노예가 되어 자녀가 하는 일에 매이게 되고, 성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면 성공의 노예가 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두려움의 대상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조종하려는 어두움의 세력을 멸하시고, 그 조종과 통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흑암의 권세들을 멸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무장해제 시키고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 2:14-15)
그러므로 부모님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관계, 그리고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십자가의 경계선을 세워, 잘못된 혼의 묶임(영혼결합)을 통해 악한 영들이 내 인생에 역사하여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이라도 그들의 영역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위에 각자의 삶을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부부간에, 가족간에, 성도간에,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경계선을 세우며 나아갈 때,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