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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7일 수요예배
✦ 치유기도 14 ✦
“묶임의 치유”
(창세기 44장 18~34절)
[들어가는 말]
어느 공항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한 여성이 기다리는 동안 먹으려고 팝콘을 샀습니다. 봉지를 뜯어 조금씩 먹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자기 팝콘 봉지에 손을 넣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속으로 ‘그렇게도 팝콘이 먹고 싶었나? 그래도 좀 이상한 남자네.’라고 생각하며 계속 먹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이 남자는 그치지를 않고 계속 팝콘 봉지에 손을 넣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화가 나서 팝콘 봉지를 그 남자에게 ‘그래, 너 다 먹어라’ 하는 식으로 던져준 다음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비행기 안에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열었는데, 바로 거기에는 뜯지 않은 팝콘 봉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남자가 자기 팝콘을 먹은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남자의 팝콘을 먹은 것입니다.
우스운 해프닝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때가 있고, 상대방을 위한다고 행동했던 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교회를 박해하며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매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간 하나님의 신실한 동행자로 불리던 프랭크 루박(Frank Laubach)이 있는데, 그는 1915년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고, 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했습니다. 또 세계문맹퇴치선교회(World Literacy Crusade)를 설립하여 정치적 직위가 전혀 없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며, 선교사로서 미국 우표에 등재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의 교수법으로, 2백 개의 다른 언어와 방언을 쓰는 6천만 명 이상의 세계 각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나 방언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창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향한 창이다. 하나님을 향해 열린 창은 구원을 주고, 사람을 향한 창은 잘 열려 있는가에 따라 축복이 결정된다.”
이것은 너무나 맞는 말이며 또 성경적인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향한 창,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져야 구원을 얻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그 창이 잘 열려 있는가에 따라 축복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지만,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다수가 축복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창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입니다.
1. 야곱의 묶임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형들이 기근으로 곡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왔을 때 유다와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그 중 이 부분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목숨과 이 아이의 목숨이 이렇게 얽혀 있습니다. 소인이 어른의 종, 저의 아버지에게 되돌아갈 때에, 우리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지 못하거나, 소인의 아버지가 이 아이가 없는 것을 알면, 소인의 아버지는 곧바로 숨이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어른의 종들은 결국,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를 슬퍼하며 돌아가시도록 만든 꼴이 되고 맙니다.” (30-31절, 새)
처음에 형들만 왔을 때 요셉이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놓고 그 사이에 다른 형제들이 가서 베냐민을 데리고 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 일행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가운데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숨겨놓고 그 잔이 발견된 사람은 종이 되어 남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어 베냐민을 잡아놓으려 할 때 형들은 자기들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두가 다 요셉이 있는 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놀랍게도 유다가 대표로 나서서 요셉에게 자기들 모두가 다 노예가 되겠다고 하자, 요셉은 그럴 필요가 없고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아버지께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며 그 이유를 죽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대신 잡혀 있겠다고 합니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32-34절)
유다의 말을 보면 아버지 야곱에 대한 죄책감과 염려가 느껴집니다. “우리가 베냐민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숨을 거두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의 서로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베냐민은 적어도 20세가 훨씬 넘은 성인이었거나 심지어 30대였을 수도 있는데 야곱에게 베냐민은 언제나 ‘아이’였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베냐민을 낳은 라헬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그녀를 얻기 위해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녀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삼촌인 라반을 위해 무료로 일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는 죽었습니다.
그 후 야곱은 라헬이 남기고 간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을 끔찍이도 사랑했는데, 특히 요셉은 아주 영특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들은 종처럼 일하러 내보냈지만 요셉은 일도 안 시키고 오히려 장자의 표시인 채색 옷을 입혀 왕자처럼 키웠습니다. 그러다 이복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지만, 실종됐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된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녀가 낳은 아들 요셉에게 집착하던 야곱은, 요셉도 없어진 다음에는 베냐민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0절에서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이라고 되어 있는데, ‘묶여 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샤르’, 즉 ‘영혼의 묶임’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삶’ 때 견고한 진을 형성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배우는 ‘영혼결합(soul tie)’입니다. 그러면 혼의 영역인 지정의(생각, 감정, 의지)가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듯 야곱이 성인인 베냐민과 영혼결합이 되어 있는 것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베냐민에게 집착해서 영혼결합이 되니까 거기서 견고한 진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사탄이 역사해서 야곱의 삶이 험악한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혼결합과 혼적인 묶임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혼의 묶임(영혼결합)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삶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반대로 베냐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베냐민이, 또 요셉이 행복했겠습니까? 베냐민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랑(사실은 집착)이 아주 부담스러웠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이나 의지했던 가족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었을 때 자기도 그렇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남겨진 자녀도 그런 죽음을 맞을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나치게 건강을 염려하거나, 사사건건 자녀들을 통제하며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혼적인 묶임(영혼결합)의 증상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보통 불안과 관련된 질병을 일으킵니다. 공포를 경험한 아이들은 어릴 때의 두려움이 성인기의 두려움으로 바뀌는데,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새로운 상황에 접할 때마다 느끼는 불안감(anxiety)
- 당혹스러움(embarrassment)
-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 미래, 질병, 가난, 재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 신경과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줄 것 같은 상대방에게 푹 빠지기도 하면서, 또 다른 부정적인 영혼결합(혼의 묶임)을 가져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거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성은, 자기 자녀, 특히 아들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심각한 고부갈등의 원인이 되어서 큰 불행을 낳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떠나보내고 또 요셉이 실종된 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베냐민에게 집착하며 과잉보호를 했을 것입니다. 다 큰 아들인데도 아이처럼 다뤘던 것입니다. 그렇게 집착하는 상태에서 기도하면 자녀를 영적으로 묶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그 아이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도록 맡기는 것이 부모로서의 참된 기도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기보다도 더 커졌는데도 “우리 애기, 우리 애기”라고 부릅니다. 뭔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속에 뭔가 두려움이나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 안에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집착하는 연약함이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 묶임을 끊고 십자가의 경계선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이 가야만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베냐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 때문에 그때까지 잊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계기가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이삭을 100세에 얻은 다음에 이삭에게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낳은 다음에는 별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바쳐라.”라고 하십니다. 원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에게 푹 빠져서 살고 하나님을 잊고 사니까 그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빨리 바로잡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야곱도 똑같습니다. 라헬에게 푹 빠졌다가, 라헬이 죽은 다음에는 요셉에게 푹 빠졌다가, 요셉이 없어지니까 이제는 베냐민에게 푹 빠져 살던 그의 삶은, 하나님이 야곱(비열한 자, 뒷꿈치를 잡은 자)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셨는데도 거기에 푹 빠져 살고 있기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실 필요가 있으셨고 이에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그래도 베냐민을 보내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며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43:13-14)
베냐민을 떠나보내고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떨리고 허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과감히 베냐민마저 주님께 내려놓고 나자, 오히려 베냐민뿐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지만 잃어버리고 죽을 줄로 알고 있었던 아들 요셉까지 다시 만나게 되는 놀라운 반전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요셉에 대한 소식을 들은 야곱이 뭐라고 외칩니까?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45:28)
사랑하는 가족이 죽거나 실종되었을 때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에는 ‘내가 만약 더 잘해주었더라면 죽지(사라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슬픔이 생깁니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유대문화에서 애도기간은 7일(야곱, 창 50:10) 또는 30일(모세, 신 34:8)입니다. 이집트는 야곱을 위해 향으로 처리하여 미라로 만드는 데 40일이 걸렸고, 또 70일 동안 곡을 했습니다(창 50:2-3).
그러나 슬픔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떨쳐버려야 합니다. 경계선을 긋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의 혼과 묶여서 영혼결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람들의 제사는 죽은 사람과 영혼결합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한국에 P집사가 있었는데, 교회 권사인 그녀의 시어머니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편의 유품들을 방안에 두고 남편의 사진을 본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남편의 사진을 보면서 “여보, 잘 있었어요? 이때가 좋았지.” 하며 남편과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누구와 대화를 하는 겁니까? 물론 생전에 너무 사랑하는 사이로 금슬 좋게 지낸 부부였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제 충분히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남편과 그런 대화를 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하는 자세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남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죽어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인데 어떻게 대화를 하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진짜로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적 신앙이 아니라 혼합주의적 신앙입니다. 이미 죽어서 주님 품에 안긴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대화를 합니까? 사탄이 그런 것을 통해서도 역사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죽은 사람과 영혼결합이 일어나 묶여 버리게 되고 견고한 진이 생겨서 사탄의 놀이터가 되고 맙니다.
2. 예수님의 경계선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는데, 유일하게 누가복음 2장에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하나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미 하룻길을 간 상태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그를 찾습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며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라서,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눅 2:48-49, 새)
이 부분을 그냥 읽으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며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소년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겨우 12살인데 사춘기가 일찍 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부모 역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치유의 측면에서 보면 각 사람의 절대적 의지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는 나의 자녀이기 이전에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주는 청지기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내 자녀일지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의탁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특히 태아와 엄마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태아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피와 산소와 영양분을 엄마에게서 공급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DNA를 통하여 부모는 아기의 머리카락 색깔, 눈동자 색깔, 키, 체형, 그리고 인격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아기가 전적으로 부모, 특히 엄마에게 의존하여 태어나고 살아가도록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출생한 후 유아기를 지나면서 아기와 엄마와의 애착관계는 점점 독립적인 형태로 변하는데,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순리입니다. 또한 자녀가 성장하면 부모는 자신의 품에서 그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서로의 삶에 경계선을 그어야 합니다. 자녀가 장성했는데도 계속해서 부모에게 계속 의존하게 되면 부모와 종속적인 관계가 되고, 결국 나중에 결혼을 해도 결혼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모는 성인이 된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려고 해서는 안 되고, 자녀도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도 안 됩니다.
요즘에는 미국의 대학교 학비가 너무 올라서 비싸졌기에, 돈이 없으면 대학에 보내기도 힘든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의 대학교 학비 전액을 부모가 어려운 중에도 허리를 졸라가며 다 내주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움을 주고 빚이 없이 졸업하게 하는 것은 좋지만, 전적으로 다 해주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자기가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학자금 융자를 받게 하여 나중에 자기가 갚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자기가 공부하는 것인데 왜 부모가 다 책임을 져줘야 합니까? 부모가 해줄 수 있으면 해주는 게 좋지만, 그럼 반드시 나중에 그것을 가지고 자녀에게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마인데...’ 하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도와준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나중에 안 알아준다고 서운함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개 그렇게 되기 때문에, 자녀가 독립적으로 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엄마들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의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너무 헌신적입니다. 자식을 서울대에 보낼 수만 있다면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녀에게 바라는 것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이 자녀와의 갈등을 일으키거나, 결혼 후 고부간의 갈등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와 성인 자녀 사이에 확실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경계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농경문화와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가부장적인 가족공동체를 형성해 왔는데, 거기에 ‘우리’는 있지만 ‘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책임의 한계가 불분명하고 ‘우리’ 안에서 서로의 경계선을 너무 쉽게 침범해서 갈등과 상처를 낳아왔습니다. 요즘은 굉장히 사회가 개인주의적으로 되었다거 해도 경계선을 침범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전보다 문제가 더 많습니다.
물론 성경은 공동체를 중요시하지만, 개인 또한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경계선은 권리선이고 책임선입니다.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나의 선택으로 권리도 주장할 수 있지만 책임도 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존중과 평화와 독립의 경계선인 것입니다.
세계의학백과사전에 등재된 한국인 고유의 병이 있는데 바로 ‘화병’입니다. 번역이 안 되어서 그냥 ‘Hwa-Byu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 유독 화병 환자가 많고 또 요즘 우울증 환자도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의 경계선을 침범하여 말하고 조종하고 윽박지르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결혼 후에도 가장으로서 자립하지 못하고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의존성 때문입니다. 결혼한 아들의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부모와 자신의 아내 사이에서 가정의 불화는 더 깊어만 갑니다. 이러한 가정은 하루 빨리 부모와의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본인의 가정을 독립적인 개체로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성경적인 가정의 주체는 부모나 자녀가 아닌,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아직도 시부모나 친정 부모가 주체가 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반면 또 어떤 가정은 자녀가 주체가 되어 자녀에게 쩔쩔 매며 따라갑니다. 심한 경우에는 부부가 서로 함께 대화도 안 하고 시간도 보내지 않으면서 자녀를 끼고 돌며 자녀와만 시간을 보내는데, 그래서는 안 되고, 부부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결혼한 자녀와 그 부모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부모님께 효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한국인으로서도 효도를 해야 하고, 성경적으로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와 성인 자녀 사이에는 육체적, 물리적 분리가 이루어져야 할뿐 아니라 재정적, 정서적인 분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꾸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고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어 더 이상 자기 말이나 힘이나 지식으로 컨트롤할 수 없어지면, 최후의 보루인 물질로 조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통제와 조종과 억압은 주술에 가깝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들아, 내게는 너뿐이잖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또는 “나는 이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런 식이면 내 유언장에서 널 뺄 수도 있어.”라고 하며 위협을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혼적인 묶임(영혼결합)을 가져오는 집착이고, 그것을 통해서 컨트롤이 시작되므로, 인간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계선이 필요하며,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경계선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각자에게 있으며, 그것을 침범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건강한 관계가 될 때 사랑은 양방향으로 흘러가며, 안정적이 되고 평화로우며 또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연연하며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속박되거나 잘못된 애착관계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녀나 부모나 배우자보다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 10:37-39, 새)
이 말씀의 뜻은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으로 공경하며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제쳐 놓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게 되면, 그 관계는 올바른 사랑이 아니라 집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통해서 자녀를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부모나 자녀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집착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목숨을 잃는 것, 즉 올바른 관계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와의 관계가 종속의 관계가 되고 자녀를 망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종종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선물로 주셔서 감사하는데도 그 선물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가 어릴 때는 손이 많이 가고 돌봐주어야 하기 때문에 예배에 잘 집중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이가 조금 커도 아이에게 신경을 쓰느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아이가 우선입니다. 예배도 아이에게 뭔가가 있으면 빠집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잘됩니까? 잘되지 못합니다. ‘아, 내가 하나님보다 중요하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자녀를 사랑할 때 아이가 제대로 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장 앞에 놓는다면, 주님을 먼저 사랑한다면, 주님의 그 사랑이 자녀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자녀도 살고, 나도 삽니다. 그런데 주님을 제쳐 놓고 아이를 먼저 위하면 아이는 우상이 되고 나는 우상숭배자가 되어, 우상숭배자와 우상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놓지 못하고 있는 부분,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 집착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내가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 한 한계에 부딪칠 뿐이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을 먼저 찾아보십시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고, 관계가 살아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활력이 넘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