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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5일 수요예배
✦ 치유기도 10 ✦
“용서함으로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라”
(창세기 45장 1~8절)
1.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용서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위해서나 상대방을 위해서나 용서를 해야 하고, 무엇보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원수라도 사랑하고 용납하며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마 18:21-22, 새)
같은 문제로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피해를 당할 때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을 과연 언제까지 용서해야 하는가는 우리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베드로도 우리와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들이 세 번까지 용서해주는 것에 비해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는 것이냐고 나름대로 상당히 높은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이란 수학적으로 70x7=490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 어느 미국 크리스천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남편이 실수를 저질러 아내에게 여러 번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사과했지만 아내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실수를 계속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이 변화되면 그때야 당신의 말을 믿겠어요.”라고 말하며, 남편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상처를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 화를 냈습니다. 아내는 말로만 사과하며 삶은 변하지 않는 남편에게는 물론 하나님께도 화가 났고,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마음이 쓰리고 고통스러웠습니다.
- 두 사람의 상처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져 가던 어느 날, 이 문제를 가지고 아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남편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잘못을 모두 용서한다고 말해주어라.” 그 즉시 아내는 남편에게 가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나누고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음을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즉시 하나님의 능력이 터져 나오면서 상황이 해결되고 그 부부 안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 비비어(John Bevere)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어로도 많은 책들이 번역되었는데, 그분의 책에 나오는 목사님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용서는 한 차례의 선택이 아니라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매일 새롭게 내려야 하는 결단입니다. 즉 용서가 삶의 태도이자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외우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며,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를 하며, 또 올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게 되면 스스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가 주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감옥에 갇힌 죄수가 감옥 안에서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아무리 모범적으로 산다 해도 진정한 자유는 거기에 없습니다.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해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했던 억울한 일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나를 영적 감옥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나를 어두운 감정의 철장 속에서 꺼내주는 열쇠가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병을 치유하기 위한 성경적 처방은 고백과 회개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죄는 그 나름의 방어기제들이 있는데, 부정하거나 합리화시켜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감출 때 우리는 악한 영의 공격에 노출될 위험에 처하게 되며,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는 것은 악한 영들에게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요일 1:9-10, 새)
이처럼 고백과 회개가 중요합니다. 사실 육체의 질병 중 80%는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를 용서한다면 병원의 병실이 텅텅 비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의사들의 말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깊은 차원의 치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령님은 용서의 영이시지만, 사탄은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도록 조종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 전에 언급했던 풀러 신학교의 찰스 크래프트(Charles Kraft) 교수에게 어떤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녀는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치유되는 기능을 주셨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나아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여성은 더 악화된 것입니다.
- 알고 보니 그것은 감정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상처 입은 감정이 치유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감정의 손상이 면역력을 약화시켜 몸이 회복되는 것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고,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악한 영들을 대적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의 태도가 변화되면서 육체적인 치유도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용서에 대한 오해
우리는 모두 용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쉽지 않은 숙제와도 같습니다. 여기에는 용서에 대한 편견과 오해도 한 몫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 오해하며 잘못 알고 있습니다.
1) 무조건 잊어버리면 된다는 생각
주로 한국의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무조건 참고 잊어버리려 노력을 합니다. 유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면 자기를 억누르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잊어버리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그렇게 참고 잊어버리는 것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올바른 용서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자기 안의 쓴 뿌리를 키워버리는 무서운 자기기만이 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 터뜨리라는 말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태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 또한 착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감정으로는 용납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아직도 마음이 힘들다면, 그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아직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표시가 됩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내가 경험한 일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만, 내 감정이 더 이상 그 사람이나 그 일로 인해서 흔들리지 않고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온전히 치유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리는 태도
몇 년 전 한국의 천주교단에서 ‘내 탓이요!’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인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나라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면서, 매사에 내 탓이 아닌 남의 탓만 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면 모든 잘못을 다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잘못되었을 때 무조건 자기 탓이라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그것이 강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해주지 못한 자책과 후회에서 나오는 마음일 것입니다.
- 아주 오래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미국에서 실제로 그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와서 아기를 낳고 살던 한국 여성이 자기 자식을 살인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 그 여성의 어린 딸아이가 집안에서 넘어져서 머리를 세게 부딪쳐 정신을 잃자 다급하게 911을 불렀는데, 구조대가 도착했더니 아이가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그때 아이의 엄마는 그 옆에서 주저앉아 울면서 자기가 죽였다고 하며 “I killed her. I killed my daughter.”라고 막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와서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한국 여성은 계속 울면서 “I killed her. It‘s my fault.”라고 반복해서 외쳤기 때문에, 증인이나 증거도 없고 아이가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죽은 것이므로, 결국 엄마가 아이를 죽인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던 것입니다.
- 하지만 그 한국 여성은 한국식으로 생각해서, 저쪽에서 놀던 아이가 머리를 부딪쳐 죽은 것이 엄마인 자기의 불찰로 일어났기 때문에 자기 탓이라고 했던 것이었는데 영어로 그렇게 표현했던 것 뿐입니다. 그래서 경찰은 그녀가 자기 딸을 밀어서 머리에 손상을 입고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몇 년 후에 풀려나긴 했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고 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건강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더구나 잘못을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정한 용서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용서인지 성경을 통해 정확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3. 요셉에게서 배우는 용서의 방법과 과정
오늘 본문인 창세기 45장을 보면서, 요셉을 통해 진정한 용서의 방법과 과정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용서란 나에게 행해진 구체적이고 명확한 잘못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먼저는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잘못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4절)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았다는 사실을 감추지도 않았고 그것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이 애굽으로 보낸 접니다.’라고 하지 않고 “애굽에 판 자”라고 정확히 말합니다.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슬쩍 덮지 않았습니다. 말하기 힘든 일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용서는 나에게 가해진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미워해서 죽이려 한 형들 때문에 일어난 인생의 시련과 고난과 학대를 분명히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느끼게 된 고통스러운 감정을 자신의 통곡과 외침으로 표현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1-2절)
요셉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시종하는 자들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처절한 상처의 울부짖음을 보여주는데, 바로의 궁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는 겁니다. 요셉의 집과 바로의 왕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들렸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뜻보다는, 너무 크게 통곡하며 우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무 이상해서 바로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는 뜻이 더 큽니다. 어쨌든 그의 울부짖음이 남들에게 들릴 정도로 컸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행해진 모욕, 거부, 외면, 무관심, 불공평, 잔인한 언행, 무자비한 학대, 배신, 버림받음과 같은 고통의 상처를 다시 확인하는 일은 정말 힘들지만,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3) 용서하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나의 실제적인 감정(분노와 미움)을 직시해야 한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분명히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죽이지는 않았지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것도 외국에 팔았습니다. 믿었던 혈육(부모, 형제)에게 당한 배신감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마음이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에게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미움과 분노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분명히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EBS 방송국의 인기 프로그램인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가족 치유 프로그램인데, 치유 과정 중에 연극 심리치료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 대신 인형이나 대역을 앉혀 놓고, 그 사람 때문에 겪은 고통과 분노와 미움 같은 상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가장 많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상대방을 용서했더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상태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다시는 나에게 잘못한 저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에, 반드시 함께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4) 용서는 십자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에게 행해진 구체적이고 명확한 잘못을 직시하며 인정하고, 둘째로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고, 셋째로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나의 실제적인 감정(분노와 미움)을 직시하며 인정할 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십자가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에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눅 23:34-37, 새)
이것을 보면,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조롱까지 합니다. 백성은 그냥 바라보고 있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길을 따랐던 스데반도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것처럼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자기가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요셉은 형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형들이 먼저 알아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알아본 다음에도 정말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냥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감정으로는 너무 싫고 밉고 화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명령하셨으니까 의지적으로 사랑하기로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하며 용서하기로 탁 결단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감정도 따라옵니다. 성령님은 용서와 사랑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고난의 세월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형들에게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5절)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슬쩍 넘어가지 않고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것을 통해 요셉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팔릴 때 17세였는데 30세에 바로 앞에 섰고, 7년 동안 풍년이 들고 흉년이 된지 2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입니다. 17세부터 39세까지 22년 만에 만난 것인데, 17세부터 30세에 바로 앞에 설 때까지 13년의 기간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닙니까?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얼마나 황금기입니까? 그런데 그때 감옥에 갇혀서 고생만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충격과 고통이 있었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썩었으니까 굉장히 형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또 자기를 감옥에 가둔 보디발의 아내라든지 사람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나니까 거기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7-8절)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야곱의 원래 가족 숫자는 아주 적어서 민족은커녕 부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힘든 과정을 거쳐 요셉을 먼저 이집트로 보내시고 준비시키신 다음 아버지의 가족을 내려오게 하셔서 민족을 보존하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시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요셉이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최악의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면서 형들을 용서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어떠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더라도 그 속에서 터득한 경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의 재료로서 쓰임 받게 됩니다. 고통과 아픔의 터널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또 그것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오히려 사명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의 삶에 일어난 악한 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고백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우리는 십자가를 늘 보고 있고, 심지어 귀고리나 목걸이로도 십자가를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정말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며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아니 수백 번 같은 죄를 지어도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하며 받아들인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장소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걸이나 귀고리를 볼 때마다, 교회당 앞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는구나. 수백 번 같은 죄를 지어도 여전히 나를 받아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조금 더 잘하고 오라는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정말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죄 지은 자들을 동일하게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도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가는 말]
네덜란드 출신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가 있습니다. 귀한 신앙인이자 전도자였습니다.
전쟁 이전에 네덜란드에는 115,000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후 살아남은 유대인은 고작 8,500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코리 텐 붐의 가족은 나치의 처참한 학살 가운데 쫒기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집에 피신처를 만들어 그녀의 집은 유대인의 은신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도움을 요청한 사람의 배신으로 발각이 되어서 온 가족이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코리의 가족은 독일에서 제일 악질적이라고 알려진 라벤슨부르크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혹독한 고문으로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었던 언니 베티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코리 역시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전쟁이 끝나던 1945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코리는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1882년생이니까 1945년에 석방될 때는 이미 63세였습니다. 그 후 코리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코리 텐 붐 여사는 전쟁 이후 독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고, 독일 국기나 지도만 봐도 온 몸이 아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어려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독일 사람들을 사랑하라. 독일을 찾아가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 하나님은 독일 사람들도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하라. 그들에게 치유의 복음을 전파하라. 용서의 복음을 전파하라.”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역사로 인해서 코리는 독일 전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의 간증집회를 했는데, 가는 곳마다 많은 독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의 원수인 독일 국민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루는 어느 마을의 교회에서 사랑과 용서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사람들이 코리 텐 붐 여사에게 인사를 하려고 줄을 서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줄을 서 있던 사람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습니다. 바로 라벤슨부르크 수용소에서 자기를 모질게 고문하며 총을 들고 여자 죄수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하며 말할 수 없는 수치를 겪게 했던 바로 그 악질 간수였습니다. 그를 보자 그 사람 때문에 고통 가운데 죽어가던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코리 텐 붐은 그때의 감정을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그 순간 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나는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때 하나님도 내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코리야, 용서해라.” “아니요, 하나님, 할 수 없어요.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아니다, 코리야, 용서해라.”
- 그 사람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저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네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겠는지 안 하겠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내 명령 앞에 순종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 그 순간 내 힘으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으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느낌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간수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했는데, 나는 그를 안고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 정말 이상한 일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고 그를 안는 순간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가 나를 통해 그에게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용서의 감정은 용서의 의지적인 행동 뒤에 따라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용서하는 능력과 함께 깊은 평화와 하나님의 더욱 놀라운 임재를 경험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주님은 이런 어려운 명령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안 좋고 우리가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영적 자유를 누리며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에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를 통해서만 우리 각자의 인생이 살아나고, 우리의 공동체가 살아나며, 용서만이 우리 모두가 살 길입니다. 이러한 용서와 사랑을 통해 개인적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결단의 기도를 합시다. (부모, 자녀, 배우자, 친척, 친구, 같은 교회의 지체, 직장 동료, 사업체 손님, 동업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