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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일 수요예배
✦ 치유기도 6 ✦
“내면의 갈등을 치유하기”
(로마서 7장 15~25절)
1. 인간 내면의 갈등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갈등을 생각해보고 그 치유를 함께 살펴보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7장을 보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이민을 오기 전에 신학과의 한 과목을 들었는데 ‘초대교회사’였습니다. 그때 교수님은 은퇴를 얼마 앞두지 않은 노교수님이었는데 아주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사는 별로 안 하시고 로마서 7장을 몇 주에 걸쳐 계속 이야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이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장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셨습니다.
여기 7장을 보면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죽 설명하다가 자신의 내면의 갈등에 대해서 처절한 고백을 하는 것을 봅니다. 7절부터 “나”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는데, 사실 7장 전체에 반복하여 나타나는 “나”라는 단어는 바울이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율법 아래 놓여 있는 인간 전체를 대표해서 가리키는 수사학적 대명사로 사용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나”라고 표현한 것이지 바울 자신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5절)
이 말씀 그대로 느낀 적이 솔직히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원하지 않는데 원하지 않는 그것을 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바로 이 “내가 원하는 것”은 건전한 성인자아가 행하기를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은 ‘내면아이’의 상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 즉 성인자아가 배워서 제대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않고, 성인자아가 행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 즉 내면아이의 상처에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내면아이(inner child)’란, 우리의 인격 중에서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영역입니다. 그것은 감정을 우선시하는 직감적 본능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내면아이는 타고난 성격과 재능을 포함하고, 우뇌 즉 감정과 경험의 측면을 말합니다.
반면, ‘성인자아(adult ego)’는 논리적인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내면아이는 감정적인 부분, 성인자아는 논리적인 부분입니다. 지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분석적인 의식을 말합니다. 성인자아는 행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을 내립니다. 성인자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면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안식을 얻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안의 성인자아입니다. 내 안에 내면아이도 있고 성인자아도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내 안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나인데, 내 안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20절)
여기서 바울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다’라고 표현했지만, 바울이 말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속에 원함은 있는데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우리 속의 죄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갈등입니다. 성경이 너무 정확합니다. 우리의 심리적인 부분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성인자아는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알아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 속의 상처 받은 내면아이가 그것을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을 다 압니다. 성인자아가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성인자아는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상처 받은 내면아이가 그것을 방해합니다. ‘난 그렇게 못한다.’ 그래서 계속 미워하고 증오하며 껄끄럽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절)
여기서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는 성인자아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런 나와 ‘함께 있는 악’은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가리킵니다. 그런 내면의 갈등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게끔 만들어버립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2-23절)
결국 우리 자신 안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처절히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4-25절)
누가 이 곤고한 사람의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데, 예수님에게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하고 내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십니다.
‘내면아이’와 ‘성인자아’라고 할 때 헷갈린다면, 그냥 단순히 ‘상처’라고 해도 됩니다. 내적치유를 하시는 분들은 바로 이것이 ‘원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 안의 상처가 원죄라는 겁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 자녀는 또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며, 상처가 대물림처럼 내려가는 것이 원죄가 아니냐고 합니다. 그것이 죄악 된 실체입니다. 상처 받은 내면아이가 울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유하고 내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법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성인자아와, 불순종과 죄의 길을 자꾸만 가려고 하는 내면아이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알고 추구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며 그리로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이 신앙생활입니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늘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내면아이가 나를 지배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죄의 법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성인자아를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이 되도록 계속해서 훈련시켜 나아가면서, 그 성인자아로 하여금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다독이고 보살피도록 해서 그 상처를 치유해줌으로써 승리하는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승리하는 길로 가기 위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 성인자아의 역할이고,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책임입니다.
2. 나 자신을 사랑하라
그런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관계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소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고, 작년에 여러 주에 걸쳐서 ‘예수신경’이라는 시리즈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29-31)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말씀이 바로 이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66권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다 요약한 것이 십계명이고, 십계명을 두 개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또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하나로 줄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율법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라고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자기연민이나 자기애와 같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잘 읽고 돌볼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용기와 희생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내 내면의 상처 받은 아이가 원하는 그 길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 의미로 나를 바라보아주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보통 관계 속에서 사랑의 표현은 상대방의 마음과 의도를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안에서 내면아이와 성인자아가 갈등을 일으킬 때,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줄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만, 내면아이의 의도가 뭔지, 특히 그 감정이 뭔지를 살펴주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성인자아로 내면아이를 잘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면아이가 잘못된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친절하게 고쳐줄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소통(communication)이 단절되면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어린아이가 울고 칭얼거릴 때 엄마가 “그만 좀 징징거려. 남들 앞에서 체면도 생각해야지!”라고 무정하게 혼을 내면, 아이는 엄마와의 사이에서 감정의 단절을 경험합니다. 엄마와 소통이 안 된다고 답답함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울고 있는 내면아이를 버리는 것과도 같고, 또 길거리에서 미아가 되어 울부짖고 있는 아이를 보고도 모른 체하면서 무정하게 그냥 지나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성인자아에게 버림받은 내면아이는 계속 울며 분노하게 됩니다.
반면, 내면아이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너무 권위주의적으로 대할 경우, 내면아이는 성인자아가 ‘너는 사랑과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어!’ 하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놓아두는 태도를 보여도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가져오고, 너무 권위주의적으로 윽박지르는 태도를 보여도 단절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시, 지나친 관대함, 방임주의, 권위주의적인 태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인자아와의 내면아이 사이의 단절이 경험되면, 내면아이는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 진심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나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사람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음식 중독, 성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인터넷 중독과 같은 중독 증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는 사람들은 틀림없습니다. 내면아이의 상처가 보듬어지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보듬어줄 데를 찾아 나선 게 중독에 빠진 겁니다.
3. 내면아이의 치유 과정
그렇다면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내면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까? 크게 4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 자기 내면의 갈등이 있음을 깨달으라
먼저 나의 내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방어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내면의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쉽지 않고 또 어렴풋이 깨달아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만약 그런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그 동안 일이나 술이나 TV 같은 것에 푹 빠져 살았다면, 치유를 위해서 그것들을 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2단계: 사랑을 베푸는 성인의 마음으로 다가가라
모든 감정에는 나름대로 그렇게 느끼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슬프면 슬픈 이유가 있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 이유가 있고, 기쁘면 기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기꺼이 그 고통을 느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무시하거나 옆으로 치워놓지 말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봐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내 안의 고통을 살펴보며, 그 속에 어떤 잘못된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잘 알아보는 것이 치유과정의 핵심입니다.
3단계: 내면아이와 대화하라
자신의 내면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갑자기 분노가 확 일어났다면 성인자아가 물어보는 겁니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너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니?’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질문하면서 내면아이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내면아이의 감정과 그 속에 숨은 잘못된 믿음이 뭔가를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화가 날 때 대개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러는 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수치심과 죄책감 같은 감정의 원인과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내면아이에게 성인자아의 관대하고 넉넉한 마음을 나타내면서 지지를 표현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해주는 겁니다.
‘넌 혼자가 아니야!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잖아!’ ‘넌 놀랍게 창조적인 사람이야.’ ‘실수해도 괜찮아. 실수해도 넌 여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너는 사랑받기 위해 항상 완벽할 필요가 없어.’ ‘바른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계속 너를 사랑할 거야.’ ‘너의 기억은 의미가 있어. 지금 이 상황이 혹시 어릴 적에 받은 어떤 충격적인 일을 떠오르게 했니?’ ‘누가 널 도와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니?’
이런 식으로 말을 해주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잘못된 믿음이 있어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우울증의 원인이 되고, 성인자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내면아이이고, 상처이고, 사실은 잘못된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무시를 당하거나 통제를 받거나 신체적, 성적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자랍니다. 여기에서 거짓 자아가 생기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으로부터 나 자신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막아 버립니다. ‘아니야,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자아는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잘 보살펴주고,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내면아이를 하나님의 사랑의 빛으로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만이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치유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요일 1:5-7, 새)
빛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이 ‘계속’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어둠 속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물론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예수 믿은 사람도 어쩌다 잠깐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다고 하며 빛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빛으로 들어오지 않고 계속 어둠 속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살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다시 말해, 모든 상처에서 치유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단, 빛이신 하나님께 나아와 그 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 때 치유가 가능합니다.
4단계: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교정하라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와 대화함으로써 고통을 일으키는 잘못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그러한 생각을 바로잡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성인자아는 후천적으로 배워서 습득한 지식만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온전한 진실을 찾으려면 안으로는 내면아이에게, 밖으로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잘못된 믿음은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주님, 지금 이 상황에서 내면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까?’
내면아이와 성인자아 사이에 친밀한 유대감이 형성되면 내적 갈등이 점차 사라집니다. 그럴 때 성인자아는 내면아이와 하나가 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내면아이는 자유와 안전함을 느끼면서 ‘아, 내가 소중한 존재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수치심은 줄어들고 자존감은 올라갑니다.
나아가 용기를 가지고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 전에는 그것이 해결이 안 되니까 관계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성인자아를 통해 만짐을 받고 해결이 되니까, 이제 이웃과의 관계도 열리는 것입니다.
기도학교에 참가한 M 집사는 두 아이의 엄마인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지나치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곧 회개하긴 했지만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고, 아이들이 주눅 드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학교에 와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M 집사는 중학교 시절 “너는 너무 완벽하고 차가워 보여서 싫어.”라고 하는 친구들의 말을 들었고, 성적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하며 주문처럼 자신에게 선포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어떡하지? 그럼 남들 보기에 창피한데 어쩌나.’ 하며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그 시절이 기도 중에 떠올랐습니다.
M 집사는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속으로는 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시험을 보는 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졸음이 와서 제대로 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진짜 피곤하거나 잠을 못 자서 졸음이 온 게 아니라 정신적인 원인 때문이었습니다. 시험을 잘 못 봐서 결국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패배의식에 휩싸이게 된 그녀는, 어른이 되어서 수능 날 시험을 치르러 가는 고3 아이들만 보아도 마치 자기가 수능을 치르는 것처럼 떨리면서 눈물이 마구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M 집사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문제들의 원인이 ‘너는 절대 할 수 없어!’라고 하는 거짓된 내면의 목소리,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치유과정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맏딸인 자신에 대한 엄마의 과잉 기대와 욕심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늘 완벽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남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M 집사는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고쳐주십시오. 치유해주십시오. 이제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겠습니다.” 그렇게 치유의 시간을 가진 다음에 M 집사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사니까 정말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잔소리도 안 하고, 아이들에게 짜증내며 소리를 지르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다가 조금이라도 지치거나 마음이 풀어지고 방심하게 되면 다시 짜증이 밀려오는 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치유라는 것이 치유 집회에 가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니고, 거기서는 계기를 얻고 어떻게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삶 속에서 계속 그렇게 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짜증이 몰려올 때 M 집사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지금 제 삶에 오셔서 저를 다스려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조용히 다가와 M 집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다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을 체험한다고 간증했습니다.
4. 내면의 치유와 자녀 양육
이렇게 내 안의 내면아이를 잘 보살피면 배우자나 자녀와의 소통도 잘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자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자녀에게는 나의 내면아이 같은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자녀에게 대하는 태도가, 나의 성인자아가 나의 내면아이에게 하는 태도와 아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내 자녀가 부모인 나에게 바라는 것이 나의 내면아이가 나의 성인자아에게 바라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충분히 받은 사람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릴 적 부모님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부모는 나름대로 사랑한다고 했지만, 부족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슬픈 진실이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어릴 적 부모님의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을 경우, 어른이 되어서 다른 누군가를 통해 그것을 보상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배우자나 자녀를 통해 어릴 적 부모님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 헛된 노력입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배우자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찾으려고 하고, 배우자가 잘 안 되니까 자녀를 통해 그런 사랑을 갈구하는데, 그 결국은 실망과 배신감뿐입니다.
만약 싱글 청년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겠다고 찾는다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낭비해야 할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배우자에게서 그런 사랑을 찾는다면 평생 서로 실망과 상처만 주고받으면서 불행한 결혼생활이 될 것이고, 그것이 깊어지면 이혼으로 끝나게 됩니다. 만약 자녀에게서 그런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쓰라린 배신감만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해결의 열쇠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가 훌륭해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부모에게서 좋은 양육을 받았든 그렇지 못했든, 결국 나 자신의 감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신 주님께서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붙들 때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고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아는 성인자아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에게 다가가 내적 갈등에 대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보고 소통하며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외부에 있는 남들의 사랑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자기 내면아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보살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 있는 내면아이의 고통을 치유하게 되면 이웃과의 관계가 풀릴뿐더러, 내 자녀에게도 참된 사랑을 베푸는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마태는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자기와 같은 세리들이 많이 왔고 죄인이라 질타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왜 당신들의 선생은 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12-13, 새)
여러분, 우리 중에 병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중에 완벽한 부모님 밑에서 완벽한 사랑을 받고 자라 상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중에 전혀 상처가 없는 내면아이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복음은 생명과 치유의 복음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도록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병든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셔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을 고치시고, 우리 같은 사람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상처가 없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였고, 예수님은 그런 잘못된 마음을 통렬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아픈 자, 눌린 자, 병든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들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병든 마음을 고쳐주기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리면서 간절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