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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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1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4 ✦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나아가기” (1)
(고린도전서 2장 9~16절)
1. 영적 분별력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들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중에도 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 모두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도 리더가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적(지적) 분별력보다 더 높은 차원이 바로 영적 분별력입니다.
그 동안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 분별력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외모나 학벌이나 재능이 좀 떨어지고 가진 재산이 별로 없어도,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은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영적 분별력은 단순히 믿음이 좋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개념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보면 열심히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생활을 잘하고, 교회에서 봉사를 잘하면 신앙이 좋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영적 분별력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상의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눈과 지혜로 모든 것을 보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2절)
단순히 세상의 지식으로 인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보고 주변 사람들을 보고 교회를 보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냥 분별력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선물)들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영적 은사, 시간, 재능, 돈, 사랑하는 사람들, 교회, 사역, 인생에 오는 기회들, 또 나라와 역사 등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 외에 일반은총으로서 비, 눈, 햇빛, 공기 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잘 활용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해서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책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는 것이 단순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바로 그런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모든 것이 우연히 되거나 어쩌다 보니까 되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해주신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깨닫게 되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내가 지난주에 뭐가 감사했나?’ 너무 당연한 것 같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라 감사하면서, 마귀의 계략을 깨는 방법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간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눈으로 잘 분별해야만 계속해서 몰려오는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분별력이 없으면, 마귀가 자꾸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을 못하게 할 때 거기에 넘어가게 됩니다.
1) 거짓된 영을 분별하기
우리가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거짓의 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의 삶> 때 성령 체험의 시간이나 <새로운 삶>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고 합니다. 새벽기도 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라고 할 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해서 그것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기도 중에 뭔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거나 귀에 들리는 것처럼 오면 대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음성이 성경과 다르다면 그것은 악령의 소리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음성은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정죄하고 힘들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잘 분별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다 외울 정도로 뛰어난 바리새인 율법학자였던 사울은, 나사렛 예수가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메시야일 수 없으며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믿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체포영장을 받아서 갔습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이고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인데, 두 파는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과 상관없이 핍박하는 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의 잘못된 열정이 초대 교회를 박해하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했는데 주님은 자신을 박해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마귀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뿐 아니라,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교만한 사람들을 거짓의 영으로 미혹하여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과 가정이 망가지기도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하며, 이단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학벌이 뛰어난 지성인이 이단에 넘어가는 게 이해가 가십니까? 이해가 갑니다. 그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1)
거짓된 영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영과 육의 균형 감각이 없다는 점입니다. 요한이 요한일서 이 부분 뒤에서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이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당시 영만 강조하는 영지주의가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내려와서 모든 것을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합니다. 길을 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져도 “아야” 하고 떨며 가는 게 아니라 “오,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조금만 놀라운 장면이 나오면 “주여”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모든 교회 모임에 가거나 기도원에 간다고 남편과 아이들 밥도 안 해주고 집안 청소도 안 하는 주부가 있었는데, 비신자인 남편이 그것에 대해 화를 내면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소리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영적 전쟁으로 보고 그러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 영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살다가 직장이나 사업에서 실패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교사로 부르시는 것 같다고 하며 해외 선교지로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간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사람이 장소만 옮긴 것이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선교지는 무책임하게 살다가 망한 사람들의 도피처가 아닙니다. 인생의 문이 닫힐 때 무조건 신학교에 가거나 선교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 아니라 오히려 거짓의 영에게 미혹을 당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고 모든 것을 영적으로만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항상 기도하며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는, 아주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인 사람이고 믿음 때문에 사자 굴에까지 던져진 사람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의 삶 속에서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야말로 일하는 사람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정권이 바벨론에서 메대와 페르시아로 두 번 바뀌는 가운데에도 몇 십 년 동안 높은 최고위직 공무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늘 기도만 하고 영적인 것만 찾았다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믿지 않는 그 세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고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정시보다 일찍 출근하고, 남들보다 늦게 퇴근하고, 높은 사람이지만 낮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늘 단정한 모습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탁월하게 또 겸손하고 성실하게 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사람인 동시에 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건강한 영성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영과 육의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치유의 은사가 있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배우자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간섭하여 상처를 준다면, 직장에서 불성실하게 일하거나 사업체에서 손님들에게 불친절하고 은근슬쩍 속인다면, 또 학생이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삶일 수가 없습니다. 삶에서 거룩함의 열매를 잃어버렸다면 거짓 영의 미혹을 받은 게 아닌지 빨리 자신을 돌아보고 빠져 나와야 합니다.
이단들은 대부분 가정을 깨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재정도 불투명합니다. 특히 대부분의 유명 이단들을 보면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자기 신도들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 합니다. 곧 주님이 다시 오시니까 재산을 다 팔아서 바치고 공동체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직장도 그만두게 합니다. 그러한 이단들이 이상한 것은, 주님이 곧 오시니까 다 팔고 들어와 바치라고 하는 사람들이 뒤로는 엄청난 빌딩을 짓고 있고 건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단이 아니라 정통교회의 사역자들인데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면, 입으로는 세계선교와 민족 복음화를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돈 문제, 이성 문제를 일으키며 법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들이 요즘 너무 많지 않습니까? 아무리 선교를 열심히 하고 거룩한 일들을 말한다고 해도, 그 삶에 거룩함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뒤로 가서는 성추행을 하고 돈 문제를 일으키고 비자금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삶과 인격이 깨끗합니다.
2) 사람을 분별하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아서 믿었다가 배신을 당하여 아픔을 겪는 경우도 있고, 처음에는 별로인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진짜인 사람의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람을 보는 눈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눈으로 사람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시편 1편에서 말씀하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의 인생의 비결은 자기 인생의 동반자들을 잘 분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받고 싶으면 사람을 잘 보고 어떤 사람과 함께할 것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3:18)
말라기 3장은 십일조에 대한 말씀으로 유명하지만,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많이들 놓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사람들은 불손한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자기들이 무슨 말로 주님을 거역하였다고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말 3:14-15, 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식으로 불손한 말을 하며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념책에 기록하시고, 정하신 날에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며 아껴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18절 말씀이 나온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도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과 불손하게 거역하는 사람이 섞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사람을 분별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인지, 어떤 결정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인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재산을 팔아 거액의 헌금을 바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당시 수만 명이던 예루살렘 교회 전체가 알 정도로 큰 액수의 헌금이었으니까, 얼핏 보면 모든 사람이 그들을 칭찬하고 높여주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던 베드로는 영적 분별력으로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았고, 성령을 속이는 악한 동기를 분별해낸 뒤 단호하게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게 하셨고, 이 사건은 초대 교회 전체에 거룩한 영적 질서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올바른 돈이 있고 불의한 돈이 있습니다. 또 헌신한다고 다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는 겉모습만 보고 너무 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평생 하나님과 함께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도 그런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으로 간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명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여 기름을 부으려 합니다. 그때 사무엘은 늠름한 장남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삼상 16:7, 새)
이제 충격을 받은 사무엘은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그 자리에 없던 막내 다윗을 불러오고 나서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그때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사무엘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잠깐 기도를 안 하거나 방심하면 인간적으로 사람을 잘못 판단하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람을 보면, 그 중심이 아니라 겉모습만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시간이 없고 급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일만 하게 되면 실패하게 되고 상처만 남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사람을 분별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 많이 하고 세워야 합니다. 공천위원회는 공천 작업을 열심히 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고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눈을 가지고 사람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기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신 32:28-29)
여기서 “그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이 말씀은 훗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다가 타락하여 멸망당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풍요를 누리게 되면 우상을 숭배하면서 영적으로 타락하여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종말을 분별하지 못한 채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며 복을 받았다고 착각하며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풍요로움에 취하여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지 알지 못했고,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닥쳐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었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부르짖으며 심판을 면했을 텐데, 영적으로 무지한 탓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는 모세 때(BC 1500년경) 쓰인 것이고 요한계시록은 AD 90년경에 쓰인 것인데, 1600년 동안 사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봅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계 3:17, 새)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 상태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게 풍족하며 아주 괜찮은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니까 이처럼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풍성하다고 생각하는 자아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았습니다. 사실 자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뿌리까지 다 썩어 버린 문제투성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착각을 버리고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3:19).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영적 상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면, 스스로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일에도 모이지만, 이렇게 수요예배로 주중에도 모이고 새벽에도 모이고 특히 목장으로 모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함께 힘을 모아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해보자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다들 피곤하고 바쁘지만 이 수요예배에도 나옵니다. 근데 왜 나오셨습니까? 어떻게든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며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나오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지금 가정에 문제가 있고, 자녀가 잘못 가고 있고, 우리를 넘어뜨릴 장애물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기도나 말씀이나 예배를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수요예배는 귀찮고 피곤해서 못 나오고, 새벽에는 원래 새벽 체질이 아니라 못 나오고, 주일에도 가끔씩 일이 있거나 아파서 빠지고... 도대체 어떻게 그리도 태평한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왜 절박함과 간절함이 없습니까? 지금 자기 상태가 괜찮은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바로 볼 줄 아는 분별력이 있다면 그렇게 가만히 태평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영적 건강에 대해 종합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건강검진을 받아보면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몰랐던 종양이 발견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병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종합검진에서 그렇게 초기에 발견될 때는 빨리 치료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두면 불치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 건강에 대해 종합검진을 받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영적 분별력이란, 항상 나 자신의 영적 연약함을 인정하고, 내가 모르는 악한 것이 내 삶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으로부터 항상 점검을 받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리 영적 은사가 많아도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 양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겸손하게 절제할 줄 압니다. 철저히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씁니다.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교회에 덕이 되도록 겸손히 영적 은사를 사용하려면 영적 분별력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4) 시대와 사건을 분별하기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의 뒤에는 하나님의 숨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은 바로 이것을 읽어내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불복합니다. 그것은 전혀 영적이지 않은 태도이고,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 오히려 더 집중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뜻을 찾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통해 무엇을 알려주려 하십니까?’ 세상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로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우리 시대의 어떤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시대의 사건들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눅 12:54-56, 새)
시대의 영적 표적인 어떤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시대를 분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지게 했던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이나, 한국에서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희생해서 뭘 한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회개하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놓쳤습니다. 9.11 사태가 일어나고 엄청난 미국 사람들이 교회로 몰렸는데, 한두 달 만에 다 빠졌습니다. 한국도 세월호를 통해 교회가 회개하고 나아가야 했는데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대상 12:32)
여기서 ‘시세를 안다’는 말은 그들이 살던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도 따라야 할 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를 접할 때, 그냥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성령의 눈으로 보면서 기도하는 겁니다. 총기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우리 아이는 어떡하나?' 걱정만 하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겁니다. 테러가 일어나면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겁니다. 희생자들을 위해, 또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의 눈으로 보면서 사건과 사고가 일어날 때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5) 개인적 사건을 분별하기
역사적 시대 상황도 그렇지만,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영적으로 분별하고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내가 계획했던 일이든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반응하거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반응할 게 아니라,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반응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가 잘해서 된 줄 알고 좋아하며 펄펄 뛰고, 힘든 일이 생기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축 처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당신의 길로 인도하실 때, 비록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 좋은 일만 일어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꼭 예상치 못했던 사고나 피하고 싶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인생에 나와 마음이 잘 맞고 편한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톡톡 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힘든 일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런 것들을 통해 나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걸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릴 때 교만하지 말고, 힘들 때 절망하지도 말고, 그때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내가 여기에 반응하고 있느냐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주님의 눈으로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은혜입니다.
모든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주님이 앞으로 나아가라 하시면 나아가고, 주님의 뜻이 아니면 멈춰서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의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