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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일 수요예배

이 시대의 거짓 신들 9

연약함을 통한 승리

(창세기 3221~32)

 

1.   하나님은 차선책이 아니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살면서 대개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기 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갈망을 우선시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평판을 더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지 신경을 쓰기보다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자기가 잘 되는 데에 주로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근심과 불안과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상의 속성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망치는 겁니다. 그런 우상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대량생산하는 공장과도 같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우상숭배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까? , 분명히 성경은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우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뿌리 뽑으려고 하고 없애려 하면 우상이 되살아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대신 들여다 놓으면 해결됩니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상숭배를 해결할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 같은 막연한 신념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이 득실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우상처럼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지만,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 자기 맘대로 사는 겁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나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처럼 믿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시고 내 삶에는 관여하시면 안 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알아서 내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은 안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삽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존재 목적인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를 잘되게 해주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안 해주시면 안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생생하게 만나며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야곱도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속박하던 거짓 신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그가 그것을 얻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 중 하나인데, 야곱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 먼 곳으로 도망가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사촌들은 그를 시기하며 반감을 품게 됩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1:1-2)

 

야곱은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싸움이 나고 위험한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대가족과 짐승 떼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성경은 잠시 야곱의 아내 라헬에 대해 짧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를 덧붙여 보여줍니다.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집을 떠나면서 집안에 있던 신상을 훔친 것입니다.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31:19)

 

드라빔이라는 것은 수호신 또는 점치는 데 쓰인 우상인데, 모양은 일정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작아서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있었고 큰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은 일종의 영적 보험을 든 것입니다. 다음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님께서 레아를 도우셨듯이 라헬 자신도 도우실 것이지만, 혹시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어릴 때부터 섬기던 신을 부를 생각이었던 겁니다. 남편이 믿는 하나님을 라헬은 여러 우상들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믿긴 믿지만 혹시 잘 안 될 경우 원래 집안에서 믿던 신을 의지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주님을 그런 식으로 실패에 대비한 들러리나 보험 같이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되는 보충 자원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계획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계획을 이루는 데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계획을 이루는 데 우리가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아룀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 뜻을 이뤄달라고 주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라헬은 아직도 그러한 영적 원리를 몰랐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대대로 전해야 할 집안에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 같은 훌륭한 신앙인이 이런 라헬과 야곱 사이에 나왔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된 것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야곱은 온 가족과 재산을 거느리고서 고향으로 향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서와의 해결되지 않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거의 다 왔을 때 미리 사람들을 보내며 소식을 전하는데, 그들이 돌아와 걱정스러운 말을 전해줍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32:6)

 

이에 야곱은 최악의 두려움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자기를 공격할 뜻이 아니라면 에서가 왜 군대를 거느리고 오겠습니까? 야곱은 즉시 행동을 취하는데, 먼저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을 두 떼로 나눕니다. 에서가 와서 한쪽을 공격하더라도 다른 쪽은 피할 시간을 벌자는 생각인 겁니다(32:8). 그 다음에 그는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9-12)

 

이 기도 내용을 보면 야곱이 얼마나 그때 두려웠는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보면 야곱이 그래도 믿음이 상당히 생겼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 후 그는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택하여 짐승마다 떼로 나누어 그것들을 차례로 보냅니다. 예물로 감정을 푼 다음에 만나면 에서가 자기를 받아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겁니다(20). 이렇게 준비를 다 마치고 예물을 앞서 보낸 다음 야곱은 홀로 밤을 보냅니다(21).

 



2.   복을 얻기 위한 평생의 씨름


야곱이 생각할 때 그 다음 날은 일생일대의 고비였습니다. 에서로 변장한 야곱이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속여 에서 대신 복을 가로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필사적으로 도망가서 실향민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삶은 복을 얻어내려는 하나의 긴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입에서 복을 들으려고 에서와 씨름했고, 라헬의 얼굴에서 복을 보려고 라반과 씨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피폐하고 공허했으며, 가족끼리의 관계는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와도, 에서와도, 라반과도, 라헬과도, 레아와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가 라헬과 그 자녀를 우상화하는 바람에 레아와 그 자녀들의 삶은 늘 비참했고, 나중에 거기서 쓰라린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 순간 에서가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유산과 장자의 명분과 행복을 독차지한 에서가, 지금 군대를 거느린 채 오고 있습니다. 다음 날이면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당연히 야곱은 이 결전에 대비하고자 마지막 밤을 혼자 지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밤 어둠이 깊었을 때, 뜻밖에도 누군가가 야곱을 공격해왔습니다. 두 사람의 씨름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성경은 이것이 극적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살을 붙이지 않고 핵심만 보여줍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4)


밤중에 공격을 했는데 몇 시간씩 씨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을 공격한 신비의 인물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일부러 그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지만, 몇 가지 단서는 보여줍니다. 먼저 그가 야곱을 쳤다는 단어의 사용입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5)


여기서 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진짜로 팍 친 것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접촉이나 살짝 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씨름 상대는 야곱의 허벅지를 때린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손을 살짝 댔을 뿐인데 즉시 야곱의 관절이 어긋나며 그는 영구적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서로 살짝 건드렸는데 뼈가 부러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힘이 셌으면 살짝 건드렸는데도 관절이 탈골됩니까?


그러니까 이런 힘을 보면 야곱이 싸운 상대는 야곱을 죽이지 않기 위해 힘을 굉장히 억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힘과 초인간적인 파워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날이 새려 하니까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6)


그런데 이 사람이 왜 가려고 하는 겁니까? 영화에서 보면 해가 뜰 때 귀신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런 겁니까?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야곱도 잘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야 야곱은 씨름 상대가 동트기 전에 떠나려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0)


그러니까 씨름 상대가 동트기 전에 떠나려고 한 것은 자기를 보면 야곱이 죽기 때문에 야곱을 보호해주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어둑어둑 새벽이 밝아오는 순간 야곱은 이 신적인 인물이 사라지기 직전 그 얼굴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만일 날이 밝고 환해졌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야곱은 바로 하나님과 씨름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런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를 놓아주십시오. 저를 보내주십시오. 저는 죽기 싫습니다.’라고 외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야곱은 먼동이 트려는 줄 알면서도 아주 용감한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상대를 꼭 붙잡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 결과 야곱은 결국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29)


야곱은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31),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졌고 그는 겸손해졌으며 동시에 담대해졌습니다. 결국 야곱이 이겼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7-28)


그가 이긴 이유는 이 신비로운 인물의 신성을 깨닫고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곱은 평생 갈망하던 복을 얻었습니다. 사실 이전에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던 참된 복을 마침내 이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잠시 후 에서 일행을 만난 야곱은 에서가 평화롭게 자기를 맞이함을 보고 기뻐합니다.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3.   마침내 굶주림의 상처가 치유된 야곱

 

우리가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바로 이 부분에서 당황할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 야곱은 전 생애를 통틀어 믿음의 영웅으로 나온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활하거나 사악하거나 미련하게 행동했을 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이 무슨 복을 받고 이스라엘입니까?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이 된다면 이해가 가지만, 무슨 야곱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이 됩니까? 그런데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왜 야곱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까?

 

1)  아버지의 편애가 준 상처

 

사실 야곱의 인간적인 모습들, 욕심내고 갈등하고 실패해서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한 답은 굶주린 마음이라는 상처입니다. 야곱의 주된 상처는 굶주림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이삭의 편애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삭은 큰아들인 에서만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5:28)

 

사실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 것이 어떻게 사랑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이삭은 에서만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에서의 사냥한 고기였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 특히 아들에게 있어 거의 모든 것입니다. 그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해 생긴 결핍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고 되어 있지만, 어머니가 아무리 사랑을 해주더라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에서도 역시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에서는 나중에 가나안 땅 여인들을 무분별하게 취하여 결혼함으로써 이삭과 리브가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는데, 이렇게 이방 여인들과 마구 결혼을 일삼는 행동은 굶주린 마음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굶주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선택할 때 너무 쉽게 선택하고 나중에 금방 후회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던 에서도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진 것을 보면, 편애는 정말 건강하지 못한 사랑이고, 이런 사랑은 못 받는 자에게만 아니라 받는 자에게도 굶주린 마음이라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항상 뭔가에 집착했던 야곱

 

야곱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집착하는 삶입니다.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집착을 하게 됩니다.

 

(a)  장자권에 대한 집착

 

야곱이 어느 날 죽을 쑤고 있는데 배고픈 형 에서가 와서 달라고 합니다(25:29-30). 그런 형에게 장자권을 팔라고 요구하는 그의 행동은 그냥 넘기기에는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31). 이 비정상적인 이야기는, 굶주린 마음을 채우려는 야곱의 처절한 집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린 나이에도 이것을 질문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사실 내가 동생이지만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인데 왜 그러실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작된 집착은 내가 장자만 될 수 있다면...’ 하는 것이었고, 어느 날 형이 헐레벌떡 와서 죽을 달라고 조르니까 얼른 장자권을 팔라고 그냥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굶주린 마음의 사람은 항상 뭔가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그 집착은 두려움에 의한 집착과는 다릅니다. 두려움의 상쳐에서 나온 집착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안전에의 집착’(안전하기 위한 집착)이지만, 굶주림에 의한 집착은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우기 위한 집착입니다.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집착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수단에의 집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굶주린 마음은 장자권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온 굶주림이지, 장자가 아니라는 데에서 온 굶주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종종 그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 그것을 고치거나 가지게 되면 사랑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 성공할 수가 없고, 오히려 그렇게 집착하는 가운데 더욱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에 집착했지만, 그것이 결코 그의 굶주린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에서를 대신해 들어가 축복 받으라고 했을 때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27:11-12)

 

이 말에서 야곱의 슬픔이 느껴지십니까? 이삭이 에서를 볼 때마다 만져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집안사람들도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이삭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에서도 당연하니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직 야곱만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으면,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만져줄 때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아버지가 나도 좀 저렇게 만져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에서니까 분명히 만지신다는 겁니다.

 

사랑받지 못해서 굶주린 사람은 이처럼 남보다 사랑에 훨씬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악순환입니다.

 

또 한 가지 슬픈 것은, 야곱이 갖고 있는 아버지 이삭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이것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사랑을 주기보다는 책망하고 야단치는 아버지, 잘못하면 저주까지도 퍼부을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건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후 도망친 야곱은, 빈들인 루스 땅(벧엘)에서 하룻밤 자게 되는데, 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야곱에게는 생명이 되살아나는 은혜 체험의 순간이었고, 인간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한 사랑의 빈 공간을 하나님 아버지가 채워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28:15)

 

32:9-12에서 야곱이 기도한 내용이 바로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치유된 상태가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히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받고서도 야곱이 조건을 답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조건을 겁니다(28:20-22).

 

신앙생활에서 이렇게 조건을 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조건적이 되는 것은 바로 버림받은 마음, 굶주린 마음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뭔가를 해야 하나님이 사랑해주시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건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면, 신앙생활이 언제나 피곤합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더 피곤해집니다. 응답을 받을수록 더 부담스러워집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계속 쌓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부모님에게 자전거를 사주시면 이번 시험에서 100점을 받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게 기뻐서 시험 보기도 전에 자전거를 사줍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사줘도 타고 놀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100점을 맞기 위해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항상 피곤한 겁니다.

 

 

(b) 라헬과 그 아들들에 대한 집착

 

자신의 굶주린 마음을 채워보기 위해 야곱이 또 집착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굶주린 마음의 소유자는 사람에게도 집착을 합니다. 특히 자신의 굶주림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을 합니다.

 

가끔 보면 갑자기 아주 친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고 못 산다고 친해집니다. 그런 게 이것입니다. 집착입니다. 야곱도 그렇게 라헬에게 집착했던 것입니다. 레아는 못 생기고 라헬은 아주 예뻤기 때문에 라헬을 더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라헬에 대한 야곱의 집착은 지나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집착은 라헬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고, 그 편애는 댜른 자식들 사이에 지울 수 없는 갈등을 낳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편애의 희생자인 야곱 자신도 편애를 했고, 그 결과 스스로 그 피해를 또 당하게 됩니다. 그 자식들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상처의 악순환입니다.

 

그토록 집착했던 라헬의 죽음, 요셉의 죽음(실종), 베냐민을 포기해야 했던 것 등,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야곱은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 내 곁을 떠나고, 내 주변에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누구를 사랑하기만 하면 없어지는구나.’ 하며 마음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그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느끼는 또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이나 요셉이나 베냐민이 야곱의 곁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함께 살았더라도 그의 인생이 험악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라헬에게 갈망하고 기대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지 부인의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을 힘들어하거나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에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사실 아무리 사랑을 줘도 부모의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이 갈등으로 나타나고, 결국 결혼생활에 어려움과 심한 경우 실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굶주린 내면을 가진 사람의 대인관계는 아주 극단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집착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과는 그럭저럭 지낼 뿐, 속으로는 함께 있기도 싫어합니다. 야곱에게는 라헬, 요셉, 베냐민을 빼놓고는 다 겉으로만 괜찮은 관계들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함께 있기만 했던 것이지, 전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레아와의 관계는 물론, 그녀에게서 낳은 자녀들과 첩들에게서 낳은 자녀들과도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맺힌 것이 너무 많았던 사람들이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서모 빌하와 통간한 장자 르우벤에 대한 분노를 속에 품고 지낸 것, 딸 디나를 강간한 세겜에게 무모하게 복수함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 아들 시므온과 레위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외삼촌이면서 장인인 라반과의 관계나 형 에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좋게 헤어졌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모든 관계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해결되지 않은 상처 때문입니다.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조금만 거부해도 상처받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끊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관계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몇 명 외에는 다 불편합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은데 속으로는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굶주림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위장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분노를 가지고 있지만 터뜨리지 못하고 속으로 품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관계 속에서 사랑을 공급 받고 살 수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을 딱 닫고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어놓으니 어떻게 관계가 깊어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c) 물질에 대한 집착

 

굶주린 마음을 채우려는 야곱의 집착은 물질에도 있었습니다. 굶주린 마음이라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명예나 인기에 집착하곤 합니다. 그것을 얻는 순간 누리는 짧은 만족 때문에 계속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할 때 자기 소유의 양 떼를 불리는 모습이나, 에서가 자기를 치러 온다고 할 때의 반응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가축 떼를 둘로 나누어 하나라도 건지려는 집착을 보입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달려 있는 상황에서 물질에 집착하는 모습은 상처에서 나온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만 참 만족을 누림으로 치유된 상처

 

야곱이 만일 굶주린 마음에서 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의 극단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해서 그런 상황에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말 그대로 험악하고 망가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채우다가 채울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꼭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아까 기도한 것을 보십시오. 그래도 그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네가 평소에는 나를 찾지도 않다가 위급하니까 나를 찾느냐? 관둬라.’ 하지 않으시고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심지어 오셔서 씨름까지 해주시며 그를 바꾸셨습니다. 처음에 벧엘에서도 그러셨고, 얍복강 나루에서도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체험은, 나중에 디나 강간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그가 다시 한 번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을 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참 위로와 만족을 얻을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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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뭔가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하는 굶주림의 상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집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평소에 제대로 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냥 하나님을 부르기만 해도 마치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 우리를 그대로 만져주시고 변화시켜주십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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