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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5일 수요예배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3 ✦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우상”
(창세기 29장 13~30절)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참 사랑을 찾고 싶어 하는 열망이 그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갈망이 노래나 이야기들을 통해 표현되어 왔지만, 많은 경우 그런 것들을 너무나 과장되었습니다.
1970년에 나온 뮤지컬 <컴퍼니(Company)>가 있는데, 그 줄거리는 정말 인간의 삶의 허무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혼란한 히피적 문화를 보여줍니다. 거기 나오는 “살아 있다는 것(Being Alive)”이라는 곡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노래입니다. 그 가사를 보면 남자는 상대 여자를 가리며 “내게 너무 의존하고... 나를 너무 잘 알고... 나를 갑자기 막아서며 지옥으로 보낸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로맨스만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버팀목”이라고 우기며 맥 빠지는 관계를 계속하는데,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노래 속에서 여자는 자기가 바보와 사랑에 빠졌고, 그 남자가 자신을 실망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다시 속아 사랑에 빠졌고 다시 울고 웃는 아이가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두 인물 모두 사랑에 빠진 상태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라리 잘못된 관계일망정, 어떤 로맨틱한 관계가 없으면 그들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샐리(Sally)라는 여성은 굉장한 미인인 것이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통해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을 알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남에게 조종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남자하고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으면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있지 못했고, 그 결과 심지어 폭력을 쓰는 남자들과도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샐리는 왜 그런 폭력적인 대우를 당하면서도 관계를 견디어낸 것입니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애정과 만족을 남자에게서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경계선을 넘어선 요구는 좋은 것이라도 이미 거짓 신으로 변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일하거나, 법을 어기면서까지 승진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일이 우상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애인으로부터 폭력과 억압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허용하고 그런 병적인 관계의 부당함을 깨닫지 못하고 지속한다면 사랑이 우상화된 것입니다. 우상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른 약속을 쉽게 어기거나, 무모한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배신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노예가 됩니다.
사랑을 쫓아다니다 노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야곱과 레아의 이야기인데, 아주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지금의 우리에게 딱 들어맞습니다.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을 거짓 신으로 삼는 일은 늘 가능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서는 사랑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혼동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휩쓸려 인생을 전부 거기에 걸며 살아갑니다.
1. 라헬만 얻을 수 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세월이 흘러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여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님께로 나아갔다.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창 25:22-23, 새)
이것은 둘째로 태어날 아이가 믿음의 계보를 이어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예언에도 불구하고 맏아들 에서에 치중하여 둘째 야곱보다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삭의 편애 때문에 에서는 거만하고 버릇없고 고집 세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자랐고, 야곱은 냉소적이고 울분에 찬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자신을 이어서 집안을 이끌어갈 족장을 축복할 시간이 되었을 때 늙은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에서를 축복하려 했습니다(27:1-4). 그때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형처럼 모습을 꾸미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들어가 속이고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했고, 그래서 야곱은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파탄이 난 것입니다. 가족과 유산을 잃었고, 생전에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하란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게 됩니다(28:42-45).
야곱은 마침내 하란에 도착했고, 이가는 몸을 피하러 온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29:1-14).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목자로 채용하여 자기 양 떼 일부를 맡겼습니다. 야곱이 관리의 능력을 가졌음을 확인한 라반은 관리직을 제안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5절)
이때 야곱이 원한 것은 오직 라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제안을 합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6-18절)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라헬은 몸매가 좋고 예쁘기까지 했습니다. 야곱은 그러한 라헬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첫 눈에 반한 것입니다(11).
버클리 대학교의 히브리 문학자인 로버트 알터(Robert Alter) 교수는 야곱이 라헬에게 푹 빠져 상사병이 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모습이 본문에 많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신부의 값으로 제시한 7년분의 품삯은 그 당시의 통화 가치로 따지면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어떻게 여겼습니까?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0절)
야곱은 라헬을 너무 사랑해서 7년을 며칠 같이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 7년이 지나고 드디어 야곱이 라반에게 말합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1절)
알터 교수에 의하면, 다른 고대의 문서들이 대개 아주 차분한 분위기의 언어로 되어 있는데 비해, 이 부분의 히브리어 문구는 유독 노골적이고 생생하며 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이렇게 말한 것과도 같습니다. “따님과 어서 방에 들어가 첫날밤을 치르고 싶습니다. 당장 제게 주십시오!” 야곱은 한 여자를 향한 감정적, 성적 열망으로 잔뜩 달아올라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왜 그랬던 것입니까? 그의 삶이 공허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고, 소중한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야 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은 그때까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토록 아리따운 처자를 처음 보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만 있으면 드디어 내 비참한 인생도 뭔가 제대로 풀릴 수 있다. 그녀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래서 의미를 찾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의 열망이 온통 라헬에게 쏠렸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 당시로서는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사람들은 대개 사랑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 때문에 결혼했고, 지금은 야곱 같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이라는 책으로 1974년 퓰리처(Pulitzer) 상을 받은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였습니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고 나서 그에 대처하며 살아온 다양한 방식들을 설명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로맨스인데, 하나님을 믿는 데서 얻었던 삶의 의미를 이제 인간은 섹스와 로맨스에서 얻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하는 존재인데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내면 깊은 곳에 반드시 필요한 자존감을 사랑의 대상에게서 찾으려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한마디로 자신에게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베커의 통찰력은 이 질문과 대답에 나옵니다.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야곱이 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커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도 똑같이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중음악과 예술은 계속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가장 깊은 마음의 욕구를 모두 로맨스와 사랑에 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천생연분을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이 그 정도로 커지면 베커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 됩니다.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쓰라린 아픔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 위험한 사랑중독
로맨틱한 사랑은 인간의 감정과 생각에 엄청난 위력을 행사하며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연애에서 맛본 쓰라린 상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로맨틱한 사랑을 피하는 사람도 사실은 그 위력에 지배당합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너무 실망해서 이제 상대방에 대한 장기적 헌신 없이 성관계만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사랑에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른 것이 있습니다. 또 실망하거나 실패할까봐 사랑의 관계를 아예 안 가지는 것은, 늘 누군가와 사랑의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사람만큼이나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원치 않는 사람은 훌륭한 짝이 될 만한 사람이 와도 피할 것이고, 늘 사랑의 관계를 갖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맞지 않거나 난폭한 사람까지도 짝으로 삼게 됩니다. 사랑을 너무 겁내거나 반대로 사랑 밖에 모른다면, 둘 다 이미 사랑이 신적 위력을 발휘하여 그 사람의 생각과 인생 전체를 뒤틀어 놓은 것입니다.
야곱은 내면이 공허했기 때문에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우상’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을 일하겠다고 하는데(18), 그것은 당시 신부를 데려올 때 치르는 통상적 지참금보다 거의 4배나 많은 수준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라반은 비양심적이고 사기꾼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야곱이 라헬에 대해 지독한 상사병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의 그런 상태를 이용합니다. 야곱이 “제가 7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 드릴 테니, 그때 가서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할 때, 라반은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합니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19절)
‘좋다, 그렇게 하자.’라고 확답을 준 게 아니라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낫다.”라고 합니다. 야곱은 라반이 라헬과의 혼인을 허락한 것으로 들었지만, 사실 그 말은 허락이 아니라 ‘너와 라헬이 맺어지는 것도 괜찮겠지.’라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결국 7년 동안 열심히 일한 야곱은 때가 되어 라반에게 가서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21)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라반은 그에 반응합니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2-23절)
그곳 풍습대로 성대한 혼인잔치가 열렸는데,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라반은 얼굴에 베일을 덮어씌운 채 야곱의 아내를 데려옵니다. 야곱은 그때 기분이 너무 좋고 술에 취한 상태로 들어가 그녀와 동침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자신이 첫날밤을 치른 여자는 라헬이 아니라 볼품없는 언니인 레아인 겁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5-27절)
야곱은 분노하며 라반에게 그것을 따졌지만, 라반은 큰 딸을 두고서 작은 딸부터 시집보내는 것은 이 지방의 풍습이 아니라고 태연하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진작 말했어야지 왜 다 끝난 다음에 말합니까? 정말 사기꾼입니다. 그러면서 7년을 더 일하면 기꺼이 라헬도 주겠다고 덧붙입니다. 라반의 덫에 걸린 야곱은 라헬도 얻기 위하여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30절)
야곱이 어떻게 이런 뻔하고 노골적인 속임수를 그냥 물리치지 않고 순순히 따랐을까요? 옛 랍비의 주해에 한 흥미로운 전승이 있는데, 아침에 야곱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임을 보고 그와 레아의 사이에 오갔을 만한 가상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야곱이 레아에게 말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라헬을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소.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것이오?” 그러자 레아가 대답하며 되묻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에서를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도대체 아버지한테 왜 그런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야곱의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크게 속은 것을 경험하고 그 기분을 맛본 야곱은 라반의 제의에 잠자코 따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었는지, 이 랍비의 주해 이야기가 없더라도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중독자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로맨틱한 사랑은 여러 모로 마약처럼 작용해서 삶의 현실을 도피하게 해줍니다.
여러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던 미모의 여성 샐리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제게는 남자들이 술 같았어요. 남자의 품에 안겨야만 마음이 편해지고 제가 가치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거든요.”
어떤 나이 많은 남자는 자기 배우자를 버리고 아주 젊은 여자를 만납니다. 자신이 늙어 가고 있다는 현실을 감추려는 처절한 시도인 것입니다. 또 어떤 젊은 남자는 두어 번 동침할 때까지만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뒤에는 관심을 잃어버립니다. 그에게 여자란 자기 매력과 정력을 확인하기 위한 필수품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남자가 나오는 것을 봅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입니다.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삼하 13:15, 새)
암논이 다말을 ‘사랑했다’고 나오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그의 정욕이었습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황폐해진 마음 때문에 사랑은 마약으로 변합니다. 고통을 달래는 마취제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중독자는 늘 미련하고 해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남들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다음에 또 그런 순간이 오면 다시 똑같은 선택을 합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라헬은 그에게 단순히 아내가 아니라 ‘구원자’였습니다. 라헬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봤습니다. 그래서 라반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갔던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우상으로 섬겼기에 그 후로 수십 년간 집안에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레아의 아들들보다 라헬의 아들을 편애하고 떠받들어서 다른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와 원한을 남겼고 온 집안에 독을 퍼뜨렸습니다. 이렇듯 우상숭배는 야곱의 삶을 망쳐놓았습니다.
3. 아침에 보면 늘 레아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이런 혼란에 빠진다면 그 이유는 대개 성경을 단절된 이야기의 연속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앞으로 어떻게 오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산꼭대기에 하나님을 올려놓고 우리에게 ‘너희도 기를 쓰고 제대로 살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롬 3:10-11, 새)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한마디로 절망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는 큰 주제이고, 나머지 개별 이야기들은 다 그 밑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야곱 이야기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다른 것을 붙드는 한, 그 인생은 실망과 환멸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라헬만 얻을 수 있다면 다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상대가 라헬인 줄로 알고 동침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이 부분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침이었다. 보았다. 레아였다.”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보며 에덴동산 이후로 인류가 경험해 온 인생에 대한 실망과 환멸의 축소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어디에 걸든지 아침에 보면 라헬이 아니라 늘 레아라는 뜻입니다. 물론 레아에게 배울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레아를 따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의 유명한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정리해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갑니다. 처음 사랑에 빠지거나, 처음으로 외국으로 여행을 가거나, 흥미로운 과목을 처음 접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어떤 채워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채워지는 느낌은 아주 행복한 결혼이나 환상적인 여행이나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더라도 완전히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어딘가 부족합니다. 배우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일 수 있고, 호텔과 경치가 정말 끝내줄 수 있고, 자기 분야에서 큰 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뭔가가 자신을 피해 달아난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결혼해서 가장 깊은 채움의 무게를 전부 배우자에게 건다면, 배우자는 우리의 기대에 짓눌려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도 그들의 삶도, 많은 부분에서 흔들리고 뒤틀리게 됩니다. 내 영혼에 필요한 것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배우자라고 해도 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자녀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실망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이라고 해도 조금만 있으면 인간은 싫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라헬과 동침한 줄로 알고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면 늘 레아인 겁니다. 이런 인간의 공통적인 실망과 환멸은 삶 전체에 퍼져 있으며, 특히 자신이 가장 기대를 하던 대상에게서(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돈이든) 이것을 생생히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네 가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를 실망시킨 그 대상을 탓하며 더 나은 대상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지속하는 영적 중독의 길입니다. 대상만 바뀌었다 뿐이지,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둘째, 나를 탓하며 자책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나는 실패자야.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불행한지 모르겠어.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어.’ 이것은 자기혐오와 수치의 길입니다.
셋째, 세상을 탓하며 이성을 모두 싸잡아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완고해지고 냉소적이 되고 공허해집니다.
넷째, 내 삶의 초점 전체를 하나님 쪽으로 조정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경험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이 내 안에 있다면, 가장 좋은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초월적이고 영원한 세상)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자기 점검]
지금 혹시 내 삶에 야곱처럼 내 마음을 채워보려고 시도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것만 있으면, 이 사람만 있으면 내 인생이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이게 없어지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전히 자녀입니까? 로맨틱한 관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여행? 운동? 취미생활? 학위? 돈? 성공? 자녀의 성공?
아무리 그런 것으로 채워보려 해도 내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런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집니다. 내 삶의 초점 전체를 하나님 쪽으로 조정할 때 채워집니다.
내 삶의 일부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 삶의 전체를 하나님께 맞추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내 삶 전체의 초점을 맞추며 나아갈 때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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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내 마음을 열기 원합니다. 그 주님 외에는 다른 데 마음을 주지 않기 원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