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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1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28 ✦
예수님과 함께하기(4)
“최후의 만찬에서”
(누가복음 22장 7~20절)
1. 거룩한 리듬과 예수신경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러 제사의식들과 따라야 할 계명들과 절기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현함으로써 현재에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은 영적 기억상실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년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잊어버리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제사의식들과 계명들과 절기들을 기억하고 지켰을 때,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매일 반복하던 ‘쉐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날마다 암송하던 신앙고백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쉐마를 아무 생각도 없이 암송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별 생각 없이 외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식들과 정해진 일과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며, 그런 것들이 확고히 세워질 때 우리 삶은 리듬을 타게 됩니다. 운동 경기를 보면 축구나 야구나 농구나 리듬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번 리듬을 타면 약한 팀이라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내년이 러시아에서 월드컵 축구가 열리는 해입니다. 최근까지 지역별로 치열한 예선전이 펼쳐졌습니다. 한국도 이번에 간신히 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7번 연속 나가다가 어제 짐으로써 못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제 게임 전까지만 해도 북중미 지역 3위였는데 마지막 게임을 지는 바람에 5위로 밀려 탈락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진 팀이 1위 팀이 아니라 최하위 6위인 트리니다드 토바고였습니다. 약팀인데도 한 번 리듬을 타니까 미국이 졌습니다. 리듬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약팀이라도 리듬을 타면 이렇게 강해지고, 아무리 강팀이라도 리듬이 깨지면 그대로 무너집니다.
우리가 1초, 1분, 한 시간, 하루, 한 주, 한 달, 그리고 1년과 같은 몇 개의 부드러운 자연의 리듬이 있습니다. 또 봄비, 여름 그늘, 가을 낙엽, 겨울눈과 같은 것들이 일종의 리듬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연의 리듬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리듬에 맞추어서 속도를 맞추어 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영적인 것에도 그와 비슷한 리듬이 있습니다. 영적 흐름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아무리 그 동안 신앙생활을 잘했던 사람이라도 리듬을 잃어버리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수가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도 한 번 리듬을 타면 성장하는 것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거룩한 날들을 세우심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리듬이라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날들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그들의 현재로 가져오게 해줍니다. 해마다 그날들은 유월절에 애굽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억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유월절마다 첫 번째 유월절을 재연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준 것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립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리듬과 교회의 리듬 사이의 결정적 고리가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크리스천들의 성금요일이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금요일을 기념하는 가운데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리듬을 발견합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기억하는 리듬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 찰 때, 그날은 특별한 축제의 날이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각자 자신만의 ‘아침 일과’를 진행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고, 샤워를 하고, 남자는 면도를 하고, 여자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옷을 입고, 아침을 먹고, 이를 닦고, 커피를 뽑아 들고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물론 다를 때도 있지만 대개 그렇다는 겁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 거룩한 리듬을 세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새벽 기도와 QT를 하고, 주일예배나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또 목장에 참석하는 등의 거룩한 리듬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교회력에 따라 절기를 지킵니다. 크게 대강절, 성탄절,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 오순절 등을 지킵니다. 그렇게 대강절부터 오순절까지를 소위 ‘거룩한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고, 오순절부터 대강절까지를 ‘일상적인 시간(ordinary time)’이라고 부르며 교회력 색깔도 초록색입니다. 우리는 교회력을 지킴으로 두 개의 시기,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거룩한 시간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인 일상적인 시간을 재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리듬과 영적인 리듬을 허락하셨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될 때마다, 그 옛날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직전에 조상들이 먹었던 원래의 유월절 음식을 오늘에 재연하면서 먹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 가족으로서, 첫 유월절을 기념하며 유월절 첫 날을 보냅니다. 그때 그들은 양고기와 쓴 풀을 먹습니다. 그리고 여러 잔의 포도주를 마십니다. 이 모든 것은 그 가정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읽어주는 이야기 안에서 연결이 됩니다.
그렇게 유월절을 지키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모세의 리더십 아래로 들어간다고 상상하면서, 나머지 모든 날들과는 다른 첫 번째 유월절 그날 밤을 기억합니다. 그날 밤은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유월(pass over)’하고 이집트 백성들의 집을 침으로써 하나님께서 애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신 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최후의 만찬은 공식적인 유월절 음식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들이 존재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직접 보았다면, 보통 유대인 가장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더 두드러지게 자신을 중심에 놓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유월절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신경’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거룩한 ‘쉐마’를 개정하셔서 ‘예수신경’을 만드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이웃 사랑 추가). 또한 예수님이 거룩한 ‘카디쉬’ 기도문을 개정하여 ‘주기도문’을 만드신 것도 보았습니다(우리를 위한 기도를 추가).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개정하셔서 최후의 만찬을 만드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최후의 만찬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 곧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제단과 제사장 대신 식탁과 예수님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양을 제물로 드리는 대신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양고기를 먹는 대신 떡을 먹고 잔을 마십니다. 아바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는 대신 자신의 외아들을 죽이십니다. 그리고 아바 하나님은 문설주에 발린 피를 통해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보호하시는 대신, 외아들의 피인 잔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십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양을 대신하여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만찬은 예수신경에 의해 변형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자신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한 가지 리듬을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2. 표적과 거룩한 리듬인 최후의 만찬
인간은 어떤 만질 수 있는 것, 물질적인 것, 실제적인 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존재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선물, 생일 선물, 결혼반지, 기념물, 목걸이, 트로피 같은 것들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몸이 움직이는 것이지, 생각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Washington D.C.에 가보면 많은 종류의 기념관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washington.org에서 꼭 가봐야 하 8개의 기념관을 제시해놓았습니다. 순서대로 Franklin Delano Roosevelt Memorial,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Thomas Jefferson Memorial, Vietnam Veterans Memorial, Martin Luther King, Jr. Memorial, World War II Memorial, Washington Monument, Lincoln Memorial였습니다.
이런 기념관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루스벨트나 제퍼슨이나 링컨 같은 사람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면 그 사람이 이룬 업적에 대한 기록을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한국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이나 월남전 같은 기념관들은 그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록과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들을 보여주며 그때의 참혹했거나 감동적이었던 기억을 전해줍니다.
그런 기념관들은 요즘에 인터넷으로도 어느 정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직접 가서 보는 것은 감동이 다릅니다. 직접 몸을 움직여 그곳에 가서 보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지난번 갔었던 뉴욕의 9.11 Memorial & Museum도 그랬습니다.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직접 가서 보니까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며 마음이 뭔가 달랐습니다.
지난 번 안식월 때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오르셰 미술관(Musee d‘Dorsay)에 갔는데, 거기에는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수많은 명화들이 있었습니다. 교과서와 다른 미술책에서 유명한 그림들을 많이 보았지만, 책에서 보던 밀레의 ‘만종’이나 반 고흐의 ‘자화상’을 실제로 가서 보니까 진짜 그림은 느낌부터가 달랐습니다. 저와 같은 미술의 문외한이 봐도 정말 뭔가 달랐습니다. 정말 감동이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며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이론적이나 관념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으며, 입으로 맛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요일 1:1, 새)
이것을 쓴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며 살았습니다. 생생하게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으로 와주신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백성에게 살 장소를 제공하셨고(이스라엘 땅), 그 땅에서 예배할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 세례, 성찬식,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행위, 또 믿음의 육체적 표현인 섬김 등을 통해 하나님의 실제적인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머리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서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리고, 움직이면서 섬김으로 그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거룩한 기억의 리듬으로 주신 것을 성찬식(Eucharist) 또는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몸으로 하는 거룩한 리듬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게 하셨습니다.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바르게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 때 받아서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만질 수 있는 진리’입니다. 진리를 우리가 어떻게 만집니까? 그런데 진리를 만질 수 있는 것이 성찬의 떡과 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어떤 이론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이론보다도 많은 분량을 알려주는 단 한 번의 식사를 베푸는 행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별선물이 바로 떡과 잔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는 리듬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준비된 간단한 식사입니다.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너희가 나의 행한 것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내 아들 예수를 봐라. 예수가 한 것을 봐라.’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두 개의 진리인 떡과 잔은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삶에 성만찬을 통해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기
주님의 만찬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에서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기억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며, 그분의 몸과 피 안에서 우리의 몸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한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마 26:26, 새)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받아서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를 향한 명령은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어야 하며 마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던 순간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몇 시간 후면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되십니다.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결코 이 순간에 ‘이 식탁을 슬프게 만들어라’ 하는 명령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슬프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 행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19-20절)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심으로써 육체적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고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기념하라’는 것이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억은 “행하여” 즉 행위로 하는 겁니다.
성만찬 때 우리는 함께 앉아서, 눈앞의 테이블에 놓인 성찬 떡과 잔을 봅니다. 그리고 집례자가 떡과 잔을 취하여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성찬위원(대개 장로)들이 들고 가서 나누어주면 받아서 먹고 마십니다. 가톨릭처럼 집례 신부가 나누어주는 것을 입 벌려 받아먹는 방식도 있고, 우리가 자주 하는 것처럼 앞에 나와 스스로 떡 한 조각을 들어 잔에 찍어서 먹는 방식도 있습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집례자나 그것을 들고 있는 성찬위원이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피입니다.”라고 합니다. 여러 자세한 설명보다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몸을 움직여 참여함으로써 주님을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을 통해 주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의 삶과 죽음에 참여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다음 날 무리가 찾아왔을 때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25)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떡을 먹는 사람들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48-50)
왜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까?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만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만찬은 이 말씀의 내용을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면서, 그 생명의 떡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용 떡과 잔을 받아서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육체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을 선포함으로써 그분의 삶과 죽음에 참여한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선포된 모든 설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모든 책, 그리고 교사들이 가르친 모든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식탁에 모여 거룩한 극장에서 거룩한 리듬을 공연할 때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 가운데서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전 11:23-26, 새)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삶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곧 우리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과 그분의 죽음이 모든 죽음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언은 최후의 만찬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교회 공동체의 특징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놀랍게도 성찬식 때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이 근본적으로 선교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복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 자체로 곧 복음의 제시입니다. 그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여기에 함께 참여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는 세례를 받은 분들이 참여하게 하는 것이고, 아직 시간 차이 때문에 세례를 못 받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신 분들은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분들이 아직 세례를 못 받았지만 참여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 자체가 복음의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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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을 알았다면, 앞으로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거나 이전과 똑같이 계속 사람들을 미워하고 견제하고 시기하고 그런다면, 제대로 성만찬에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바울 당시에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만찬을 할 때는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예배 때 함께 성찬식을 하면서 먹기도 하고, 성찬식 때는 간단히 하고서 예배 후에 같이 남은 음식을 다 같이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음식을 많이 싸와서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먹었는데, 가난한 성도들은 가져온 것이 없어서 굶으며 부자들이 먹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엄히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전 11:27-29)
여기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 뭔가 잘못을 했거나 죄가 있는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을 하는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전혀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섬기는 마음도 없고, 자기 밖에 모르고, 전혀 베풀지 않고, 자기 것은 자기만 먹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견제하고, ‘저 사람이 내 것을 빼앗아 먹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없이 성만찬을 받는 것은 올바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이 거행되는 동안 우리 믿는 자들은 거룩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면서 복음의 드라마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한 사람들이 계속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미워한다면, 그런 것은 그들의 삶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자들로서 우리도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게 해줍니다. 바로 이러한 축복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