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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9일 수요예배

이 시대의 거짓 신들 5

모두가 너무 원하는, 그러나 최악의 우상인 돈

(누가복음 191~10)

 

[들어가는 말: 보이지 않는 자기 탐욕]

 

지난 2007년 말부터 터진 미국의 경제 위기 때 우리는 인간의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을 보았습니다. 회사들은 다 망해 가는데, 경영자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챙겼습니다. 경영진의 연봉은 하늘 높이 치솟고, 사치품의 비중은 늘어나고, 수많은 서민들의 노동을 담보로 탐욕스러운 자들만 떼돈을 벌고, 급증하는 빚은 다들 나 몰라라 했습니다. 탐욕의 문화는 우리 영혼을 갉아먹고 경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탐욕의 문제가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탐욕은 자기에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사람들은 교만, 정욕, 분노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목회자에게 상담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 돈을 너무 많이 씁니다. 지나친 돈 욕심이 제 영혼과 가정과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완전히 돈독이 올랐습니다.’

 

탐심은 그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자신을 교묘하게 숨깁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왜 그것을 못 봅니까? 사실 충분히 풍족하게 살면서 주변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보다는 자기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만큼 잘 살지 못한다. 저들에 비하면 내 재산은 아주 적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풍족하게 살고 있어도 그런 식의 논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기를 가리며 중산층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상류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2%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에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계에서 최상위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적 타락보다 탐심을 훨씬 자주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그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이것이 얼마든지 내 문제일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1.   돈과 다른 모든 것을 맞바꾼 인생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1-2)

 

여기 보면 삭개오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점령군의 지배를 받던 식민 국가였습니다. 점령국 로마는 모든 식민지에 가혹한 세금을 부과해서 현지의 부와 자본이 대부분 로마와 로마 시민을 위해 사용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는 점점 가난해져서 계속 속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사람은 로마 사람들과 식민지의 세리들뿐이었습니다. 조세제도의 실무를 맡은 세리는 상부의 로마인을 대신하여 지역별로 소득세를 징수하던 관리였는데,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삭개오도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죄인이라고 불렸습니다(7). 그 말은 배신자나 쓰레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을 생각하면, 로마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세리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리는 왜 그런 민족의 반역자와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직업을 택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가족과 나라를 배신하고 사회의 천민으로 살았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돈입니다. 로마가 세리에게 제시한 돈은 물리치기 힘들 정도로 많았습니다. 군사력을 뒤에 업은 세리는 로마 정부에게 바치도록 정해진 액수보다 훨씬 많은 돈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요구해도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세금 수탈이라고 하는데,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부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미움 받던 부류였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세리였을 뿐 아니라 세리장이었습니다(2). 그가 큰 세관이 있던 여리고에 살았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지부 전체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가장 부자이면서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부정하게 돈을 모으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돈을 얻으려고 다른 모든 것을 다 희생했습니다.

 

 

2.   불안과 욕심을 통한 지배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3:5, )

 

예수님도 똑같이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재물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가르침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2:15)

 

누가복음 11장과 12장의 문맥을 보면, 재물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가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탐심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돈에 대한 지나친 염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만 탐심이 아니라, 돈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도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감정이 통장의 잔고에 맥없이 좌우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주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생명이 재물에 있다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소유와 소비입니다.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돈을 많이 쓰느냐가 가치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정체성이 돈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돈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남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가치는 재물의 가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탐심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16:13-15, )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자가 우상을 상대로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상을 사랑합니다. 둘째, 우상을 신뢰합니다. 셋째, 우상에 순종합니다. 사랑과 신뢰와 순종이 우상숭배자가 우상에게 하는 일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면 사람은 돈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로 돈을 벌 방법과 새로 사들일 소유물에 대한 공상을 일삼고,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을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돈을 신뢰하는 사람은 재물 덕분에 자기가 안전과 평안을 얻었고 삶을 스스로 컨트롤한다고 느낍니다.

 

나아가 돈을 숭배하면 돈의 종이 되어 돈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왕이나 윗사람을 섬기듯 우상에게 자기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우상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의미를 얻고 우상을 신뢰함으로 안전을 얻어야 하니까 우상이 있어야만 하고, 따라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물에 대해 사용하신 섬기다라는 단어는 엄숙히 서약하고 왕을 섬긴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은 돈의 종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돈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그런데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시면 돈은 왕위에서 밀려나 강등됩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안전이 하나님께 있으면 돈이 염려와 욕심을 통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거나 돈을 섬기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내가 돈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을 섬기면 돈이 나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됩니다.

 

노예가 된 가장 명백한 증거로서, 탐욕에 빠진 사람은 눈이 멀어 자신의 물질주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전 누가복음 12:15 말씀을 잘 보십시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것은 주목해서 볼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경고하는 간음죄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삼가 간음을 물리치라.’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배우자와 간음을 저지르면 본인이 그것을 압니다. 간음을 하다가 중간쯤에 , 잠깐! 이건 간음인 것 같은데!’라고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간음인 것을 압니다.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죽이다가 중간에 , 잠깐! 이건 살인 죄인 것 같은데!’라고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죄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탐욕과 물질주의가 만연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기 문제가 아닌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아주 일반적인 거짓 신입니다. 돈에 마음을 빼앗기면 눈이 멀어서 눈앞에 벌어지는 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안과 욕심을 통해 돈은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리하여 삶 속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돈을 앞세우게 만듭니다.

 

 

3.   은혜로 받는 구원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3-4)

 

삭개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지만 사람들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의 키가 아주 작기는 했지만, 그가 길에서 사람들의 앞쪽에 설 수 없었던 더 큰 이유는 사람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금을 내야 할 때는 굽실거리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니까 슬쩍 막아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뜻밖의 행동을 했는데,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와 권리보다는 명예와 품위였습니다. 성인 남자가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엄청난 조롱거리가 될 일이었습니다. 특히 삭개오는 이미 멸시의 대상인 데다 키까지 작았기 때문에 최대한 체통 있게 처신하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각별히 조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랬던 것입니까? 3절 말씀대로 그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했습니다. 삭개오는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아주 필사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삭개오가 돈으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으니까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라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만나러 나갔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안 채워지니까, 그분을 보러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께 몰려온 여리고 사람들은 주로 점잖고 종교적인 사람들로서, 다들 자신이 창녀와 세리 같은 죄인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7)

 

삭개오 같은 세리나 창녀를 보며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저런 사람보다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 온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거기에서 말을 거신 사람은 종교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무리에서 가장 악명 높고 가장 악질인 죄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였으니까 정말 최악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주 도덕적인 무리가 보는 앞에서 이 최고 악질 죄인을 대화의 상대로만 아니라 식사 상대로까지 선택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5-6)

 

유대 문화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못마땅했지만, 예수님은 전혀 그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집이 아니라 그의 집으로 가겠다고 선택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다!” 그러자 삭개오는 기뻐서 그분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입니다.

 

삭개오는 이때 예수님께 다가가면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자신의 부나 체통을 내세우지 않고 삶의 지위를 내려놓았습니다. 또한 조롱까지 감수하면서 그분을 뵙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삶 속에 모셔들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당신의 삶으로 초청해 들이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백성들에게 터무니없는 일로 보였고, 그들이 알던 종교와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 자신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무리 중에서 가장 부도덕하고 가장 악질인 삭개오를 택하셔서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삭개오의 영적 관점은 그때부터 변했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도덕적인 성취나 행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죄인 중의 최고 죄인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자 그는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는데, 그러자면 돈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예사롭지 않은 약속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8)

 

먼저, 삭개오는 자기 소득의 50%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로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모세 율법에 규정된 십일조를 훨씬 웃도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삭개오가 지금 갑자기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다 알면서도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삭개오 정도 되는 사람이 조금 흥분했다고 이렇게 돈을 왕창 풀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 돈 하던 사람이 돈을 풀었다는 것은, 정말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부르시고 초청하실 때, 구원이 율법으로 오는 게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의 삶의 목표는 단지 율법을 따라서 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을 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억지로 최소한만 간신히 하는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고 싶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십일조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들이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십일조를 강조했고, 너무 강조를 해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십일조 무용론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기업이 없던 레위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을 위해 10%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십일조의 명백한 규정이 구약에는 나오지만, 신약에는 헌금, 특히 십일조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안 해도 되며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율법의 조항처럼 수입의 10%를 무조건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안 하니까 죄를 지었다고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라면, 정말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십일조를 해야 하나 안 해도 되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그렇게 십일조를 하라고 했는데, 왜 신약에는 십일조 규정이 명확히 나와 있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그걸 생각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많습니까, 적습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은혜의 빚을 더 졌습니까, 덜 졌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목숨과 피를 1/10만 주셨습니까, 다 주셨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는 율법 조항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려고 행하신 일을 우리보다 훨씬 덜 알았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그들보다 우리의 헌금 비율이 낮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떡해서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려고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신데, 우리는 어떡해서든 사랑의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덜 드리려고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며 애쓴다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바른 태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기준에 의해 스스로 잘 판단해보시고, 각자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삭개오의 두 번째 약속은 구제나 자비보다는 정의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속임수와 협박과 폭력으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과잉 징수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그와 관련된 조항도 나와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남에게 어떤 잘못이든지 저질러서 그 일로 주를 배신하였을 때에, 그런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본래의 값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 얹어서 갚아야 한다.” (5:6-7, )

 

율법 규정에 따르면, 남에게 잘못하여 피해를 입힌 사람은 원금에다 20%의 이자를 덧붙여서 피해자에게 갚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보다 훨씬 많게 착취 금액의 네 갑절이나갚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자로 따지면 무려 300%입니다. $1,000을 속여 빼앗았다면 원래 $1,200을 주면 되는데, $4,000을 갚겠다고 한 겁니다. $10,000을 속여 빼앗았다면 $12,000을 주면 되는데 $40,000을 갚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엄청난 겁니까? 이런 약속을 들으신 예수님이 뭐라고 답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9-10)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살면 구원이 이 집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은 이미 이 집에 이르렀습니다. 삭개오가 네 배로 갚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구원을 받았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변화된 삶의 결과로 오는 게 아닙니다. 변화된 삶은 구원의 결과이며,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삭개오의 마음과 삶이 새롭게 변화된 것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원이 도덕적인 규정을 준수하여 얻는 것이었다면 그의 질문은 얼마나 드려야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후하고 아낌없는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그의 질문은 얼마나 드려야 하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드릴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드려야 하나내가 가장 적게 드릴 수 있는 게 얼마인가를 따진 것이고, ‘주님께 얼마를 드릴 수 있을까내가 주님께 최대한 드릴 수 있는 게 얼마인가를 따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재정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파산 상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영적 부요를 값없이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최악의 죄인이었던 그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던 그가, 정의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희생하여 부를 축적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부를 희생하여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삭개오의 주인이 돈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주인이 돈이니까 착취했는데, 이제는 주인이 예수님이니까 돈이 그 밑으로 내려와서 예수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돈은 자기 자리를 찾아 갔고, 선을 행하며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안전과 평안의 근원이 되시니까, 이제 삭개오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재물에 대한 삭개오의 태도를 변화시켰습니다.

 

 

4.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

 

우상에도 두 종류가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표면적 우상(surface idol)’근원적 우상(deep idols)’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표면적 우상은 구체적이고 눈에 잘 보이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죄성은 뭔가를 간절히 바라게 만들어서 그것을 우상숭배로 변질시킵니다. 바로 그것이 근원적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대한 갈망이 강한 반면, 어떤 사람은 인정과 평가에 더 신경을 씁니다. 또한 무엇보다 정서적, 신체적 안락을 더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에 대한 컨트롤과 안전을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이 근원적 우상인 사람은 영향력만 얻을 수 있다면 인기를 잃는 것쯤은 상관없습니다. 반대로, 남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근원적 우상인 사람은 모든 사람의 호감을 살 수만 있다면 권력이나 컨트롤 같은 것은 기꺼이 내놓습니다.

 

표면적 우상은 근원적 우상이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통로입니다. , , 배우자, 자녀 등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우상의 구조를 피상적으로만 분석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돈은 더 깊은 충동을 채우기 위한 표면적 우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삶과 세상을 컨트롤하는 수단으로써 많은 돈을 원합니다. 그들은 대개 돈을 많이 쓰지 않고 아주 검소하게 살아가며, 전부 다 저축하고 투자해 둡니다. 그래야 세상이 철저히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맥을 쌓거나 미모와 매력을 가꾸려고 돈을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가꾸고 치장하는 일에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그런가 하면 돈에 딸려 오는 엄청난 권력으로 남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경우 각각의 사람이 다 돈이 표면적 우상인 경우이지만, 각 사람마다 근원적 우상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되는 행동 양식도 아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문제에서 돈이나 로맨스나 자녀와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표면적 우상을 보며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정도로 되는 게 아닙니다마음속의 근원적 우상이 처리되어야 우상숭배가 해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돈이 표면적 우상인 경우 근원적 우상이 뭔지를 봐야 합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뭘 이루고자 하는가? 그게 진짜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사랑을 얻어서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내 자녀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통해 내가 정말 비라는 게 무엇인가? 그걸 찾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께는 무한한 부가 있었으나 그분이 그 부를 버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이 부요하게 남아 계시면 우리는 가난하게 죽을 것입니다. 그분이 가난하게 죽으시면 우리는 부요해질 것이며,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단지 윤리적인 지침을 준 게 아닙니다. 돈을 그만 사랑하고 더 후해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을 제시했습니다.

 

 

[나가는 말]

 

엔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세계 최대의 갑부 중 하나였습니다. US Steel의 전신인 그의 제철소가 지상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사업체가 되었습니다. 그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카네기는 자기 내면을 냉정하게 돌아보며 나에게 쓰는 글이라는 비망록을 썼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상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부의 축적은 우상숭배 중에서도 최악에 속한다. 돈을 숭배하는 것보다 사람의 격을 더 떨어뜨리는 우상은 없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성품을 길러 줄 삶을 신중히 선택하려면 나는 매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나치게 긴 세월을 사업 걱정에 매달려 최단기간에 돈을 더 벌 생각 밖에 모른다면, 영영 회복될 가망조차 없이 저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서른다섯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이며 앞으로 2년 동안도 오후 시간은 꼭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책을 읽으며 보내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았던 카네기도 2년 후에 사업에서 손을 떼지 못했고, 우려했던 대로 성품의 격을 떨어뜨리는 결과가 그의 삶 속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카네기가 사실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2,059개의 도서관을 지었는데, 하지만 그의 소유인 제철소의 한 노동자는 인터뷰에서 많은 동료들을 대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바란 것은 도서관 건축이 아니라 임금 인상입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12시간 교대 근무를 했고, 제철소의 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신발 밑에 나무판을 못질해서 붙여야 했습니다. 2주 단위로 살인적인 24시간 근무를 하고도 딱 하루만 쉬었고, 사고나 질병으로 40대나 그 이전에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돈이 자기 마음속의 우상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몰랐습니다. 우상이란 없앨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몰랐습니다. 우상은 없애는 게 아니고 대체하는 겁니다.

 

부요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참으로 부요하게 하시려고 친히 가난해지신 주님이 우리 우상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실 때에만 우리는 우상숭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셔야만 내 마음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사모했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왕의 자리의 밑으로 내려가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돈도 배우자도 자녀도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평안과 안전을 누리며 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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