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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0일 수요예배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8 ✦
“은혜 없는 종교가 만드는 가짜 신”
(요나 4장 1~11절)
1. 부적합한 사명자
우리가 이 시대의 거짓 신들, 즉 우상에 대해 죽 살펴보고 있는데,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을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교리도 거짓 신의 지위로 올라가면 신앙 공동체 안에도 우상숭배가 널리 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에 있어 그분의 은혜에 의존하기보다 교리에 의존하면 그렇게 됩니다. 장로교회 같이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전통이 하나님의 위치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자기정당화에 빠진 사람의 경우는 잠언이 계속 말하는 대로 ‘거만한 자’가 됩니다. 거만한 자는 상대방에게 관대하기보다 늘 경멸하고 멸시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은혜로 구원을 받는 죄인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자기 견해가 옳다고 믿으며 우월감에 빠집니다. 자기가 틀린 것이 증명되어도 자기합리화를 하며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앙 공동체 내의 어떤 우상숭배는 사역의 결과를 가짜 신으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머리로는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라도, 가슴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이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종교적 우상숭배는 도덕적 생활 자체와 관계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도덕적 행위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내가 도덕적으로 살아왔으니까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나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심리입니다. 말은 안 해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안 알아주면 화가 나는 겁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말할지 몰라도, 그들은 여전히 구원에 있어서 자신의 노력과 도덕적 행위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교리나 사역의 성공이나 도덕적인 삶을 우상으로 삼으면 끝없는 내부적 갈등,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미움 등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종교적, 사회적 가짜 신이 개인적 우상을 부풀려서 독을 만들어내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예가 바로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어릴 때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많이 배운 이야기입니다. 요나가 물에 빠졌는데 고래가 와서 확 삼켜버렸다고 재미있게 배웠습니다. 그렇게 이것을 주일학교에서 배우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들여 구상된 우상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이 우상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나서는 극적인 긴장감이 감도는 이야기를 첫 문장에서부터 치밀하게 내놓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1:1-2)
니느웨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이며 중심지였습니다. 이 제국이 군사력으로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을 쳐부수려 위협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앗수르를 이롭게 만드는 행위는 곧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거기로 가서 그 성읍의 악을 향하여 외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애국심이 투철한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를 보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 14:25)
이 말씀에 보면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 여로보암 2세였는데,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는 요나가 시키는 대로 팽창주의 군사정책에 힘써 나라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같은 시대에 아모스와 호세아도 있었는데, 여로보암 왕실의 부패한 행정을 지적하며 날카롭게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왕이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적으로 강하게 하는 것을 오히려 격려하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선지자라면 북이스라엘의 대적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모스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가 아닌 민족주의자 요나를 이 일에 사용하신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보입니다.
사실 이런 일에 요나보다 더 부적합하고 부적격한 사람을 뽑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너무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주의자인데 왜 하필 그를 쓰십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 요나에게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2. 은혜를 가로막는 우상에 사로잡힌 선지자 (1~3장)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1:3)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일부러 거역하고, 대신 일어나 다시스로 갑니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쪽인데, 당시 알려진 세상의 가장 서쪽 끝에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과 정반대로 간 것입니다. 요나는 왜 그랬습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답은 역시 우상숭배인데, 이번에는 아주 복잡합니다.
먼저, 요나의 개인적 우상이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보다 자기 사역의 성공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런 요나를 만들어낸 사회적 우상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니느웨 사람들의 영적 유익보다 이스라엘의 국익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셋째로, 요나의 종교적 우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아주 옳다고 여겼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악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악한 이교도인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우월감을 느꼈고, 그렇게 악한 자들이 구원받는 게 싫었습니다.
요나의 개인적 우상과 사회적 우상이 한데 녹아 독소가 되어서 감쪽같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섬긴다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고 사명을 피하려고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사나운 풍랑이 배를 침몰시킬 듯 불어 옵니다(1:4-6). 아주 특별하게 강한 풍랑임을 느낀 선원들은 이런 재앙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고 제비를 뽑는데, 뽑힌 사람이 바로 요나입니다(1:7).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하나님으로부터 피해 도망하는 중이라고 밝히며,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면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1:9-12).
결국 선원들은 죽음이 두려워 요나의 말대로 그를 바다 속에 던졌고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졌습니다(1:15). 그때 하나님이 보내신 물고기가 그를 삼켜서 살려 내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예비하신 물고기였고, 덕분에 요나는 회복하고 회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2장에 보면, 요나는 물고기의 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개합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2:8-9)
여기서 요나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를 말하는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의 백성이야말로 바로 이렇게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들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 우상숭배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헤세드(hesed)’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 구원하시는 무조건적 은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성경에는 항상 ‘steadfast love’라고 나옵니다. 주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할 때 쓰이는 아주 유명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헤세드’를 버렸다고 요나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나 자신이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그 악한 자들에게조차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들이 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은혜를 안 베푸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은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어지는 선물이며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참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요나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2:9)라고 덧붙였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어느 특정 민족이나 계층에 속한 것이 아니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전혀 우리 쪽의 자격이나 공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도 몰랐던 것입니까? 답은 그의 우상숭배입니다. 요나는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조국을 열렬히 사랑했으며, 자기 종교를 자랑했습니다. 그것들이 합해져서 치명적인 우상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은혜를 필요로 하던 한 도시에 그 은혜를 베풀 마음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다 처참하게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배 속에서 요나는 자신이 지금껏 무엇을 놓쳤으며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에 왜 그토록 반감이 들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한 도시에 가서 은혜를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정작 요나 본인은 그 은혜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방 맞고 겸손해진 그는 조금씩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은혜이므로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고, 마침 그때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어 선지자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집니다.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명령하셨고, 이번에는 그가 순종했습니다. 요나가 거기서 말씀을 전하자, 놀랍게도 성읍 사람들이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도 이러면 좋겠습니다. 한마디만 해도 사람들이 다 오고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당시 역사적으로 보아도, 몇 가지 재앙이 니느웨에 일어났습니다. BC 763년 6월 15일에 완전 일식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신의 진노라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물고기 비린내 나는 사람이 와서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하라고 하실 때는 다 해놓으시고는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이제 회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도시는 ‘악한 길’에서 돌이켰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3:10)
니느웨 사람들이 개종해서 완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한 형벌을 거두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뜻은 멸망시키는 데 있지 않고 오직 구원하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뉴스에 보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 같은 사람들이나 무자비한 테러리스트들을 보면 하나님이 확 번갯불을 내리셔서 다 데려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악한 자들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데 있지 그들을 멸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3. 위기의 때를 통해 드러난 진짜 속마음 (4:1~9)
어떻게 보면 요나서는 여기서 그냥 끝나면 됩니다. 해피엔딩이 되는 겁니다. 3장 끝에 11절을 붙여 쓰면서 ‘이에 요나가 기뻐하며 이스라엘로 돌아가니라.’라는 구절 하나만 더 붙으면 이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짜 충격은 요나의 가장 큰 승리의 순간에 찾아옵니다. 요나는 자신의 선포에 니느웨 사람들이 놀랍게도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나온 것에 대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아주 격분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탓이라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1-3)
마침내 요나의 속마음이 다 드러납니다. 그가 따지는 말을 잘 보십시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 속히 용서하시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하시며 끝없이 인내하실 줄 내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할 분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처음에 제가 도망간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전해주면 그들이 회개하는 시늉만 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실까 봐 제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과는 끝입니다. 이제 선지자 자리를 내려놓고 사임하겠습니다. 그냥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성경 전체에서 이토록 불경하고 경악스러운 발언이 또 있습니까? 하나님께 이렇게 대든 사람이 또 있습니까? 요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여기서 요나의 우상이 탄로 났고, 앗수르를 혐오하는 그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요나는 앗수르 민족을 너무 증오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를 잘못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셔야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비난할 마음만 있었지,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받는 것도 싫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솔직히 요나 같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잘되면 열을 받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나는 이러고 있는데 저 악한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잘됩니까?’ 하면서 저주의 기도도 합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그래서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상숭배가 다시 고개를 쳐든 것입니다. 요나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아도 결코 빨리 변하거나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지하실에 쥐가 있는지 알려면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뭐가 있는지 알려면 상대가 깜짝 놀라도록 계단을 갑자기 빠르게 뛰어 내려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급하게 우르르 도망가는 작은 꼬리들이 보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진짜 모습도 편안할 때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겪을 때, 위기의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구주는 성공이나 재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으며 고백합니다. 또 사람들의 인정보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구주이시더라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은 다른 것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서 보듯이, 복음을 머리로 믿는 것과 마음 깊이 소화하여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변화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성경공부 시리즈는 다 ‘삶 공부’입니다. ‘생명의 삶’, ‘확신의 삶’, ‘새로운 삶’, ‘경건의 삶’ 등, 머리에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아직도 우상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우상숭배가 그의 생각을 뒤틀어 놓았습니다. 그가 늘어놓는 말을 보면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궤변입니다.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상사병에 걸린 야곱이 그토록 쉽게 라반에게 속을 수 있었던 이유나, 탐욕에 찌들었던 삭개오가 동포들과 조국을 쉽게 배신할 수 있었던 이유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상 때문에 눈이 멀어서 정상적인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우상에게 지배를 당하니까 생각 자체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우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 성공과 실패와 행복과 슬픔의 정의가 몽땅 변질됩니다. 우상의 기준에 따라 현실을 보는 눈이 바뀌어 버립니다.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긍휼은 누가 봐도 선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나라와 민족의 성공이 최고의 선이 되어 버리면, 거기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다 악이라고 보게 됩니다. 자기 눈이 바뀐 것인데, 그걸 모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막으셔도 하나님을 악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인 니느웨를 멸하지 않으신 것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셔서 그런 것인데, 우상 때문에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까지도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교회 다니는 신앙인도 똑같습니다. 가끔 뉴스에서 어떤 교회가 이랬다, 목사가 이랬다, 장로가 저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우리 중에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고 하지만 그럴 수가 있습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우상이 꽉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생각이 변질되어서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의 생각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뒤틀어 놓습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4:5-6)
요나는 자신이 증오하고 멸시하던 성읍을 떠나서 초막을 짓고 햇볕을 가립니다(5). 비록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이 뜻을 다시 돌이키셔서 니느웨를 멸하시지 않겠는가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속성으로 자라는 박 넝쿨로 요나의 초막에 서늘한 응달이 지게 해주십니다. 푸른 잎과 쾌적한 그늘은 낙담한 요나 선지자에게 큰 위안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그가 크게 기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의 삶에 작지만 새로운 실망을 안겨 주십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4:7-8)
요나를 보면 우리와 다른 게 없습니다. 막 격분하면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습니다. 생명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큰소리치다가, 박 넝쿨이 자라서 시원하고 좋으니까 크게 기뻐하다가, 그게 없어지니까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성질을 부립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우리와 너무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먹으니까 햇볕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여기도 여름에 해가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중동의 그 뜨거운 햇볕이 정말 따갑습니다. 또 이스라엘에 갔을 때 아직 한여름이 아닌데도 바람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그런 뜨거운 동풍이 불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니까 요나가 얼마나 힘든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화가 나면서 또 죽기를 구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펄펄 뛰는 그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4:9)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최고의 분노가 이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정당하다’고 대답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지, 요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분노 자체가 틀렸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불의에 대해서는 ‘진노’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분노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의 분노는 정당하지 못했고 균형을 잃었습니다. 우상숭배는 이처럼 우리 감정도 변질시킵니다. 우상숭배를 하니까 감정까지 이상해지는 겁니다.
또한 우상은 거짓된 신념을 갖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을 성취할 수 없다면 내 삶은 의미가 없어.’ ‘이것을 잃었으니 나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어.’ ‘이것에 실패했으니 다신 용서받을 수 없어.’ 이러한 거짓된 신념은 평범한 실망과 실패를 확대해서 삶 자체를 꺾어 버립니다.
그런 데서 오는 죄책감 때문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이야 알지만,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자기가 우상을 실망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정보다 우상의 인정이 더 중요합니다. 우상은 우리 삶 속에서 신처럼 행세합니다. 따라서 성공이나 다른 사람 특히 부모의 인정을 신으로 삼았다가 실패하면, 그 우상이 평생 마음속에서 자기를 저주한다고 느끼게 되며 패배감을 떨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늘 지적하듯이 우상숭배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우상숭배자는 자기를 위해서 만든 우상 때문에 인생을 망칩니다. 자기가 우상을 실망시킨 것 같으면 죄책감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우상이 위협을 받게 되면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해 무력해집니다. 또 우상이 지금의 환경 때문에 막히거나 없어지면 요나처럼 분노와 절망으로 몸부림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요나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왜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는 삶의 의욕도 잃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삶에서 의욕이 없다는 말은 삶의 의미를 잃어 버렸다는 말이 됩니다. 요나에게 삶의 의미란 바로 조국의 자유와 번영과 성공입니다. 그것을 바라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그게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나라의 번영이 더 위에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의 대적인 앗수르는 그를 깊은 증오와 분노로 들끓게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민족의 성공과 번영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 요나를 분노와 절망으로 들끓게 했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요나가 보기를 원하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막는 전능하신 장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장애물이 된 겁니다.
4. 나 대신 풍랑 속으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4:10-11)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요나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기보다는, 자기 몸이 햇볕에 타고 따가운 것을 더 속상해했습니다. 자기 조국과 도덕적 우월감을 우상처럼 사랑하느라, 니느웨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큰 도시들과 나라들에 대한 긍휼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온통 자기와 자기 나라 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다르셨습니다. 요나에게 주시는 교훈의 끝부분에 하나님은 일부러 요나와 자신을 비교하십니다. 그분이 요나에게 명령하신 일은 자신의 안전지대와 안락을 떠나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백성에게 가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고, 나중에도 가긴 갔는데 긍휼은 없었습니다. 언제 망하나 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이 성읍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는 긍휼히 여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약 760년 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자신이 참된 요나라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 12:39-41, 새)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최고의 안전지대를 버리고 오셨습니다.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해칠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려고 말씀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첫 요나는 죽었다고 여겨졌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요나이신 예수님을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의도적으로 요나의 이야기를 상기시켜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서운 풍랑이 일었는데, 예수님도 요나처럼 배 한가운데 잠들어 계십니다. 요나가 탔던 배의 선원들처럼 그분의 제자들도 겁에 질려 예수님을 깨우며 모두 죽게 생겼다고 말을 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풍랑이 잔잔해지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집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는 바람과 물의 풍랑 속에 내던져졌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최악의 풍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속에 내던져지셨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당할 모든 천벌을 주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상으로 힘들 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자진해서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순종하신 그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앉으셨기 때문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주셨기 때문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께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들, 심지어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요나서는 질문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과 같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 밖에 모르는 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이제부터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느냐?’ 아쉽게도 하나님의 이 질문에 대해 아무 답이 없이 요나서가 끝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나가 계속 성질을 부리며 하나님께 반항했을 것 같으십니까, 아니면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했을 것 같으십니까?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안 나오고 요나서가 그냥 끝이 나지만, 제가 확신하는 것은 요나가 분명히 회개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요나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마음을 파고들지 않고서야 그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순종하고 반항하고 성질이나 부리는 바보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기록하여 공개하겠습니까?
그래도 이 책에 요나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사랑의 책망이라는 화살을 요나의 심장에 겨누어 쏘셨는데, 돌연 그 자리에 요나는 사라지고 우리가 나타나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문은 요나뿐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요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상의 노예가 된 나머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 자기 가족이지만 사랑하기 몹시 힘든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니느웨처럼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 즉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먹고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내가 성공하고 우리 아이가 성공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재미있게 지낼까? 무엇이 내게 유리한가?’ 이런 데만 주로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비슷합니다. ‘무엇이 내게 유익인가?’ ‘어느 교회가 내게 유익을 주나?’ ‘어떻게 하면 우리끼리 즐겁게 지낼까?’
그래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제자훈련을 하고,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큐티 모임, 성가경연대회, 발표회 등을 합니다.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그런 좋은 것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명령보다 교회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 28:19-20, 새)
여기서 주동사는 ‘제자를 삼아라(만들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까? 혹시 다른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게 있습니까? 혹시 내가 ‘교회는 이게 제일 중요하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입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렇게 우상의 노예가 되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형편이나 안 믿는 VIP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 동안 VIP들에게만 관심을 너무 많이 쏟았으니까 그만 하고 이제는 믿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요나와 같은 궤변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만 추구하며 교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결국 결정과 판단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형적인 우상숭배자가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해야겠습니다. ‘나도 요나처럼 변화될 의향이 있는가?’ 그렇다면 참된 요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표적인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나의 참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입니다.
주님께 마음을 온전히 돌이키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만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