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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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7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13 ✦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18장 35~43절)
[들어가는 말: 잘못된 운명론에 관하여]
지금부터 30년 전인 1994년에 아프리카 중부의 작은 국가 르완다에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대학살이 벌어져서 1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인종 청소(Genocide)’라고 불렀습니다.
그 내전은 르완다에 엄청난 후유증을 안겨주었는데, 내전에 참전해서 처참한 살육 현장을 목격한 10대들이 정신질환을 많이 앓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어 거지로 길거리를 방황했습니다. 또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의 아픔을 잊기 위해, 어린아이들이 마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르완다 정부에서는 그렇게 길거리에서 배회하고 구걸하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재활 훈련을 시켰지만, 정작 정부가 가장 걱정한 것은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제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겨우 10대 아이들이 벌써 자기 인생의 절망을 한탄하는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 비극입니까?
소위 좋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소위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이라고 하고, 또 요즘 한국에 외국인들이 몇 년 전부터 많이 늘어났는데 그들은 한국에 올 때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을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내가 이전보다 잘살아 보겠다. 더 나은 환경에서 나은 삶을 살아 보겠다.’라는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내가 앞으로 미래에 무엇을 할까?’라는 꿈을 가진다는 것, 또 연세가 드신 분들도 ‘남은 노년을 어떻게 보낼까?’ 또는 ‘내 자녀 손들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게 얼마나 비극입니까?
실제로 얼마 전에 우리가 영어권 교역자를 찾을 때 후보로 왔었던 신학교 여학생이 있는데, 40대 초반 정도 되는 여성이었습니다. 카리브해의 어느 나라에서 왔다고 했는데, 원래는 르완다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르완다 인종 청소가 일어난 내전 때 도망가서 카리브해의 한 섬나라로 망명했다는 것입니다. 십대들이 그냥 살아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 소망이 없이 사는 것은 정말 큰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분이 읽으셨을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 책의 저자로 유명한 새들백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2005년부터 재단을 세워서 르완다를 도왔습니다. <목적이 끄는 삶> 책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팔렸는데, 거기서 들어온 수익이 엄청났습니다. 그것을 자기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재단을 설립해서 르완다 같은 나라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르완다 정부와 손을 잡고 그곳에서 PEACE Plan이라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변화될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때쯤 새들백교회에 다니던 제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교회의 설교 CD를 저에게 계속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었는데, 하루는 놀랍게도 르완다 대통령이 그 일개 교회에 와서 감사하다고 연설하는 것이 녹음 된 것을 듣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르완다라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의 한 교회에 와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을 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한 말 중에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암이나 심장병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절망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소망을 가지면 기회는 있습니다.
오늘이 종교개혁주일인데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소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박해를 받고 파문당하고 극심한 어려움 속에 있던 그가 한 말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소망이다.”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소망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절망하기도 하지만, 운명론 또는 숙명론이라는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꼭 절망의 순간에만 운명론이라는 증상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니 삶이 고단하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웃는 날보다 인상 쓰고 가슴 졸이는 날이 더 많을 때, 지금은 별문제가 없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내게 닥치지는 않을까 고민할 때 운명이나 숙명 탓을 하게 됩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소위 ‘팔자타령’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이런 팔자야. 이런 팔자로 태어났어.’라는 식으로 자꾸 합리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운명론이나 팔자타령이 은근히 스며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해주셨다.’라고 하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하고 믿음의 길을 벗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더 심각한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하며 그냥 숙명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판단으로 이미 모든 것이 다 설계되고 정해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뭘 해도 어차피 정해진 대로 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운명론이 아주 안 좋습니다.
실제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뭡니까? “인샬라”입니다. ‘알라의 뜻대로’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인샬라’, 나쁜 일이 있어도 ‘인샬라’라고 합니다. ‘모든 게 알라의 뜻대로 되는 거다.’라는 일종의 숙명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운명이 정말로 미리 다 정해졌다고 한다면, 로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탁탁 정해지고 우리는 그냥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하는 운명론은 절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것은 종교적 운명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 불어로 장 칼뱅)이 ‘예정론’을 이야기했는데 ‘모든 게 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하나님 뜻대로 되는 거니까 그냥 살면 된다.’라고 알고 있다면, 완전히 오해하는 겁니다. 칼뱅이 얘기한 예정론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이 보장되어 있다. 천국으로 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 우리 운명이 다 예정되어 있다고 얘기한 게 아닙니다.
소망을 버리는 것은 삶을 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소망을 가졌다는 말이 됩니다. 소망이 있으니까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비참한 현실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려니 하고 사는 사람들도 세상에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이 소망을 전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이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1. 이 맹인은 누구인가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5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여리고라는 도시로 들어가시는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18마일 정도 떨어진 도시로,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했을 때 여리고에 갔었는데, 여리고의 기억은 뭔가 황량하면서도 종려나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때 어느 큰 상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팔던 무화과나 대추(Date 데이트) 같은 것이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시식하면서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았지만 저는 별로 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먹어보라고 하니까 맛을 봤는데 아주 맛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겠냐?” 했지만 “잘 모르겠다.” 그랬더니 “이렇게 맛있는데 안 사겠냐? 또 먹어봐라.” 하지만 또 “모르겠다.”라고 하니 “이것도 먹어봐라.” 하며 또 주었고 저는 또다시 “모르겠다.”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너무 미안해서 결국 하나를 사긴 샀습니다. 여리고는 그런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리고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때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이 사건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이 기록된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두 명의 맹인이 나오고,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맹인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아들이라는 뜻의 ‘바’와 ‘디메오’로 되어 있는데, 즉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본명이 아니고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합니까? 한 명입니까, 두 명입니까?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신약학자들은, 원래 거기 두 명의 맹인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 즉 바디매오라는 맹인이 아주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와 대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 사람들이 많고 특히 맹인 거지 두 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인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아주 크게 소리를 외쳤던 것이고 다른 한 명은 그냥 옆에 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어떻든지 이 맹인이 왜 지금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습니까? 그 당시 사회에서 맹인이나 다른 장애인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구걸하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복잡한 길에 나와서 구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던 최고의 시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지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맹인은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본문에 많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원어를 연구해보면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아니라 삶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눈이 안 보이고 맹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41절에서 이 사람이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주여,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봤었는데 눈을 못 보게 되어 맹인이 되었고 이제 다시 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42절에서 “보라”라고 하시는데 이것도 “다시 보라”라는 말씀입니다. 또 43절에서도 “곧 보게 되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곧 다시 보게 되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가 눈이 보였는데 언젠가부터 어떤 사고로 그랬는지 못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한 좌절감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면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이 사람은 눈이 멀쩡했다가 갑자기 어떤 병이 생겼거나 어떤 사고로 인하여 눈이 안 보이게 된 겁니다. 그럼 얼마나 상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했겠습니까?
맹인이 된 것도 슬프고 괴로운데, 사람들이 자기의 가슴을 찌르는 말들을 마구 합니다. ‘아니, 이 거지 좀 봐. 아침부터 거지를 보니까, 그것도 맹인을 보니까 재수도 없네.’ 하며 침을 탁 뱉고 갑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멸시와 조롱을 받습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눈이 멀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벌을 받았으니까 저렇게 됐지.’라는 말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눈이 먼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더욱 괴롭습니다. 그는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지금은 여리고의 바쁜 길가에서 유월절 대목을 노리고 구걸하는 처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아무 소망 없이, 그저 어쩔 수 없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은 문제가 있고 가난하며 소외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자와 유명한 사람들도 소망 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소망과 꿈이 사라지니까 타락으로 가는 겁니다.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성적 음란 등, 소망이 없으니까 그리로 가는 겁니다. 소위 잘산다고 하는 부자 나라들의 자살율이 더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뭔가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특히 여기 젊은 청년들도 많은데, ‘내가 졸업하고 그다음에 이런 직장을 잡으리라. 내가 이런 학위를 받으리라.’ 이런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나가면, 그것을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게 이루어진 다음에는 삶의 목적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방탕한 길, 타락하는 길로 나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그런 사람은 소위 잘산다고 하는 나라에 많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어떤 영어권 집회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You are not living. You are just breathing.”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소망 없이 살아간다면 당신은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것이지, 진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강사가 크게 외쳤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냥 숨을 쉬고 있을 뿐이지, 진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일의 소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렇게 망가진 삶을 살지 않을 텐데. 그렇게 죽지 않을 텐데. 자기가 붙들 수 있는 뭔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견디어낼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한 길, 또는 죽음의 길로 가고 맙니다. 사도 바울도 원래 그렇게 헛된 것을 위해 살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했던 고백 중 빌립보서 1장에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1)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 내게 사는 것이 권력이니, 명예니, 학위니, 죽으면 안 되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 자기 삶에서 사라지게 되면 인생의 의미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망가집니다.
오래전인 지난 2001년 9.11 테러 사태로 인해 수많은 미국인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제 생각에 단일 주일로 따져서 미국 교회 출석률이 제일 높았던 때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와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조차 뭔가 붙들고 싶어서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때 비록 참 슬프고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 하나로 평소에 교회를 안 다니거나 아니면 떠나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중에 또 많은 사람들은 금방 도로 떠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들 다시 교회를 떠났지만, 그래도 그것을 계기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데, 벌써 2024년도 이제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990년대에는 정말 변화가 많았습니다. 이전 19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1990년대에 일어났습니다. 특히 그때 인터넷이 처음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정말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인터넷 속도는 제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느렸습니다. 혹시 그때 인터넷을 처음 시작하셨던 분들은 AOL이라고 기억하십니까? 요즘에도 aol.com 이메일을 쓰는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그때는 전화선을 사용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용하면 전화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랬는데 지금은 얼마나 빠릅니까?
1990년대에 그런 것이 시작되었고, 그 10년 동안 이루어진 변화가 그 전의 한 세기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습니다. 1990년대까지 1년마다 세상이 변한다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 2~3개월마다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3개월도 아니고 2~3주마다 세상이 변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제가 처음 우리 교회에 부임했을 때만 하더라도 “앞으로는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티브이를 보는 시대가 온답니다.”라고 하면 “그런 게 어딨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티브이를 보는 시대가 온답니다.”라고 하면 “무슨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나?”라고 합니다. 지금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어떤 방송국도 21세기가 되면서 새로운 표어를 내세웠는데 “디지털을 통한 휴머니즘”, 그리고 “High Tech, High Touch”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같이 변화가 심하고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일수록, 하이테크(high tech) 사회일수록, high touch 즉 고도의 감성 터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부모들이 가장 착각한 것 중 하나가 두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스마트폰 같은 것을 들고 어른보다 더 조작을 잘하는 것을 보면서 ‘와, 우리 애가 천재인가 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천재가 아니고 오히려 바보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 것을 어릴 때부터 많이 하면 감성이 죽습니다. 기계 같은 인간, 감정이 없는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21세기에 필요한 인재로 잘 자라지를 못합니다.
21세기일수록 감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감성과 남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런데 컴퓨터나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더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감동시켜줄 것을 찾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제일 이해하지 못한 것 중 하나가 뭐였냐 하면, 미국에 코미디 클럽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막 웃기는 얘기를 하는 것을 돈 주고 표를 사서 들어가 그 얘기를 들으며 웃고 나오는 겁니다. 마음이 공허하고 너무 메말라 있으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라도 자기가 한번 실컷 웃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요즘 보니까 한국에도 그런 것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감동시켜 줄 것, 자기의 감정을 터치해 줄 것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랍게도 목장이 바로 그런 곳인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는 사실 은혜를 받으려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물론 은혜를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는 의지적인 결단과 헌신이 중심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잘못 드린 예배입니다. 결단과 헌신이 없는 예배는 잘못 드린 예배입니다. 그냥 참석만 하고 돌아오는 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삶 공부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는 우리의 지성을 채워주는 부분입니다. 예배를 통해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고, 지성적 만족은 삶 공부를 통해 이루며, 목장에서는 감정을 터치하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장 모임 때 정보만 나누는 사람은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지난주에 이것을 했고, 이렇게 해서 결과가 이렇다. 끝.’ 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내가 힘들었다.’ 아니면 ‘그래서 너무 기뻤다.’ 또는 ‘너무 슬펐다.’ 이런 감정을 나눌 때 서로 공감하고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고, 또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 주는 감정의 터치가 이루어질 때, 이렇게 지정의의 터치가 다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을 해야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교회도 그렇게 해야 발전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감동을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감동을 주어야겠는데, 감동은 어떤 때 옵니까? 바른 말 한다고 감동이 오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잘못했을 때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해야 돼.’라고 하면, 그것을 당연히 알지만 거기에 감동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상합니다. 나도 아는데 아는 것을 자꾸 지적하고 잘못했다고 하니까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감동이 안 되는데 어떻게 변화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향해서 정죄하고 비난할 때, 정죄나 비난이 아니라 옳은 말을 해주는 것이라도, 회개하라고 했을 때 그 말에 즉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만져주고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며 같이 기도해 줄 때, ‘우리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갑시다.’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기도해 줄 때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즉, 마음이 열리게 되고, 그럴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운동 경기 같은 것을 보면 축구, 야구, 농구, 배구, 전부 다 굉장히 감동적인 장면들이 많습니다. 올림픽 같은 것을 보십시오. 감동적인 장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그런 운동 시합보다 감동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잘못을 용납해 주고, 품어주고, 또 바른길로 가도록 사랑으로 잘 이끌어 줄 때, 격려할 때, 용서할 때 감동이 있습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격려할 때가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죄인을 용서하고 끌어안을 때 감동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몸,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 이어서 하는 곳입니다.
감동을 기독교적인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게 바로 은혜의 체험입니다. 감격입니다.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하고, 감사하고, 변화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맹인의 믿음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2절)
예수님은 이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는데, 이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그 전에 혈루증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셨고, 이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먼저, 중요한 것을 붙들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6-37절)
지금 이 여리고의 맹인(마가복음에서는 바디매오)은 이날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지나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지금 그 유명한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지릅니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8절)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히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특히,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본 사람이 있는데, 그를 고쳐주신 소식을 이 맹인이 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외친 것입니다. 믿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데서 왜 그렇게 무리하게 소리를 지르겠습니까?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39절)
여기는 굉장히 순화되어 나와 있습니다. 꾸짖으면서 “잠잠하라”라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용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마구 욕하면서 “야, 이 더러운 거지야,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고 한 겁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물러가는 것이 정상일 텐데, 이 맹인은 오히려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도와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38절에 나오는 첫 번째 외침과 39절에서 더 크게 외쳤다고 나오는 두 번째 외침은 종류가 다릅니다. 38절에서 외치는 것은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보통 외침입니다. 그런데 39절에서 ‘더욱 심히 소리 질렀다’라는 것은, 마치 미친 사람이 발광하는 것처럼, 숨이 넘어갈 것처럼 절규하면서 외친 것입니다. 아무도 못 말리는 외침입니다.
혹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사람은 거의 넘어갈 정도로 소리를 지른 겁니다. 그러니까 시끄러우니 조용하라고 했던 사람들조차 움찔할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0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맹인이 첫 번째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을 때 그것을 예수님이 들으셨을까요, 못 들으셨을까요? 당연히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들으셨지만 시간도 없고,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러 가는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갈 길이 바빠 그냥 가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또는 이 맹인의 두 번째 외치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웠고 거의 발광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저러다 혹시 어떻게 될까 봐 어쩔 수 없이 멈추어 그를 데려오라고 부르셨던 겁니까? 조용히 하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더 시끄럽게 외친 것이 맹인을 구원한 믿음입니까?
조용히 하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더 시끄럽게 외친 것, 사람들이 ‘이 사람이 이러다 큰일나겠네.’라고 걱정할 정도로 시끄럽게 외친 것이 자기를 구원한 믿음입니까? 그게 진짜 자기를 구원한 믿음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됩니다. 발작과 발광 수준으로 ‘주여!’ 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너무 지금 신사적이고 숙녀적입니다. 너무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라면 마구 시끄럽게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알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사실 지금 모두 다 예수님을 붙들고 밀고 당기고 만졌습니다. 그런데 오직 그 여인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 맹인 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가 거기 있었을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이 맹인의 이야기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고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다른 사람들이 꾸짖고 조용히 하라고 하며 ‘지금 왜 이렇게 시끄럽냐? 지금 바쁘게 가시는데 왜 이렇게 방해하느냐?’라고 했을 때, 또 예수님이 아무 반응을 안 보이셨을 때 ‘그래, 뭐, 관두지.’ 하고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끈질김이 없다기보다는,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을 고치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정말로 믿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했다가, ‘상황이 안 되네. 그래, 저 예수가 아니더라도 다른 데 가서 도움을 얻으면 되지. 고침받으면 좋았지만, 지금 상황이 그게 아니니까 할 수 없지. 다음 기회를 노리지. 아니면 다른 데로 가보지.’ 이런 태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정말 신뢰하고 ‘이분만이 유일하게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이시다’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기를 고치실 수 있다면 어떻게 포기할 수 있습니까? 다른 데서는 못 고치고 예수님만 고치신다고 하면 여기 있어야지, 왜 다른 데를 가겠습니까? 에 다른 길은 없다고 느꼈다면 한두 번 외치다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유독 이 맹인은 그런 절박한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야단칠 때 ‘어이구, 죄송합니다. 알았습니다.’ 하고 물러간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이분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아주 절박하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이것은 혈기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오기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반항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고, 이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신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보기를 원하셨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그저 밑져야 본전 정도로 생각하고 ‘주님, 뭔가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좀 도와주시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한 믿음, 절박한 믿음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의 첫 번째 외침에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예수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신 것은, 차가운 거절의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참 믿음으로 나오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사람만이 아니고, 이 사람 저사람이 모두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 외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다리십니다. ‘진짜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 나오는 사람은 누구냐?’라고 하시며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 맹인만 진짜 믿음으로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 같이 여기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을 예배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안 도와주시는 게 아닙니다. ‘진짜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 구하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짜 믿음으로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관두지.’라거나 ‘아니면 말지.’ 하는 상황에서 이 맹인은 더 크게 소리지르며 나옴으로써 자기 믿음의 결단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어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방해가 아주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또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열심히 하려 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실제로 이전보다 더 많이 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고 더 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시나?’라는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주님께 나오는 것, 더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나오는 그것이 주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진짜 믿음입니다.
주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데 왜 방해가 생깁니까?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가지 말고 진짜 믿음의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 좀 도와달라고 하는 현세적 믿음 말고, 진짜 믿음,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진짜 믿음의 길로 들어서라.’라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왜 어려움이 생깁니까? ‘정말 네가 나를 신뢰하느냐? 정말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믿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보이라고 주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습니다.
이 맹인의 믿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주님은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1절)
이것이 무슨 질문입니까? 지금 맹인이 눈을 뜨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냥 고쳐주시면 되지 왜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십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 질문이 당연한 질문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주님, 제가 지금까지 너무 고생했습니다. 이젠 좀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마구 멸시하고 조롱하고 저주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우편에 저를 앉혀주셔서 그동안 저를 조롱한 것들을 그냥 다 때려눕히게 해주십시오.’ 얼마든지 이런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기도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간구를 참 많이 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야고보와 요한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막 10:36).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야고보와 요한이 와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십시오.”라고 해서 “무엇을 원하느냐?” 하셨더니, “한 명은 주님의 나라에서 오른편에, 한 명은 왼편에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즉, 2인자와 3인자를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이 맹인도 다른 것을 구할 수 있었는데, 자기는 “보기를 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42-43절)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한 게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사실은 영적인 맹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구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이기적인 야망을 구했습니다. 반면에 이 맹인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해서 그것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기도의 응답을 잘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기도했는데, 기도해도 안 되대.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대.’ 왜 그렇겠습니까?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하면 진짜로 주십니다. 그런데 필요한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거 아니면 조금 더 나가서 어떤 야망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여기에 이렇게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시력의 회복을 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자신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기 예배드리러 왔는데, 믿음이 없이는 이렇게 교회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여 주님께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정작 주님께 기도하며 구할 때 엉뚱한 것, 잘못된 것을 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비극입니다.
이 맹인이 부귀와 명예와 복수를 구한 것이 아니라 보기를 원했던 것처럼, 나에게 꼭 필요한 것, 가장 핵심적인 것을 구해야 하는데, 주변적인 것을 구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내 주인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이기적 기도 제목만 구할 때가 참 많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분별하여 구하는 바로 그것도 믿음입니다.
[나가는 말]
아까 우리가 부른 찬송가가 615장이었습니다. <그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곡의 작사자는 패니 크로스비(Fannie Crosby)입니다. 이분은 맹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주옥같은 곡들을 작사했는지 모릅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등 이분이 작사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찬송가 뒤에서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찾아보면, 이분이 몇 장, 몇 장, 몇 장을 작사했다고 나옵니다. 이분은 맹인이었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아름다운 영적인 눈을 떠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애를 극복하고 정말 엄청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역사학자 챨스 베어드(Charles A. Beard)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 너무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맷돌이 있나 없나 의심하게도 되지만, 하나님의 맷돌은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갈아서 결국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골라내고야 만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계획이 느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안 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선한 계획을 이루시며, 그 뜻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내 나름의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 기다리며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맹인처럼 답답함과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오히려 믿음으로 승화시켜 믿음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삶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해가 벌써 10개월이 거의 지나가는 이때 두 달 남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가 본문의 맹인과 같은 믿음, 정말 주님 아니면 안 된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응답받는 놀라운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