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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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1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5 ✦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라”
(누가복음 6장 6~11절)
[들어가는 말]
지난 2주 동안 진행되었던 2024 파리 올림픽이 오늘 폐회식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번에는 야구 종목이 없지만, 1988년 하계 올림픽 경기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야구가 시범 종목으로 처음 채택되었습니다. 그때 88 서울올림픽 야구 결승전에서 미국과 일본이 붙었는데, 미국 팀의 투수였던 선수가 짐 애보트(Jim Abbott)라는 선수입니다. 그의 역투에 힘입어 미국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짐 애보트는 바로 이곳에서 북쪽에 있는 미시간대학교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하나였고, 당시 올림픽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California Angels)에 지명되어 아주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짐 애보트 선수가 장애인의 몸으로 그렇게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선수의 오른손을 보십시오. 이 선수가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데 오른손이 거의 없습니다. 저런 손을 조막손이라고 부릅니다. 손이 마른 사람입니다. 애보트 선수가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지명되었다가, 나중에는 역대 최고 팀이라고 하는 뉴욕 양키스로 옮겼고, 거기서도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던지는데, 저 글러브를 잘 보시면 오른손잡이가 쓰는 글러브입니다. 왼손에 끼는 글러브인데, 그걸 오른손에 걸쳐 놓고 있습니다. 공을 던질 때 저렇게 왼손으로 던지고 공을 던지자마자 글러브를 재빨리 왼손에 낍니다. 그렇게 왼손으로 공을 던지고 빨리 옮겨서 왼손에 글러브를 끼고 공이 굴러오면 잡아서 재빨리 던지는, 참 놀라운 선수였습니다.
처음에 애보트 선수가 나왔을 때 상대 팀이 계속 번트를 해서 투수 앞으로 공을 굴렸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워낙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공을 잡아서 다 아웃을 시키니까 더 이상 그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장애가 있음에도 정상인보다 더 뛰어난 야구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냥 야구 선수도 아니고, 최고 수준의 야구 선수였습니다. 그는 운동선수로 치명적인 결점이 되는 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했던 것입니다.
사실 오른손에 글러브를 걸쳐 놓고 왼손으로 던진 다음 재빨리 왼손에 글러브를 끼고 공을 잡아서 또 왼손으로 던지는 게 말이 쉽지,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오. 제가 옛날에 한번 해봤습니다. 그런데 되지가 않습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초인간적인 훈련을 거듭한 끝에 그는 최고의 야구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짐 애보트 선수처럼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치유 받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납니다.
1. 두 종류의 다른 사람들 (6~7절)
1) 손 마른 사람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6절)
또 다른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한 손 마른 사람이 그 회당 안에 있습니다. 이런 손을 조막손(shriveled hand)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손이 마른 장애인인데, 그것도 오른손이 마른 사람입니다. 오른손은 보통 일을 하거나, 제스처를 쓰거나, 인사를 할 때 사용되는 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지저분한 일을 대개 왼손으로 했기 때문에, 왼손을 공중 앞에 내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뿐 아니라 인도 등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먹는 그런 나라들과 민족들이 있습니다. 저도 오래전 2010년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시골에 갔더니 실제로 사람들이 볶음밥을 해서 그것을 손으로 먹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거기서 자기를 보라면서 묘기까지 부렸습니다. 볶음밥을 손으로 네모나게 모양을 만들더니 그것을 먹는 개인기까지 부리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손으로 먹어보려 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볼 때 손으로 닦고 음식도 같은 손으로 먹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수저나 포크를 사용하는 것을 오히려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선교팀이 외국에서 왔는데, 시골 지역에 가서 보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막 손으로 먹는 겁니다.
특히 화장실에 갔다 오자마자 손으로 막 먹으니까 ‘왜 그렇게 비위생적으로 화장실 다녀온 손을 바로 음식 먹는 데에 사용하느냐? 수저나 포크를 사용해라.’라고 권유하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 손이 더럽다고 하느냐? 수저나 포크는 남의 입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내 손은 남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적이 없다. 그래서 더 깨끗하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말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사람은 당시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른손이 말라 있었기 때문에 사용할 수가 없었고, 할 수 없이 공중 앞에서도 자기 왼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신체적인 장애에다 항상 수치심이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많이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른손을 보통 뭐라고 불렀습니까? ‘바른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왼손은 틀린 손이란 말이 아닙니까?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할 만큼 오른쪽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오래전 시애틀에서 다른 교회에 다니던 장로님을 만났는데, 정말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은 오른손이 마른 분이셨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을 처음 봤습니다. 손가락만 약간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항상 악수할 때마다 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셨는데, 그걸 보면 그분은 장애에서 오는 수치심을 극복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열등감과 놀림 속에서 자라셨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손으로 악수하셨던, 참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손 마른 사람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껴 보십시오. ‘내가 이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신체상의 장애 때문에 그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그래도 장애인들이 우대와 돌봄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도 장애인 파킹이 따로 있고, 장애인 파킹이 없으면 안 되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혹시 장애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차별하게 되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가보니까 한국도 이런 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장애인들에게는 불편한 점이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애인 협회에서 시위도 벌이지 않습니까? 물론 방식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최소한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그만큼 불편과 어려움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항상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패럴림픽(Paralympics), 즉 장애인 올림픽이 시작됩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패럴림픽이 열렸는데, 그것이 티브이로 중계되니까 장애인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징그럽다고 시청자들이 엄청나게 항의해서 중계를 중단한 일이 있습니다.
게다가 불과 30년 전인 1990년대 초중반에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서 주부들이 집단 시위를 벌인 일이 있습니다. 혹시 그 시위에 참여했던 분이 여기는 안 계시길 바랍니다. 그때가 겨울이 아니었는데도 모두 모자를 꾹 눌러쓰고 흰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시위에 참여했는데, 장애인 학교가 자기네 동네에 들어와서 집값이 떨어지고 자녀 교육에 해롭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인 겁니다. 그들은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이라고 부르면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장애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다녔던 교회 목사님이 남서울은혜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시다 은퇴하신 홍정길 목사님이신데, 이분이 바로 그 문제의 일원동에 사람들이 시위하게 만든 밀알학교 설립자이십니다. 이번에 따님을 방문하러 오셔서 3주 전 설교해 주신 최종국 목사님이 바로 그 밀알학교를 세운 남서울은혜교회 부목사로 초창기부터 십여 년간 사역하신 분입니다.
당시 남서울은혜교회는 자기 건물이 없고, 모두 지어서 밀알학교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의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건물을 지어서 밀알학교 소유로 넘기고 그 학교 건물을 빌려 쓰는 형식으로 했습니다. 수련회 때는 장애인들의 아픔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 눈을 가리거나 휠체어에 타거나 팔을 쓰지 않으면서 몇 시간 동안 지내보는 훈련도 했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는 장애인들을 무시하거나 잘못 취급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그런 일은 더더욱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잠깐이면 되겠지.’ 하고 장애인 파킹에 주차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내가 잠깐 파킹했을 때 마침 올 수가 있는 겁니다. 언제 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정말 주의해야겠습니다.
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고 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섬기면서 또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야겠습니다. 또 그 가족들을 내 가족처럼 돌보고 위로하는 분위기가 있어야겠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그래도 이렇게 장애우들을 많이 위하지만, 1세기 유대 땅의 상황은 얼마나 열악했겠습니까? 이런 손 마른 사람과 같은 장애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공중 앞에 나오지도 않고, 자기 손에 대해 평생 수치와 열등감을 가진 채 살아왔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라는 분의 소문을 듣고 고침을 받기 위해 그분이 계신 회당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런데 이 회당 안에는 이 불쌍한 사람 외에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7절)
거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직 예수를 고소할 명분을 찾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당시 종파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중 그 종교의 파를 말하는 것이고, ‘서기관’이라는 것은 말씀을 기록하고 율법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직업을 말합니다. 많은 서기관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할 명분을 찾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예수가 안식일에 저 병자를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엿본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안식일에 관한 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 가는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만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막 사람이 죽어갈 때에만 병을 고칠 수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전에도 예수가 자기들의 안식일 법을 어김으로써 자신들을 화나게 했는데, 안식일인 오늘 손 마른 사람을 통해 예수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1~5절 사이를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들까지 쫓아다니면서 그걸 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안식일에 못할 일을 하느냐고 하면서 그랬던 사건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대해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렇게 논쟁을 벌이는 일들이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사건도 나오는 겁니다.
만일 예수가 이 사람을 고치면 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여 그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만일 고치지 않으면, 억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러 왔다고 선포하신 예수님 자신의 말로 꼬투리를 잡아 그의 가르침이 더 이상 무효라고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에 손 마른 사람을 향한 자비가 있습니까? 지금 이 사람이 손이 말라서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힘든 나날을 살아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손 마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얼마나 안타까운 형편인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이것을 통해 이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한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동안 종교적인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유대 종교 체제의 가장 정상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늘 만족하지 않으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높이 올라가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는 위치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서 종교적인 의복을 입고 나타나, 예수님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남들이 다 보는 시장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면 사람들이 전부 다 ‘저분은 정말 경건하다.’라고 하며 다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그것을 굉장히 즐기며 산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정말 기도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 가에 신경 쓰면서 기도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외식, 즉 위선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저 갈릴리 촌 동네인 나사렛이란 형편없는 동네에서 온 예수라는 가난한 청년이 자기들의 권위와 세력을 위협한다고 느낍니다. 그가 자기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자신들의 전통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상한 동시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그를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고 그를 고발할 거리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사람들 가운데 이 세상을 오직 경쟁의 구도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게 경쟁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성공과 명성만을 좇으며 살아갑니다. 언제나 앞만을 보며 살아갑니다. 옆에 뭐가 있든지 다 치워버리고 앞으로 가며, 자기를 막는 것들을 다 없애면서 나갑니다. 자기 목표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제거하려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겉모습이나 자기가 이룩한 것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과 돌봄을 주고받기보다는, 언제나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성공은 할지 몰라도 거기에 엄청난 상처가 있습니다. 자기도 상처받지만, 남들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입힙니다. 그들에게 삶이란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경쟁의 연속이라서, 남들을 짓밟지 않으면 자기가 짓밟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들의 삶 속에는 평안과 여유가 없이, 씁쓸함과 공허함과 피곤함만이 남게 됩니다. 그들은 위협이나 도전을 받는다고 느끼면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하면서 감히 자기를 건드린 사람을 공격하며 제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도서실에 가시면 이번에도 좋은 책들이 들어왔고 이미 있는 좋은 신앙 서적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몇 주에 한 권 정도는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나라가 일본인데, 사실 일본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진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굉장히 무시합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에 비해서 한국 사람들은 책을 정말 읽지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보다도 훨씬 책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잘났다고 합니다. 책은 남들보다 엄청 안 읽으면서 잘났다고 합니다. 책을 좀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신앙 서적 중에도 소위 ‘모던 클래식(Modern Classics)’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동안 굉장히 사랑받는 그런 책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라는 책도 있고, 또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아주 유명한 책도 우리 도서실에 다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라는 책입니다.
저의 페이스북(Facebook) 친구분이 있는데 그분은 집사님입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하신 분인데,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좋은 글들을 많이 써서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전에 있던 교회에서 이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책을 가지고 자기가 맡았던 청년부의 청년들과 함께 읽으면서 토론회를 했습니다. 자기가 강의와 발제도 하고, 또 서로 토론하는 것을 했는데, 지금은 새로 다른 곳으로 이사 와서 나가는 교회의 청년들을 대상으로도 곧 또 시작하려고 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책이 또 생각났습니다.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안 읽어보셨으면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책의 저자가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라는 목사님인데, 그렇게 여유 없이 사람들을 가리켜 그분은 그 책에서 ‘쫓겨 다니는 사람(driven people)’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해 쫓겨 다니고 항상 분주하고 정신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자기를 들들 볶으며 언제나 스스로 완벽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는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 즉 개인적 세계와 공적 세계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내가 있고,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심지어 가족도 모르는 나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배우자도 알지 못하는 그런 세계가 있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공적인 인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계속 그렇게 쫓기는 사람으로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외적인 부분에만 신경을 쓰고 내면에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되면, 언젠가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함몰 웅덩이 증후군(Sinkhole Syndrome)’입니다.
싱크홀을 아십니까? 플로리다 같은 데서 많이 생기고, 가끔 보면 한국에도 갑자기 싱크홀이 생겨서 무너져 내렸다거나, 또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들과 중남미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가끔 봅니다. 함몰 웅덩이라는 것은 가뭄으로 지하수가 고갈되어서 땅을 지탱할 힘을 잃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표면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그들의 시간과 힘을 사용합니다. 어떻게 하면 재산을 늘릴까 해서 열심히 돈 벌기 위해 일하고, 또 지위와 학벌과 경력과 인간관계와 건강과 미모 같은 데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거기에 몰두합니다. 그러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에만 모든 주의를 기울이며 산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세계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입니다. 잠언에도 마음을 가꾸라고 계속 말씀하는데, 여기에는 신경을 덜 쓰거나 아예 안 쓸 때, 우리 삶이 잘 나가다가도 갑자기 싱크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정신과에 환자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물론 이전보다 조금 더 오픈되게 생각해서 정신과에 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환자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이전에 비해서 그렇게 막 나가다가 갑자기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하지만, 자주 싱크홀 같은 붕괴의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무거운 책임들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유능하기는 하지만 지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내면세계를 돌보는 것을 무시한 채 공적인 세계에만 치중하는 삶을 살다 보면, 고갈되고 결국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 나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시는 것은 참 잘하시는 겁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안식>이라는 책에서 마르바 던(Marva Dawn)이라는 분이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고,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약간 말장난을 한 겁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켜라. 이걸 지켜라. 하나님 말씀을 지켜라.’라고 하니까 ‘뭐 이렇게 지킬 게 많냐?’라고 하지만, 하나님께 이렇게 예배하면서 그것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예배의 자리를 지켜라.’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고, 예배가 나를 지켜줍니다. 예배를 안 드리면 무너집니다. 여러분, 무너지고 싶으시면 예배를 안 드리시면 됩니다. 지금은 잘 나가는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그냥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싱크홀이 바로 생기게 됩니다.
특히 공적으로 많은 활동하며 겉으로 활발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굉장히 훌륭하다.’라고 하고, 특히 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면세계를 잘 가꾸지 않으면 언젠가 싱크홀이 생기며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내 내면세계의 질서를 잡기 위해 주님과 규칙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방에 가만히 앉아서 영상이라든지 요즘 발달한 스마트폰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혼자 가만히 앉아서 소통합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소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와 단절된 것이고, 전혀 자기 내면을 가꾸는 과정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을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도 봐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또 유튜브도 봐야 하고... 볼 게 너무 많고, 할 게 너무 많고,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싱크홀이 생기는 겁니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오래 할 것도 없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만 한 시간씩 큐티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루에 5분씩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운동도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몇 시간씩 하는 게 더 건강해집니까, 아니면 매일 꾸준히 10분, 20분을 꾸준히 하는 게 더 건강해집니까? 당연히 매일 꾸준히 하는 게 우리 몸에 더 좋습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하루에 몰아서 주일에만 모든 걸 다 하고 주중에는 그냥 알아서 산다고 해서는 영적으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기를 하루에 5분도 좋고 10분도 좋습니다. 5분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매일 꾸준히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잘 성장시키는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세계의 질서가 잡히고 모든 일에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스스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삶 공부를 하는 겁니다. 특히 <생명의 삶> 후에 <새로운 삶>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과의 교제, 말씀 묵상, 큐티, 기도의 시간을 훈련하고, 또 <경건의 삶>으로 가면 이것을 더 훈련하는 것입니다.
2. 안식일의 참된 의미 (8~11절)
1)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하는가, 악을 행해야 하는가?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8절)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 아십니다. 직접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에 앞서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9절)
두 가지 질문을 하시는데, 첫째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둘째로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키느냐가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안식일은 당연히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계명에는 그냥 안식일을 따로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나와 있습니다. 물론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또 남들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말씀이 나와 있긴 하지만, 안식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키냐를 위해서 바리새파와 그 조상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해 만들어 놓은 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면 잘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당장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해치려 하고 있고, 손이 말라 괴로워하는 이 사람을 돌아보기는커녕 안식일이라는 핑계로 그를 고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이고 죽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안식일뿐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크리스천으로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신앙생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뭔가를 안 하는 데 있는 게 아니고 뭔가를 하는 데 있습니다. 나쁜 것을 하면 안 된다는 데에 신앙생활의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선한 것을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금은 주일로 바뀌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복잡하니까 지금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그래서 <생명의 삶>과 <새로운 삶>에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날인 주일은 안식일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이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을 지키는 것인데, 주일에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은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정말 잘하시는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 예배 공동체로, 믿음 공동체로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배는 어디서나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함께 모여서 드려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가장 큰 계명의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 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의미가 거기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혼자만 예배드려도 된다면 혼자 집에서 하면 됩니다. 뭐 하러 같이 모이겠습니까? 그러나 같이 모이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예배에 잠깐 참석했다가 살짝 가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니고 주일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 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정말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섬김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섬기지 않는 경우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 되고 죽이는 것이 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수많은 믿지 않는 분들이 ‘나는 죄인이 아닌데 왜 교회에서 자꾸 죄인이라고 말하냐?’라고 합니까? 그것은 범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인, 강도, 강간,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남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남을 해코지한 적이 없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을 죽였나, 내가 누굴 때렸나, 남의 것을 도둑질했나? 나는 죄인이 아니다. 죄를 안 지었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면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 아닙니까? 명령을 안 지키면 죄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이 나쁜 일을 안 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는 전혀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했고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다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장 내 앞에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또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같이 사역할 때마다, 진정으로 다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그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참 잘하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또 형제자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지 안 하는지, 거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나쁜 짓을 안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나쁜 짓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뭘 하라고 하셨습니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2)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심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10-11절)
질문을 하신 후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두 둘러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며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안식일이 몇 시간 안 남았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입니다. 그럼 지금 이날이 토요일인데, 몇 시간만 있으면 해가 지고 안식일이 끝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몇 시간만 기다렸다가 이 사람을 고치시지, 왜 하필 지금 고치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안식일 전에 고치시거나, 남들이 안 보는 조용한 데에 가서 하시든지 그러면 되는데,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즉시 고쳐 주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것도 6절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신다고 되어 있는 대로, 가르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율법의 본질을 잘 아시고 이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 정신을 다 잊어버린 채 겉으로만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러므로 사람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지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수치와 열등감 속에 살면서 진정한 평화를 맛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안식일에 진정으로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의 손이 치유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모든 사람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8). 이 사람들 앞에 서라는 선언은 ‘너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존귀한 사람이다.’ 하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10). ‘지금 손이 이렇게 된 건 저주가 아니다. 부정한 게 아니다.’라고 지금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손을 내밀자마자 그동안 말라 있던 그의 오른손이 완전히 치유됩니다. 지금까지 그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겠습니까? 손이 조금 보이면 그 손을 치우라는 말만 들었지 손을 내밀라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죄인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저주받은 증거가 아니다. 그것이 네가 부정한 증거가 아니다.’라고 인정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손을 내미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눈이 자기를 향하는 가운데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아주 작고, 못 생기고,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그러한 오른손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굉장히 부끄럽고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마른 손을 내밉니다. 예수님을 정말 신뢰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분이라면 분명히 내 손을 고쳐 주실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주님이 초청하실 때 반응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적은 없습니다. 은혜가 없는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믿음으로 그 은혜의 하나님께 반응하느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거기에 우리 인간의 믿음의 반응이 합쳐질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의 반응이 합쳐질 때, 우리 삶에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이 은혜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것, 남들에게 드러내기 창피한 것이 있으십니까? 가족에게도, 심지어 배우자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숨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어떤 열등감의 문제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경제적인 부분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까?
그것이 정말로 해결 받기 원한다면, 바로 ‘그것을 내밀어라.’ 하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 앞에 우리 문제들을 내어놓을 때, 아무에게도 알려지기 싫은 것들과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 맡길 때, 주님은 그 크신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부탁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쉬쉬하고 숨기고 그래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쉬쉬하고 숨기면 결국 나중에 곪아 터지는 것을 제가 많이 봤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오픈해서 부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남들에게 다 내놓기 힘든 문제이고 주보에 공개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기가 힘든 일이라면 중보기도 카드에 적으십시오. 그래서 중보기도 팀이 있는 겁니다. 그럼 비밀을 지키고 거기서만 기도하고 끝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정말로 믿음의 표현이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나는 약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라고 인정하는 것도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면 주님이 필요 없고, 그렇게 되면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쉬쉬하며 덮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자기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또 즐겁지 않고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나가는 말]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을 만난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다 변화된 게 아닙니다. 첫째는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고 치유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더 악해졌습니다.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함을 받은 데 비해,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그를 송사하기 위해 노력하며, 심지어 기적을 본 뒤에는 더욱 분을 내며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의논하게 됩니다(11).
그들은 스스로 너무 의롭고 너무 강하고 심령이 너무 부유하고 또 너무 강퍅하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은 예수님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신뢰함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치유 받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마음이 상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약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주님밖에는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렇게 자신의 죄악과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여 주님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너무 잘하신 일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마음을 주님께 맡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를 품어 주고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품어 주시고 만져주시며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데, 기도와 말씀으로도 해주시고 또 이 믿음의 공동체의 사랑 가운데 그렇게 해주십니다. 또 우리가 이 사랑으로 서로를 품어 주면서 그 힘을 받고 나아가 상처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또한 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각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치유함을 먼저 받은 사람들로서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때, 놀라운 주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