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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3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11 ✦
주님을 정말로 따른다는 것은
(누가복음 9장 57~62절)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주는 것은, 예수가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는 것과 그분을 실제로 믿고 따르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자신부터가 중학교 때까지 그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렇게 저 같은 모태 신앙인일수록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안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은 적이 없고 교회를 안 다닌 적이 없으니까, 교회에 나가면 당연히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고 주인이시라고 당연히 믿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그래, 그래. 오케이. 그렇지, 그렇지.’ 하고 머리로 동의하는 것과, 진짜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런 분이시라고 알고 정말 믿고 따르는 데 있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특히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됐거나 처음 나오신 분들이야 상관없지만,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 어릴 때부터 다니신 분들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고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우리가 잘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단지 병 고치는 치료자나 단순한 선지자(예언자)로 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9장 18절에서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또 9장 20절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께서 메시아, 그리스도, 구세주이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릅니까? 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사실 같은 말입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때부터 자신이 크게 고난당하고 죽임당할 것이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진정한 제자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도 가르치셨습니다.
이전에는 무리들과 열두 제자 중 아무도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짐작은 했습니다. ‘이분이 그분이 아닐까?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 그런데 이제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이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가르치실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메시아에 대해 생각이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기 나와 있는 우리 중 열이면 열,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떤 분으로 믿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하며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 한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요구되는 참된 제자의 삶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1. 첫 번째 사람 (57~58절)
지난주에 본 것처럼 51절에서 예수님은 승천, 즉 하늘로 올라갈 때가 다가온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굳게 결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갈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가십니다. 그렇게 가시는 도중에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이상한 말을 한 것이고, 또한 예수님과 함께 가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7절)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 아닙니까? 이런 결단을 하다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와, 정말 훌륭하구나. 아주 좋은 결정을 내렸어.’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8절)
아니, 무슨 대답이 이렇습니까?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하면 칭찬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 제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하면 ‘야, 정말 훌륭하다. 그래, 따라와라.’라고 하시는 게 정상일 텐데, 그렇게 말한 그의 열정에 지금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신 게 아닙니까?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나오면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김새게(?) 만드는 데 있어 전문가이십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알고, 거기 도착하시면 자기들은 압제하는 로마제국 정부를 뒤엎고 왕이 되셔서 독립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잘 보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상황입니다.
그 때문에 46절을 보면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고 서로 싸웠습니다. 왜 지금 제자들이 누가 크냐 하고 싸우겠습니까? 순위와 서열을 정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2인자가 될 사람이 누구냐?’라고 하니까 ‘나다.’라고 합니다. ‘왜 너냐?’ ‘내가 돈이 제일 많다.’ 그러자 다음 사람이 말합니다. ‘아니다, 나다.’ ‘왜 너냐?’ ‘내가 제일 똑똑하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아니다, 나다.’ ‘왜 너냐?’ ‘내가 수제자다.’ 이런 식으로 지금 다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나이가 제일 많다. 그러니 내가 그다음이다.’ 그러자 ‘아니다. 내가 제일 젊으니까 젊은 열정으로 내가 해야 한다.’ 이러며 지금 싸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권력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지, 이들이 아주 믿음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항상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이 제일 문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정말 훌륭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치고 나온 것은, 물론 자기가 이제는 그렇게 믿어서 그런 것이지만,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가 선수를 친 겁니다. ‘내가 2인자 될 자격이 충분하죠? 주님, 제가 이 정도입니다.’ 하는 마음으로 치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그 고백을 했을 때 그것이 못마땅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그다음 20장에 보면 자기들의 엄마까지 데려옵니다. 마가복음에는 엄마를 데려왔다고 나오지 않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엄마까지 데려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이 예수님께 오는데 그중 그들의 엄마가 말하는 것이 나옵니다.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가 바로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그들의 엄마를 별로 신경 안 썼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엄마를 신경 쓰고 기록했습니다. 왜냐?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마태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마가는 열두 제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당시 그 자리에 있으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 있었는데 ‘어, 쟤네는 엄마까지 데려다가 막 청탁하네?’ 하며 엄청나게 열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엄마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사람이 나와서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예수라는 분이 어디를 가든지 계속해서 따라다닌다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때 분명히 좋은 자리 하나를 차지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말해 놓으면 한 자리를 보장해 주시겠지.’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대신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 그러니? 그러나 내게는 쉴 곳이 없다. 네가 나를 따라오더라도 편안하고 높은 자리를 보장해 줄 수가 없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니?”라고 물어보시는 겁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 “어? 그래. 그런데 나는 저기 쓰레기장에 바퀴벌레가 들끓는 곳 같은 데서밖에 못 자. 그래도 따라오겠니?”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는 스승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집이 없으셨습니까? 사실은 나사렛 출신으로 그곳에 집이 있으셨습니다. 거기서 목수로 일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편안하고 안락하게 쉴 수 있는 집을 떠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시점입니다.
왜 예수님이 집을 떠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또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이전에도 예루살렘에 몇 번 왔다 갔다 하셨지만, 이제는 정말 때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가십니다. 십자가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 사역하시다가 이제 마침내 마지막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사람이 와서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럼 네가 죽음의 길까지도 따라오겠느냐?”라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너도 나처럼 집이 없이도 나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겠느냐? 편안한 삶이 보장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죽음의 길일지라도 너는 나를 따를 마음이 정말로 있느냐?” 그것을 지금 물어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도 나처럼 살겠느냐? 나처럼 되기를 선택할 마음이 정말로 있느냐? 어디를 가든지 따르겠다고 말하기 전에, 너의 집, 네가 편안하게 느끼는 그곳을 떠날 수 있겠느냐? 내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견디며 따르겠느냐?”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사실 열두 제자가 다 형편없었지만 나중에 성령 받고 변화되어서 실제로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도, 다 그 죽음의 길과 고난의 길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결국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정말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 외에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성공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까? 유명해지기 위함입니까?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함입니까? 부자가 되기 위함입니까? 우리 가운데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생각하는 안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나쁜 게 아닙니다. 다 좋은 것들이지만, 우리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이 추구하는 전부라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편안한 삶을 살고 부자가 되고, 이런 게 삶의 목표라면 우리 인생에는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왜 이렇게 교회에서 모여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부흥사들 중에서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그 말 자체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하늘 복’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며 서로 축복하며 인사하는데, 진심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각자가 제사장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조금 어색하니까 “하늘 복 많이...”라고 하며 금방 1초 만에 끝내시는데, 그러지 마시고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며 정말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시면서 매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정말 하늘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할 때의 그 복이 물질적인 복이나 세상의 성공을 말한다면, 돈 많이 벌고 높이 올라가는 그런 복은 못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를 따라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세상에서의 성공 이상의 더 중요한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아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은 길어야 몇십 년, 정말 길어야 100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우리를 영원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길이의 시간입니다. 50년, 60년, 100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기간인데, 그럼 그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더 중요한 그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가치를 환산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사람이 누군가 하면 솔로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었던 솔로몬, 그에게 아내가 몇 명이었습니까? 1,000명입니다(왕상 11:3). 아마 아내가 누군지 잘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여자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모두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데려오고 저 나라에서 데려오는 식으로, 후궁과 첩을 다 해서 천 명입니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돈을 싸 들고 왔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어떤 좋은 강의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 프로그램 하나에 등록비가 몇천 달러씩 합니다. 또 어떤 유명한 갑부와 식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몇만 달러씩 내고 식사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옛날에 그것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이 돈을 싸 들고 옵니다. 그의 이야기 한마디를 듣겠다고 와서 지혜의 말을 해달라고 하여 쭉 말해줍니다. 그런 것들을 기록한 것이 잠언이고 또 전도서입니다.
그런데 특히 전도서에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이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졌고, 부귀영화, 최고의 권력, 또 돈이면 돈, 여자면 여자, 다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사실 조금 얄밉습니다. ‘내가 다 해보니까 헛되다.’ 이게 결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라는 게 결론입니다. 솔로몬이 우상숭배도 하고 엇나가기도 했지만, 마지막 노년에 그가 전도서를 쓰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을 보면,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린 것 같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의 결론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헛되다. 하나님을 잘 섬겨라. 창조주를 기억하라.’ 이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결론을 내립니까? 왜 그토록 찬란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가질 것은 다 가져보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리며 최고를 모두 경험한 그가, 왜 전부 다 헛되다고 결론을 내립니까?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각자가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들보다 더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나 자신이 이 세상의 좋다는 것들과 억만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습니다.
요즘에도 인신매매가 계속되고 있는데, 장기 하나에 얼마, 사람 하나에 얼마, 이런 식으로 가치를 매깁니다. 그 가격이 그렇게 싼 건 아니라도, 사실 형편없는 가격입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가격을 매길 수가 있습니까? 우리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가진 돈과 재산과 부동산을 다 합쳐도 그것보다 귀한 존재가 나 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므로 나의 목표는 나보다 시시한 것을 갖는 게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자꾸 나보다 시시한 것을 가지려고 그것을 위해 머리 터지게 싸우고 노력하고 그럽니까? 그런 것들을 갖는 게 아니라 나보다 귀한 존재를 갖는 것이 내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보다 시시한 것을 가지니까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겁니다.
나보다 귀한 존재이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존귀하신 분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귀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붙들면 우리도 그렇게 존귀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귀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나보다 시시한 것들을 자꾸 붙들려고 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은 자신의 편안함을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의 성공에는 관심조차 없으셨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면서 유일하게 추구하신 일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사람들을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셨으면, 인류 역사상 솔로몬보다 더 부유한 사람,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그분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시시한 것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기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것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의 수단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런 것들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좋은 것들인데, 그러나 우리 각자보다 시시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진짜 존귀한 목적을 위해서 살아갈 때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면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런데 오직 ‘나, 내 것, 내 가족’만 찾고 그저 ‘나, 나, 나, 나’ 하면서 사니까 헛되고 헛된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향해 결코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자신과 같게 되기를 원하셨고 지금도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길을 따르기 위해 애쓰며 나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상관없이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세상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참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래전 제가 읽었던 베스트셀러 중 밥 버포드(Bob Buford)가 쓴 <하프타임(Half Tim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에 모시면 엄청난 성공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도 않고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인생의 진정한 의미라는 더 만족스러운 물을 잔에 부어 넣음으로 성공이라는 갈증을 잠재우게 된다.”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삶의 갈증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헛되다고 하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며, 참으로 풍성한 삶입니다. 주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이야말로 복된 삶입니다. 그러한 삶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만족함과 시원함과 평안이 자리 잡게 됩니다.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쁨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다.’가 아니라 ‘감사하다. 감사하다.’가 됩니다.
2. 두 번째 사람 (59~60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59절)
58절과 59절 사이에는 굉장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58절 말씀을 하시고 나자, 거기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해야 하나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래서 그는 ‘과연 이 예수를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 머리 둘 곳도 없으면 어떡하나? 나는 뭔가 한자리를 할까 해서 따랐는데, 아무것도 얻는 게 없으면 따라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고 지목해서 부르신 겁니다.
그러자 그는 뭐라고 합니까? 먼저 가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가족, 특히 자기 부모님을 장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가족,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당연히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정말 장례를 치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려는 핑계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이 사람은 지금 이때까지는 이미 장례를 마쳤어야 했습니다. 마치고 여기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보통 사람이 죽으면 세상을 떠난 당일에 장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데 소식이 와서 ‘지금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소식을 지금 받았다면, 그는 여기 예수님 옆에 계속 있을 것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를 장사하는 그 장소에 가야 했습니다. 지금 계속 여기 있을 게 아닙니다. 소식을 들었으면 바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가 이제 아버지를 장사하러 가겠다고 하는 이 말은 뭡니까? 예수님을 따르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죽음 소식이 와서 그것을 듣고 ‘제가 가봐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더라도 장사를 치르는 일보다 예수님을 따라가서 한자리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서 따라온 사람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한자리를 확보하겠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가 혹시 이미 돌아가셨어도 버리고 온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장사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하게 하고 자기는 그냥 왔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더 이상 별 볼 일 없는 것 같으니, 이제는 빨리 예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겠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는 얄팍한 수를 쓰는 겁니다. 간을 보다가 떠나려고 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이미 돌아가셨든지 아니면 지금 막 돌아가셨든지, 이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자기의 야심을 이루어보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닌 것 같으니까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별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핑계를 대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0절)
여기서 예수님은 지금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자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부모를 무시하고 따르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진심으로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성공만을 원하는 그의 생각을 다 파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어설픈 핑계를 대며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기적인 야망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인 욕망과 성공에 집착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야심은 다 죽은 자들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구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갑니다. 헛된 길인 줄 모르고 갑니다. 그래서 결론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삶이 꼬이고 복잡해지는 겁니다. 이 세상의 길은 넓어 보이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아 보이니까 넓은 길을 택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시간도 물질도 에너지도 손해 보는 것이 많은 것 같으니까 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열심히 하면 뭔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으니까 적당히 합니다. 그것이 헛된 길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때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따르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것을 따라가면서 또 핑계 대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핑곗거리가 많습니다. 해야 하는 이유보다 안 해야 하는 이유가 많아서 수백 가지입니다.
유명한 리더십 강사 중에 스티브 챈들러(Steve Chandler)라는 사람이 있는데,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중 <성공을 가로막는 13가지 거짓말>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삶에 해당하지만, 우리 신앙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1)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2) 인맥이 있어야 뭘 하지.
3)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겠어?
4) 왜 나에겐 걱정거리만 생기지?
5) 이런 것도 못하다니, 난 실패자야.
6) 사실 난 용기가 없어.
7) 사람들이 날 화나게 해. (사람들 탓이라는 것입니다.)
8) 오랜 습관이라 버리기 어려워.
9)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10) 맨정신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이야. (환경 탓을 합니다.)
11)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그러니 나는 가만히 있겠어.
12) 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
13) 상황이 협조를 안 해줘.
못하겠다는 핑계가 참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혹시 이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주님을 잘 따르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보다 다른 것을 따르도록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가? 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가?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가?’ 이것을 꼭 한번 물어보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안 되면 뭐가 됩니까? 결론은 ‘헛되고 헛되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즉,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실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사람 (61~62절)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1절)
이 세 번째 사람은 아주 영리합니다. 예수님이 앞서 두 사람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여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시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냅니다. 첫 번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면 무엇이 진짜 하고 싶은 말입니까?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말이 진짜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 사람은 두 번째 사람처럼 먼저 가서 자기 가족과 작별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계속 머리를 굴리고 간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몸은 지금 이곳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습니다. ‘여기서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별것 없다. 그럼 지금 나에게 유리한 데가 어딘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먼저 하겠다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핑계입니다. 이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뭐가 없는지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62절)
그를 가리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러면 밭을 가는 게 삐뚤빼뚤 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우리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현대식으로 바꾸어 봤습니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운전하는 자는 도로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핸드폰 보면서 요즘에 운전하다가 비틀비틀 가는 차들이 많습니다. 선을 넘어오는 차들도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왜 저래?’ 하며 이렇게 보면 뭔가를 보고 있습니다.
오하이오 도로법에 의하면,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불법인데 그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저도 늘 불법을 저지르고 있고, 여러분도 항상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기만 해도 불법입니다. 보는 건 더더욱 불법입니다. 왜냐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손에 전화기를 들고 보면서 운전하면 자기는 안 그럴 것 같아도 차가 삐뚤삐뚤 갑니다. 선을 넘기도 하고, 잘못하면 앞에 있는 차에 부닥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요즘 사고 난 것을 종종 봤는데, 전화기로 딴짓하며 ‘괜찮겠지’ 하고 가다가 거리를 조정하지 못하고 쾅 부딪치는 겁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과도 같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께로 정해져 있지 않고 다른 데 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삶 속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그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최우선을 둬야 하는데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순간, 우리의 삶은 삐뚤어지기 시작하고 아주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고, 그런 삶의 결론은 역시 ‘헛되고 헛되다.’가 되고 맙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반은 예수님을 따르고 반은 다른 것을 따르는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50% 이상 따르니 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에게 “여보,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해. 그런데 미스 김도 사랑하고, 미스 박도 사랑하고 미스 리도 사랑해.”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또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 그런데 미스터 김도 사랑하고 미스터 박도 사랑해.”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조금 전 부른 찬양곡 중에 “주를 위해 살리, 주를 따라가리, 주를 예배하리”라고 했는데, 그다음 가사가 “주만 위해 살리, 주만 따라가리, 주만 예배하리”입니다. 즉, 처음에는 ‘주님을 믿겠습니다.’ 하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믿고 나아가면 결국 주만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헛된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런 식으로 따르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고 헛된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자녀도, 일터도, 그 외의 모든 것도 다 책임져 주십니다. 내가 내 삶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결과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자녀를 내 마음대로 컨트롤하는 게 가능합니까? 되지 않습니다. 또 이것이 분명히 내 몸인데 내 몸도 내가 컨트롤하지 못합니다. 내 머리카락이 희어지는데 희어지지 말고 검은색을 유지하라고 명령해도 제 머리카락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 머리카락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너무나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컨트롤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끌고 간다는 말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겠다고 나서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계획도, 내 소망도 다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한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기를 의지하며 살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게 됩니다.
청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40대 이상 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10월 2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오늘이 10월 13일인데, 다음 주 월요일인 21일이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30주년 되는 날입니다. 1994년 10월 21일 한국 서울의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그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청년들은 이게 뭔가 한번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리가 무너지기 직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보였습니다.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서울 시민들에게 중요한 다리였습니다. 수많은 차와 버스와 트럭들이 그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왜 무너졌습니까? 기초가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리는 믿고 건널 수가 없습니다. 다리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인명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께 최고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서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고 나가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으로 만나고, 이렇게 형제자매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이러한 일에 우리가 투자하고 노력하는 것이 기본을 튼튼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참된 제자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도 따르고 다른 것도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님만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붙들면 그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자꾸 다른 데를 따라가겠습니까? ‘거의’ 다 따랐다고 하는 것도 전부 따르는 게 아닙니다. 매일 이 주님과 동행하며 참된 제자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