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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1일 주일예배

예수와의 만남 6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람

(누가복음 71~10)

 

[들어가는 말]

 

오래전 제가 우리 교회에 오기 직전에 부목사로 사역했던 교회에는 사찰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세탁소 사업도 하시면서 교회 일도 파트타임으로 하셨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새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교 졸업반 12학년이었던 막내아들이 학교가 끝나면 교회로 와서 아버지를 도와 함께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제가 할 일이 있어서 혼자 남아 일을 하는데, 제 사무실 근처에서 어떤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뭔가 하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별로 신경을 안 쓰고 계속 할 일을 했는데, 일을 다 끝내고 나가 보니까 바로 그 사찰 집사님의 막내아들이 와서 본당 청소를 혼자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겁니다.

 

왜 혼자 여기서 일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씩 웃으면서 허리가 아프신 아빠를 대신하여 자기가 왔다고 말하면서 계속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허리가 안 좋으신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오래 가니까, 막내는 계속해서 아무 불평도 없이 자기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신 나와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이도 어린 학생이 아프신 자기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일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이 와서 도왔어도 귀하다고 느꼈을 텐데 어린 학생이 와서 그렇게 돕는 것, 그것도 웃으며 돕는 것을 보며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 막내아들은 미국 해병대에 지원하여(Marines) 이라크 전쟁에도 1년 다녀왔고, 나중에는 그 아들 덕분에 집사님 가정이 새로 집도 사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을 최근에 놀라게 하며 감동을 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 적이 있으십니까?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일을 조용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감동하시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직접 대면한 적도 없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큰 믿음 때문에 자기가 구하던 것에 대해 응답받게 됩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있던 한 백부장입니다.

 

 

1.   백부장의 성품

 

1)  자기 종을 사랑한 사람

 

1세기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로마 백부장(Centurion)마다 100인대를 지휘했는데, 실제로는 100명이 아니라 60명에서 80명 정도의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백부장들은 로마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고, 군인들을 훈련하는 일을 맡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1-2)

 

제가 안식월을 다녀온 게 벌써 9년이 되었는데, 그때 이스라엘을 처음 가봤습니다. 그중 가버나움에도 갔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영어로 “Capharnum, the Town of Jesus”라고 써놨습니다. 그 정도로 크리스천들이 많이 와서 관광 수입을 많이 올리게 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교이면서도 친절하게 그렇게 안내까지 해 놓았습니다.

 

한 백부장이 거기 있는데, 이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이 종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이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종들, 즉 노예들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나 동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이 죽더라도 그것은 말 한 마리가 죽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아끼던 말이 죽으면 손해가 되고 마음도 조금 슬프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종이 죽으면 손해이고 슬프겠지만 그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지금 죽어가는 자기의 종을 단지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종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손해를 보기 싫으니까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 종이 살아나기를 원했습니다.

 

 

2)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은 사람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에게 있어서 놀라운 점이 또 있습니다. 그가 로마를 대적하던 현지인인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3~5)

 

1세기 당시 유대인 장로들은 로마 사람들을 미워했는데, 특히 자기들을 직접적으로 압제하며 폭력을 사용하는 로마 군인들을 아주 증오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일제 강점기를 사셨을 텐데, 그때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증오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영화에 나오는 로마 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부드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하게 식민지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현지인으로서 로마의 압제를 받는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이 백부장을 예수님 앞에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백부장의 월급이 다른 군인들보다 훨씬 높았지만, 그가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아주 큰 희생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건물이나 집을 지어주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할 의무가 전혀 없고, 그 돈으로 얼마든지 자기를 위해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유대인들의 호감과 존경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땅에는 로마 군인들이 많았고 그중 백부장들도 많았으며, 천부장들도 있고 더 높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독 이 사람만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이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서 자기 대신 자기 종을 치유해 주시도록 부탁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유대인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자기들을 압제하는 로마 제국 백부장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만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백부장이 부탁해서 왔지만, 사실은 억지로 오거나 벌 줄까 봐 무서워서 온 게 아니라 자기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 백부장의 말이라면 우리가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자기들이 자원해서 예수님께 그를 위해 종을 치유해달라고 요청하러 왔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위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와 그 사람 사이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진실한 사랑과 친절은 가장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음도 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불편하고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가 있을 때, 그것은 이처럼 진실한 사랑과 친절로 서로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됩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에 있으십니까? 우리가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에 있을 때 이렇게 같은 교회라든지, 학교라든지, 회사라든지, 또는 사업체라든지 항상 자주 봐야 하는 그런 사람인데 굉장히 불편하다면 먼저 다가가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아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사랑으로 다가가 친철을 베푼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 기도하고 나갈 때 놀랍게도 관계가 풀리는 것을 봅니다. 기도하고 나갈 때 놀랍게도 내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기도를 안 하신 겁니다. 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기도하고 나아가서 사랑으로 친절하게 대해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그리고 막 칭찬해 보십시오. 아부가 아니라 정말 칭찬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나를 미워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미워한다면 내가 베푼 사랑과 친절이 나에게 돌아온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한다면 다른 데서 누가 나를 욕해도 오히려 나를 방어해 줄 것입니다.

 

이번에 LA에 갔을 때 이틀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로 굉장히 분주하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LA 코리아타운의 시민 아파트에서 사셨고 저희는 이번에 거기 머물면서 일을 봤는데, 그 유명한 웨스턴 애버뉴(Western Ave)가 바로 그 근처에 있습니다. 웨스턴이 왜 유명하냐 하면, 벌써 30년도 넘은 1992LA 폭동이 바로 거기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길은 큰길이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로 왔다 갔다 했는데, 거기에 한국 사업체들도 아주 많고 한국 간판들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웨스턴 애버뉴를 중심으로 LA 폭동이 일어났고, 그때 거기 있던 한국 상점들이 전부 다 초토화됐습니다. 총 맞고 습격당하고 난리가 났던 데가 바로 거기입니다. 물론 지금은 아주 깨끗해지고 심지어 거기에 한국 몰도 새로 생겨서 한국의 알라딘 중고 서점도 들어오는 등, 아주 번화하고 큰길입니다.

 

그런데 그때 모든 한국인 소유의 가게들이 파괴될 때 몇몇 가게들은 오히려 거기 살던 흑인들이 보호해주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 와중에 몇몇 흑인들이 나와서 여긴 아니다.”라고 하며 보호해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평소에 이 주인들이 자기들에게 너무 잘해줬고, 자기들을 사랑과 친절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여기는 절대 부수면 안 된다. 약탈하면 안 된다.”라고 하며 오히려 지켜주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기독교 윤리학 과목을 들으면서 마지막 과제로 무엇을 쓸까 하다가 LA 폭동에 대해 자세히 찾아보고 페이퍼를 써냈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갑자기 그러는 게 아니라 평소에 사랑과 친절을 베풀며 나가는 것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내가 시간을 내고 돈을 사용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고, 특히 우리가 목장을 오픈해서 자기 집에서 모이며 다른 사람을 자꾸 초대하고, 또 믿지 않는 VIP 분들도 자꾸 초대해서 먹이고 그러면 당연히 돈이 들어가고 시간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게 손해입니까?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옵니다. 참 놀라운 일들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  겸손하여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높이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그가 직접 나가서 예수님께 구하지 않고 대신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것은 그가 거만하거나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예수님처럼 위대한 분 앞에 나올 만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장로들의 부탁으로 자기 집을 향해 거의 다 오셨을 즈음에, 또다시 사람들을 보내는데, 이번엔 친구들을 보내서 말을 전합니다.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6~7a)

 

집 근처까지 오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말도록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음이 나빠서 문전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예수님 같은 분을 맞이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가 로마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자기 집에 부정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부정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음식에 있어서는 유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부정한 것들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먹지 못하는 것들과 신상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괜히 예수님께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예수님께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기 집에 거의 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둘러보다가, 유대인들의 율법이 생각나서 거기 걸리는 것들이 많은 것을 보고 급히 친구들을 보내 유대인에게 부정한 이방인인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않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급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철저히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 로마 백부장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 수만 있다면 우리 인간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가족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할 때, 내 가정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부부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자기 생각, 자기 방식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그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할 때,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내가 원하는 방식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다른 형제자매의 유익이 무엇일까를 먼저 추구할 때, 우리 교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또 사회 속에서도, 직장이든 사업체이든 학교이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산다면 이 세상은 우리 때문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나 한 사람 때문에 내 삶도 변화되고 내 주변도 변화되고 사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비행기를 타고 오는 길에 한 영화를 봤는데, <One Life>라는 영화였고, 유명한 영국 배우인 앤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가 주연이었습니다. 그 내용 설명을 좀 보다가 흥미가 생겨서 영화 전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니콜라스 윈튼(Nicholas Winton)은 영국인으로서, 사실은 할아버지 때 독일에서 이민 온 가정인데 조상이 유대인인 유대인 출신의 영국인입니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전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쉰들러라는 사람이 많은 유대인들을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가는 것을 막고 구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가면 거기 쉰들러의 나무(Schilndler’s Tree)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니콜라스 윈튼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우연찮게 방문을 갔다가 그곳 난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았는데, 특히 아이들이 너무 고통스럽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런 것을 보고서 무려 유대인 어린이 669명을 기차에 태워서 영국으로 수송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그들을 탈출시킨 겁니다.

 

나치 치하에서 몰래 하느라 굉장히 힘들었는데, 물론 합법적으로 증서를 받아 영국에서 초청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때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어린이들을 기차를 태워 탈출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증서가 있는데 아직 타지 못한 아이를 발견하고는 이 아이도 타야 하는데 못 탔다고 했더니 옆에서 함께 돕던 영국 여성이 그에게 너무 거기에 마음 쓰지 마세요. 당신이 모든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라고 하면서 위로해 줬습니다.

 

그 한 사람의 열정이 놀라운데, 물론 그의 어머니도 돕고, 또 주변에 몇몇 사람도 열심히 생명을 걸고 도와서 669명이나 되는 유대계 체코슬로바키아 어린이들을 영국으로 탈출시킨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의 열정, 그 한 사람의 노력 때문에 거의 700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가 80대가 되어서 옛날 자기가 만들어 놓았던 그 어린이들의 사진이 있는 증서를 모아 놓은 스크랩북을 자기 책상 속에서 발견합니다. 가방 속에 넣어놓은 것을 오랜만에 발견하고 이 아이들이 다 어떻게 됐나 궁금해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방송국으로 연결이 되어서 거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방송에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방송 바로 몇 분 전에 도착하여 빨리 와서 여기 앉으라고 했는데, 자기가 앉은 자리의 바로 옆에 있던 여성이 그 어린이들 중 한 명이었던 겁니다. 바로 며칠 전에 사진을 보면서 이 아이가 어떻게 됐나 하던 그 아이가 바로 옆에 60대 여성이 되어 앉아 있었고, 나중에는 자기 집에까지 아이들과 손녀 손자들까지 데려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참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서로 막 울고 너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이것을 조직적으로 진행해서 우리가 살아난 것 같은데 그게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첫 번째 방송이 나간 것을 보고 알았다는 겁니다. 방송을 보고 아주 많은 사람이 방송국으로 연락을 했고, 두 번째 방송 때는 청중들이 꽉 차게 앉아 있는데, 그 청중들 대다수가 그 바로 그때 구출된 어린이들이 자란 어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때 느낀 것은, 히틀러의 나치가 전쟁을 일으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저렇게 망가뜨리고 부술 권리가 도대체 누구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도 전쟁을 일으키고 폭격하고 죽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큰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오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그 한 사람의 노력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고, 정말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나 혼자 잘해서 뭐가 되겠어?’라고 하신다면 착각입니다. 나 혼자만 잘해도 뭐가 됩니다. 세상이 변합니다. 많은 사람을 이렇게 살릴 수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잘하지 않기 때문에 살리지 못하는 것이지, 나 한 사람이 제대로 살면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자기 앞가림부터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내가 감기 걸린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의 팔이 부러진 고통보다도 더 크게 느껴진다.” 팔이 부러지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내가 감기에 걸린 게 더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이고, 나는 나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볼 때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도 잘되고 남도 잘되는 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놀랍게도 자기도 안 되고 남도 안 되는 편을 택한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소위 물귀신 작전입니다. “너 죽고 나 살자또는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은 있어도, “너 살고 나 살자라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희극작가인 우마 봄베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날씬하게 하실 수 없거든 제 친구들을 뚱뚱하게 해주세요.” 물론 농담이겠지만, 이 세상 사람들의 심리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결코 그런 원리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기 전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마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너 살고 나 살자.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면 너 살고 나 죽자.”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실 동안 철저히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분의 본을 따라 우리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2:3-5, 새번역)

 

진정한 능력과 권위는 물리적인 힘이나 사회적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은, 진정한 권위는 희생과 겸손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아들이 사춘기를 지나고 십대가 되면서 키가 커지면 엄마보다 더 많이 커집니다. 힘도 더 세집니다. 그런데 왜 엄마에게 순종합니까? 엄마는 자기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태어나게 해준 그 자체가 벌써 희생입니다. 그래서 아빠 말은 좀 안 듣는데, 엄마 말은 그래도 듣습니다. 또 엄마를 더 케어합니다.

 

진정한 리더십도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겸손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만일 강도가 여기 총을 가지고 들어와 위협하며 꼼짝 말라고 할 때, 우리는 모두 강도가 든 총 때문에 무서워서 그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우리 리더이며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렇게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이 결코 낭만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주 어려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참한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면 아주 불리하고, 손해 볼 수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조롱받고 핀잔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부활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살게 될 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게 될 것이고 감동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변화시킨 예수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기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희생하는 사람의 말에 파워가 있습니다. 자기 것을 챙긴다고 착착 움직이는 것이 약은 것 같고 똑똑한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압니다, 저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그런데 오히려 묵묵히 다른 사람을 챙기고 희생하는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입니다.

 

자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어떻습니까? 굉장히 피곤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힘이 됩니다. 비록 힘들어도 희생과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백부장의 믿음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위대한 것은, 그가 물리적인 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겸손했다는 점입니다. 자기의 권력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그것도 식민지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대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가난한 일개 유대 나라 선생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말이 됩니까? 역사적으로도 로마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나타낸 경우가 드문 사람들입니다. 특히 자신들의 식민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보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겸손보다 더욱 위대한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예수님도 깜짝 놀라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9)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내가 깜놀했다.’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너무 깜짝 놀랐어.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을 수 있냐? 이스라엘 중에서도 못 봤는데, 이방인인 이 로마 사람이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 하며 깜짝 놀라셨습니다. 어떻게 이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백부장의 믿음은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아픔과 고난을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는 평안히 살고 싶다. 아무 고통도 없이 살고 싶다.’라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까?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픔과 고난을 통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백부장은 죽어가는 자기 종을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종이 아픈 것이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종이 아파서 힘들어하며 죽어 가는데 그것을 보는 것 자체가 정말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아끼는 물건이 깨지고 없어지거나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면 얼마나 마음이 안 좋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아픔과 고통 때문에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지방을 정찰하던 자기 부하들에게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에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으로서 그는 자족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부장입니다. 수하에 최소 60명 이상의 부하들을 거느린 백부장입니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권력도 있었고 돈도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유대인들도 섬기면서 존경도 받고, 상당히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아파서 죽어 가는 자기 종을 고치실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다가 믿게 된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가, 아니 오히려 대적하다가 믿게 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분들 중 상당수가 그 변화의 원인이 고통과 어려움이었다는 겁니다. 고난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고 녹아내릴 때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험은 자존심 상하거나 창피하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히려 복입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의 체험을 하고 나서 말씀의 씨가 뿌려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나오는 네 가지 토양의 비유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뿐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는 본래 있던 모습 그대로 있는 땅이지만, 좋은 땅은 일구어진 땅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좋은 땅이란 갈아지고 흙이 뒤집어 엎어진 땅입니다. , 곡괭이, 호미, 쟁기 등으로 막 깨고 부수고 갈아엎는 과정을 거친 땅이란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거기서 불필요한 것들은 다 제거되고 결국 옥토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은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겪은 땅이 아니겠습니까? 고난을 겪기를 원하지 않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뿐이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땅만이 열매 맺는 좋은 땅이 됩니다.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저절로 좋은 땅은 없습니다. 다 갈아엎은 땅들입니다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서는 좋은 땅이 될 수 없습니다. 파헤치고 찔리고 갈아엎는 아픔을 겪고 나서야 옥토가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첫 세 땅, 즉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는 습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옥토에는 습기가 있어서 결실합니다.

 

우리도 습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뭡니까?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뿌려야 열매가 맺힙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이 결코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거친 후에 30, 60, 100배의 결실을 하는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이 백부장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위의 법칙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7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7b-8)

 

군대 장교로서 그는 명령의 권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관이 자기에게 명령하면 그대로 해야 하고, 자기도 부하에게 지시하면 그대로 움직이듯이, 예수님도 명령만 하시면 예수님 권위 아래 있는 질병이 물러갈 것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오실 필요도 없고, 직접 보실 필요도 없고, 그저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동시에 아주 굳건하고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도 놀라시게 만든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나온 믿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10)

 

 

[나가는 말]

 

오늘 예배에 참석하고 계신 여러분은 각자 다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오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배하러 오신 분, 또 믿어 보려고 오신 분, 또는 습관적으로 그냥 주일이니까 당연히 교회 가야지 하고 오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지금 어려움을 당해서 교회에 나가볼까 해서 나온 분이 계십니까? 오게 되었다고 창피하게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이렇게 문제가 생겨야 교회를 나오니까 창피하다.’라고 느끼는 분이 혹시 계신다면,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수치스럽거나 창피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며 돌보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삶 속에서 아픔과 고난을 겪으면 당연히 힘들지만, 그것은 우리 삶에 가치 있는 손님이며 선생님이라는 좋은 말을 이전에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가치 있다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가르쳐주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손님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이라 함은, 수준이 올라갈 때마다 다른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가서 졸업하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로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또 대학으로 갑니다. 이렇게 다음 단계 학교로 올라감에 있어서 이전 학교 선생님들이 같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두고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순간으로부터 필요한 교훈을 얻으면 그 교훈이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두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겁니다.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나서 더 높은 수준의 것을 배우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고난과 아픔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사실 정말 불행한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고통스럽거나 고난당하는 것? 그게 아닙니다. 풍요로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소위 잘산다고 하는 부자 나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풍요롭고 자연도 얼마나 잘해놓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자살률입니다. 그렇게 부자 나라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풍요롭다고 곧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생의 고통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고난도 허락하셔서 우리를 빚으시고 더욱 주님을 향해 나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시며, 우리가 당신께 마음을 열고 당신을 전심으로 찾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완벽한 믿음을 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온 것입니다. 믿음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흐르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 내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머무는 게 아닙니다. 머물면 썩습니다. 내 안에만 있으면 썩어 버립니다. 그래서 은혜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한 일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밖으로 흘려 내보냈습니다. 그럴 때 그의 믿음을 통해 그의 종이 치유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 나의 믿음을 통해 나 자신이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하고, 그것이 흘러나가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은혜의 강물에 흠뻑 젖게 하는, 그런 놀라운 삶을 우리 모두가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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