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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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omRDjI9ZuUE?si=BZ47E7iLioTvUGiz&t=116
2024년 10월 20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12 ✦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누가복음 18장 18~27절)
[들어가는 말]
월급이 아주 적은 가난한 청년이 부잣집 딸을 따라다니다가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 여자의 아버지는 빈털터리 주제에 자기 딸과 사귀는 것에 화를 내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내 딸을 지금 내가 해주는 것처럼 호강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 월급으로는 이 아이의 한 끼 식사비도 안 되고, 이 아이의 화장실 휴지값도 안 돼!”
그러자 그 청년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버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몰랐던 사실을 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그렇게 밥을 많이 먹고 화장실을 많이 가는 여자와는 더 이상 사귈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은 돈 없이 살 수 있으십니까?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무인도에 떨어지거나 동굴에 들어가 살지 않고 사회에서 사는 한 돈이 필요합니다.
사실 돈이 있으면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과 협력하며 지원하는 것도 돈이 필요하고, 이번에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나 작년이나 이전에 재난당한 사람을 돕는 것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고, 그 외에 여러 사역들을 하는 것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헌금하여 그것을 모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 바로 교회 재정입니다.
성경에서는 돈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돈이 좋다고도 하지 않고 나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돈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돈에 대해 수많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돈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되어 자기만을 위해서 돈을 사용하게 될 때 돈이 그 사람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제대로 됐다는 사람보다 인생이 망가진 사람 이야기를 더 많이 듣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가수 중에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있습니다. 아마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고, 혐오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천재적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어릴 때부터 독보적이고 천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잭슨에게 돈이 없었다면 그 인생이 그렇게 망가지고 그리 안타깝게 죽었겠습니까?
며칠 전 라디오를 들으면서 가는데 가창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여자 가수의 노래가 나왔습니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얼마나 노래를 잘하고 또 노래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녀도 또 안타깝게 죽었습니다. 돈이 없었다면 그렇게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 죽지 않았을 텐데, 돈이 너무 많으니까 오히려 인생이 망가지는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형제간에도 돈 때문에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봅니다. 재벌가들을 보십시오. 형제들끼리 싸우며 지분을 더 많이 차지해서 자기가 회장이 되겠다고 그렇게 싸우지 않습니까?
오래전 미국의 유에스데이 투데이(USA Today)를 비롯하여 여러 매체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인가를 질문했더니, 일반적인 사람들은 1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 정도를 가지면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100만 달러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200만 달러 이상은 있어야 부자가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만 달러를 가진 사람은 400~500만 달러는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없었을 때는 어떻습니까? ‘나한테 만 달러만 있으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생기면 ‘10만 달러만 있으면...’이라고 하고, 그게 생기면 또 ‘100만 달러만 있으면...’이라고 합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이고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100만 달러가 있으면 엄청난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것을 이루고 보니까 ‘나는 부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부자라고 느끼면서 만족하고 기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감사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조금 더, 조금 더.’ 이렇게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에게 온 관리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한 부자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소위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절)
여기를 보면 그는 관리(ruler)였습니다. 사회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뒤(23절)에 보면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그는 청년이었고,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그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젊은 나이에 유대 사회에서 아주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젊은데 높은 직책인 관리직에 있고 또 돈까지 많은, 아주 흔치 않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돈만 많고 지위만 높은 사람이 아니라 아주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19-21절)
예수님이 계명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십계명의 뒷부분 내용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 계명들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합니다. 대단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식으로 말하면, 그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주일학교와 유스그룹을 매주 빠지지 않고 나가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성경 구절 암송 대회를 하면 항상 1등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 사이에 인기 있는 리더였고,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팔방미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학부는 하버드를 나오고, 석사는 프린스턴에서 받고, 박사는 예일 대학교에서 받고, 그 후에도 승승장구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완벽한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젊은 청년입니다. 중매쟁이들이 1순위에 올려놓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직 젊은데도 이미 많은 것들을 성취한, 아주 대단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성공하면 교만할 만한데 영적, 종교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은 이 청년 부자 관리를 볼 때마다 남자아이를 둔 집안이라면 그를 가리키며 ‘너도 저 형처럼 되어야 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수많은 명문가 출신의 아름다운 미녀들이 그와 결혼하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젊은 나이에 그렇게 성공한 그가 예수님께 와서 심각한 질문을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 이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못 얻은 사람입니까? 못 얻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렇게 계명을 다 지키고, 아주 올바른 삶을 살고, 너무 착하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비어 있다는 겁니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지만 내가 아무래도 영생을 얻은 것 같지 않아.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가서 예수님께 물어본 것입니다.
아니, 아무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이 왜 예수님께 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2. 이 관리의 세 가지 문제
오늘 말씀을 살펴볼 때, 이 관리에게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 그는 너무 잘난 것이 많아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가진 게 많아서 자기를 신뢰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의 사람은 때때로 아주 남을 귀찮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잘났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 기준을 따라오지 못하면 못 견딥니다. ‘아니, 왜 이런 걸 못 할까?’라고 합니다.
또 항상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기를 주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주목하는 것을 또 견디지 못합니다. ‘아니, 내가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왜 저 사람이 주목받지? 내가 훨씬 더 나은데.’ 그렇게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쏠려야 하는데, 혹시라도 비슷한 사람이 주변에 있어서 사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그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신앙 성장에 아주 치명적인 방해 요소가 됩니다. 이 관리처럼 실력 있고 돈 많고 잘난 사람이 흔하겠습니까? 젊은 나이에 이렇게 성공하고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흔하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완벽하고 열심이 대단했던 이 사람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좋은 것들 때문에 그의 안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관원은 너무 잘났기 때문에 자기를 신뢰해서 그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로 꽉 찼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라는 노래 가사도 있는 것처럼, 자기로 꽉 차서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저번에 살펴보았던 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 5장 첫 부분에 나오는 것이 소위 팔복입니다. 그 팔복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뭡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예수님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첫 교훈으로 그 말씀을 괜히 하신 게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완전히 파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제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상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심령, 상한 심령, 완전히 파산한 상태라고 인정하게 되면, 놀랍게도 바로 그때 나를 만지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하다가 파산한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파산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이전에 잘 나갈 때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옵니다. 그런데 내가 망하면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곁에서 싹 사라지고 전화해도 받지 않습니다.
정치인들도 그렇다고 합니다. 자기가 권력이 있고 잘 나갈 때는 옆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붙는데, 권력이 없어지면 아무도 찾지 않고 오히려 푸대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뉴스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망한 집에 사람들이 와서 빨간 딱지를 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빚쟁이들이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인간은 다 파산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파산한 상태입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자기 머리를 당겨도 어떻게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꺼내 주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이제 자신의 도움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나오는 마음 상태를 예수님은 가난한 심령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번에도 불렀지만,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입니다. 내가 주인 노릇하는 것.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고, 내가 알아서 하고, 내 맘대로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만, 뭔가 결정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결정합니다.
그 반대로 나간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원하는 것을 간절히 구하신 다음, 즉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십자가를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인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긴 믿지만 그냥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것이 자기가 주인인 삶이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사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이 젊은 관리는 가난한 심령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가 너무 강했습니다. 자기애가 너무 강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이룬 업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세상에서 뭔가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어떤 업적을 남기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돈을 열심히 벌어서 재산을 더 늘리고, 집이 커지고, 좋은 차를 타고, 은행에 돈을 꽉꽉 넣어놓고, 투자를 많이 하고,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우리 가문이 고상한 가문이 되고, 나도 공부 잘해서 학위를 받고, 남들보다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우리 아이들도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그렇게 명문가가 되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혹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빨리 포기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이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좋은 것들이고 훌륭한 것들입니다. 보통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이루겠습니까? 대단한 노력을 했기 때문에, 또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그런 것들이 많아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전혀 보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하는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이지, 좋은 결과 때문에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선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 보시기에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이 관리를 보십시오. 남들 보기에 정말 성공한 사람, 다 이룬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볼 때 ‘젊은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잘 나갈까?’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지금 질문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뻥 비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채워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난 괜찮은 사람이지. 이 정도면 나는 참 선하게 살고 있지.’라고 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상한 심령,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번에 “재난 지원 헌금을 합시다.”라고 하는 광고를 들으실 때 처음 탁 드는 생각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또 해?’라는 생각이었습니까? ‘뭘 또 하나? 작년에도 하고, 그전에도 했는데.’ 아니면 ‘어, 그렇지, 도와야지.’였습니까? 아마 대부분 ‘그래, 나도 도와야지.’라는 마음이 드셨을 겁니다. 그러면 얼마를 할까를 어떻게 정하십니까? 이 헌금을 얼마나 할까를 정하는 제일 좋은 것은, 자기가 기도하면서 형편에 맞게 하면 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꼭 이번뿐 아니라 이런 특별헌금을 하게 될 때, 교회 형편이나 우리 집 형편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하는데 ‘다들 보통 이 정도를 하니까 나도 이 정도를 하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두 배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두 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누르고 ‘원래 하던 대로 그냥 해야지.’ 하며 체크를 쓰려고 할 그때 갑자기 탁 드는 생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입니다. 그래서 두 배로 그냥 써서 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할 경우에는 항상 내고도 찝찝합니다. 헌금하고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생각한 게 ‘하나님이 항상 옳으시다.’였습니다.
아깝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뭐냐 하면 ‘이건 내 거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니까 아깝습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아깝습니다. 그런데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내 소유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내 소유로 만들어서 종처럼 내가 원할 때마다 ‘하나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라고 부리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하나님, 무엇을 원하세요? 제가 뭘 하기를 원하세요?’라고 여쭤보면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나의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시기를 바라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서 조금 기도해 보다가 안 되면 ‘기도해 봤자 안 되네.’라고 하면서 떠나 버립니다. 그런데 기도해 봤자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은 겁니다. 기도하다 보면 정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깨달아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마음이 채워집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내가 내 맘대로 살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 마음이 세상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큽니다.
그러니 안 채워지는 것으로 아무리 채워 봐야 채워지겠습니까? 나보다 더 큰 존재로 채워야 하는데 그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성공해도, 평생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항상 염려와 불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사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2) 이 관리의 두 번째 문제는, 구원받기 위해 자기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먼저 ‘선하다’라는 단어에 주목하시며 십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아, 그것은 제 전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어릴 적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런 것 말고, 구원에 대해서 뭔가 좀 다른 것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는 것은 보통 열심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는 겁니다. 진정한 만족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다 지켰어도 영생을 얻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으려면 뭔가를 좀 더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주님께 온 것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도 다루지만,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가 구원을 받았나 못 받았나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감정을 의지해서 그렇고, 무엇보다 생각을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것을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긴 믿는데, 분명히 믿는데, 안 믿는 게 아닌데, 그러나 내 삶을 보면 부족합니다. 제대로 예배, 기도, 말씀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고, 별로 주님 뜻대로 사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내가 구원을 받았을까 헷갈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플러스 알파(+α), 즉 뭔가 또 다른 게 있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뭔가 선을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 ‘플러스 알파는 없다.’ 플러스 알파라는 것은 구원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나오는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뭔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은 결코 내가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 구원하겠다고 자기 머리를 아무리 잡아당겨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요즘 얼마나 전 세계적으로 사건, 사고가 많습니까?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다른 데도 그렇고,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한 데서도 끔찍한 사건과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런 죽음의 위기에서 자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위기에 닥칠 때 누군가 제 3자가 밖에서 자기를 구해주어야만 합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도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구원이라는 것애눈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엄청난 위기입니다. 죽음의 상황입니다. 그런 죽음의 위협 앞에서 누군가 제3자가 밖에서 와 구출해주어야 합니다. 작은 어려움에 있는 것은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가 와서 구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불이 나서 활활 타는 화염 속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나를 꺼내 줘야 합니다. 아니면 헬기에서 밧줄을 내려 줘서 그것을 잡고 살아날 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 또는 선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자기가 뭔가를 행하면, 즉 이렇게 계명을 지키고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헌금 많이 내고 남을 돕는 등의 착한 일을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결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가 앞을 못 본다고 해도, 다리를 못 쓴다고 해도, 중풍병자라고 해도, 나병환자라고 해도, 귀신에 들렸더라도,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더라도,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에게 참 쉼과 안식을 주리라. 내가 너를 구원해 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받고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만족함이 있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면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정말로 우리 각자가 천하보다 큽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아니, 어떻게 온 세상보다 나 한 사람이 더 큰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나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를 봐주시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딱 나 한 사람밖에 없어도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다 가져도 안 채워지는 겁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채워진다면 그렇게 성공하고 부자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죽는 것입니까? 엄청난 돈으로도, 무슨 엄청난 대저택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마약, 도박, 술 같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딱 한 분,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신 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고 따를 때 거기에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잘 안 믿어진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교회 나오는 것을 중단하고 나가서 마음대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행복한가?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잠깐 순간적인 기쁨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아닙니다. 대신 뭐가 마음을 채우는지 아십니까? 염려, 불안, 공포, 두려움,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내 마음을 채웁니다. 예수님을 떠나 살 때 그렇게 됩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며 다 버린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요즘 말로 하면, 사도 바울 역시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 관리에 전혀 뒤지지 않는 사람, 어쩌면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좋은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며 버린다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겠다면서 펄펄 뛰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제일 앞장서서 그를 죽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난리를 쳐도 마음이 안 채워지는 겁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가져도 안 채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자기만족을 위해 채워 보려고 노력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없어도 된다는 겁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없어도 나는 예수님만 있으면 살 수 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엄청나고 좋은 것이라도, 이 세상이 끝나거나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이 나와 함께해줄 수 있습니까? 다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함께해 주십니다. 그분이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그런 것들을 다 버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좋았던 그런 것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의 전파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는데 그 로마 시민권도 복음을 전할 때 도움이 되었고, 그가 가지고 있던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 때문에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식으로 인해 신약성경에서 누구보다 많은 수의 책들을 썼습니다. 그가 예수님으로 가득하니까 그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을 전하는 데에 잘 사용된 것입니다.
몇 년 전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친구에게 거하게 한턱 얻어먹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아주 좋은 호텔 뷔페(buffet) 레스토랑에 갔는데, 정말 ‘배가 터지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농담으로 “자 이제 또 다른 레스토랑에 가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게 진짜라고 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배가 꽉 찼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데를 가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고, 아무리 최고급 레스토랑이라고 해도, 배가 정말로 부른 사람이라면 더 이상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으로 꽉 차 있다면 아무리 다른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들로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꽉 차 있는데 뭘 또 채우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어려울 때도 좌절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에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이 없으면 별것 아닌 것이 자꾸 눈에 거슬리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꽉 차 있지 않으면 자꾸 다른 사람들이 보이고, 심지어 ‘여기는 왜 카펫 색깔이 파란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야?’ 하며 카펫 색깔도 걸리고, 의자 색깔도 왜 뻘건 것으로 했느냐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면 ‘상처받았다’, ‘시험에 들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쉽게 말해서 삐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남들이 상처를 주더라도 안 받으면 됩니다. 안 받으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삐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를 주려고 하면 ‘상처 안 받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으면 모든 부분에 감사하고 은혜가 넘쳐서 상처를 받을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도 사랑하시고 주님의 사역을 위해 사용하시다니요. 저의 적은 봉사를 받으시다니요. 저의 예배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어주시고 헌금을 받아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며 감격하게 됩니다.
3) 이 관리의 또 다른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계명 이야기를 하셨을 때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그런 계명들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절)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오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것이 영생을 얻는 길도 아닌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정말로 섬기는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고, 아주 선한 사람으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계명들은 십계명 중에서 어떤 부분입니까? 모두 이웃 사랑에 대한 부분입니다. 십계명 중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것, 즉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인간관계,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개의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팔아라... 나누어 주라”(22)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이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먼저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사실은 우상인 것을 먼저 제거하고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귀중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비하면 형편없는 것, 무가치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 그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는 돈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실제로 성전에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사드릴 때도 아마 최상급 짐승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냥 보면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안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종교적인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서 진짜 주인을 하나만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곡에서 “내 삶 드리리”라고 하고 “주님만 따르겠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데, 돈도 사랑하고, 권력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합니다.’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내가 가진 그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잘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것을 따라가며 하나님은 뒷전이 되면 헤매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그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여름에는 정말 모든 것이 푸르고 이파리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이 싱싱했는데, 가을이 되면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다음 해 봄이 되면 또 새잎이 돋아납니다.
우리는 보통 낙엽이 떨어졌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것은 떨어진 낙엽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낙엽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잎을 버린 것입니다. 봄에 새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봄에 새로운 잎이 나려면 지금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것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도 나무는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버릴 것을 버릴 줄 압니다. 우리 사람만 버려야 할 것을 못 버립니다. 자연은 버려야 할 것을 잘 버립니다. 그래서 자연이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알고, 버릴 것은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3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 말씀해주셨지만,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하늘의 보화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이 관리는 슬픈 기색을 띠고 심히 근심하며 갔습니다. 이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 슬퍼하고 근심했겠습니까?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고, 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자부하는 그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한 가지는 그가 십계명의 첫 번째 부분을 등한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웃에 대한 모든 율법을 준수했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닌 재물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열린 것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로 이 굴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영생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를 보며 예수님은 한 가지 말씀을 또 하십니다.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4-25절)
이 말씀을 보면,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낙타가 어떻게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만일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늘 보화가 그렇게 하찮은 것이었을 수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재물의 문제는 그냥 돈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돈 문제는 영원을 결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6-27절)
왜 다 놀랐는가 하면, 그 당시 통념으로 저렇게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사회에서 실패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복을 주셔서 저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아니다. 저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라고 하시니까 다 충격을 받은 겁니다. 그럼 저런 사람이 못 들어가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세 가지 놀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아니, 그 사람이 여기에 없다니.’ 당연히 와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니, 저 사람이 여기에 있다니.’ 의외의 인물이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은 안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믿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니, 내가 여기에 있다니.’ 깜짝 놀라면서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부자 청년 관리를 보면서 ‘저 사람처럼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영원이 걸린 문제입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고 그냥 넘겨서는 절대 안 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고 천국에 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었으면 천국을 갑니다. 믿어도 들어가기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었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정말 믿었다는 것이 뭔가 그것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삶을 한번 잘 보십시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인가, 그것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물론 수시로 어쩔 땐 넘어졌다 어쩔 땐 일어났다 한다고 안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조금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다시 돌이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찔러 주셔서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하실 때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서 또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증거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결정적인 증거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내 삶에는 사랑이 있는가? 나밖에 모르고, 내 가족밖에 모르고, 내 아이밖에 모르고, 오직 내 성공밖에 모르고, 예수님을 믿는데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잘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믿음을 주셔서 감사하기에,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하며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