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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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TK1vyJgJFHQ?si=HDHqyrm-SihDPU0t&t=95

 

 

202477일 주일예배

예수와의 만남 2

주여 원하시면

(누가복음 512~16)

 

[들어가는 말]

 

다들 그러셨겠지만, 저도 어렸을 때 동네에서 친구들과 뛰놀며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는 축구를 하는데, 먼저 가장 나이 많은 형 두 명을 각 팀 주장으로 세우고 그 형들이 각자 자기 팀에 들어갈 아이들을 뽑았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저 형들이 나를 안 뽑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막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금방 뽑히긴 했지만, 50년 정도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그때 조마조마하고 불안해하던 감정이 아직도 기억날 정도입니다.

 

한국에는 왕따라는 것이 있는데, 크게 따돌린다는 뜻에서 왕따라고 한 것 같습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bullying’이라고 합니다. 왕따는 특히 청소년층에서 심각한데, 폭력으로 이어질 때가 많고 심지어 그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일어날 정도로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즘 시대가 좋아지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좋아지는데도 왕따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됩니다.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나를 전혀 알아 주지 않고 무시하며 따돌릴 때,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이 될 겁니다그럴 때 누군가가 웃으면서 다가와 친절하게 대해주면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안도감이 생기고 정말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셔서 앞에 앉은 사람 뒤통수만(?) 보다 가지 마시고 주변을 잘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는 것도 대충 하지 마시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혹시 못 보던 얼굴이 있는지 보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거리가 약간 있어도 가서 환영해 주면서 처음 오셨냐고, 반갑다고 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그것을 맡은 사람이 하면 되지.’라고 할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맡은 사람입니다. ‘나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다.’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 얼마 안 되었어도 조금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 온 사람이 보인다면 가서 오늘 처음 오셨어요?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뭐 하다 오셨어요? 뭐 하는 분이세요?’라는 것까지는 안 하셔도 되고, 그냥 처음 오셨어요?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하며 그렇게 따뜻하게만 맞아주어도 새로 온 사람은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부임했을 때, 처음 오신 분들과 <새가족반>을 하면서 그분들에게 여쭤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셔서 인상이 어떠셨어요?” 그러면 굉장히 많은 분들이 차갑다’, ‘인사를 안 한다’, ‘환영을 안 해준다라고 했습니다. 3분의 2 이상은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우리가 많이 바뀌었고, 특히 목장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하는 것이 점점 몸에 배다 보니까 그 후에는 놀랍게도 오시는 분의 대다수가 너무 분위기가 밝다’, ‘따뜻하다’, ‘반겨줘서 고맙다와 같은 말들을 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뀐 것이 참 감사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버림받을 때 슬픈 감정을 나타냅니다. 저희가 8년 전 작은 개 한 마리를 한국에서 입양했는데, 버려진 유기견들이 있는 쉘터에서 유기견 사이에서 태어난 개입니다. 아주 활발한 성격이고 잘 뛰어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날아다닌다고 할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개인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만지려 하면 으르렁거립니다. 특히 어디서 조금만 소리가 나도,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세우는 용맹함(?)은 어디로 갔는데, 화들짝 놀라며 도망갈 정도로 겁이 많습니다. 직접 버려진 유기견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인데도 그런 것을 보면서, 버려진다는 것, 관심을 못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1.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 (12)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사람이 나오는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고립된 장소에서만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병 환자였습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2)

 

우리가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사실 오늘 설교 내용의 3분의 2 정도가 이 12절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여기에 사실은 엄청나게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전에 쓰던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문둥병자라고 했는데, ‘문둥병은 비하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서는 나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표현들이 이전 성경에는 많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다 바꾸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하하는 말을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은 지금 우리가 아는 나병(한센병)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전염성이 아주 높고 치료 불가능한 진짜 한센병도 있고, 치료가 가능한 피부병을 모두 포함해서 성경은 나병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의 병이 정확히 어떤 피부병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피부병인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진짜 한센병이었는지 다른 피부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 왜 그런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여기서의 초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경우였든지, 이 사람은 극도로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가르치는 대로 나병 환자를 부정하다고 취급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같이 살 수 없었습니다. 살다가 나병이 생기면 사랑하는 가족과 같이 살다가도 가족에게서 떨어져 저 밖에 나가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생이별을 해야 하니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13:45-46)

 

이처럼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나병 환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그러는 것입니다. 모르고 다가오면 윗입술을 가리고 콧수염 부분을 가리고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즉 쉽게 얘기해서 나는 더러운 사람이다. 더러운 사람이다.” 이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더럽습니다.”라고 두 번 외쳐야 하고, 또 그 병이 있는 동안에 부정하기 때문에 성 밖에서 살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을 못살게 굴고 압제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병이 생기면 그 사회 전체에 전염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이 병에 걸릴 수 있기에 격리하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경우 자기가 나병 환자라고 그런 식으로 표시해서 자기에게 다가오면 안 된다고 해야 하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스스로 나는 더러운 사람입니다.”라고 두 번을 말하니까 지나가던 사람이 듣고 사람인가 봐.”라고 하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 내가 사람이 아니구나.’ 다른 사람은 나병 환자를 사람 취급도 안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의 어느 동네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든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나와 엎드립니다. 이것은 그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발견하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힘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로 오면서 자기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안 되니까 옷으로 몸을 단단히 가리고, 혹시라도 들키면 어떡하나 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려도 표시가 안 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병 환자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경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떨리는 마음으로 여기에 나온 겁니다.

 

그렇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이 나병 환자가 왜 그렇게 무리해서 예수님 앞에 찾아온 것입니까? 그는 분명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던 겁니다. 멀리서 따라다니며 그 모든 것을 보고 듣는 가운데 저분이라면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병 환자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 데 있어 큰 장애가 됩니다. 만일 그가 나병 환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그는 당장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는 분명 엄청나게 고민했을 겁니다. ‘내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비참한 상태로 계속 살아가느니 예수님께로 가서 고침을 받자.’라고 생각하다가도, 바로 그다음 순간 그런데 내가 돌에 맞아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또 주저하게 됩니다. 갈까 말까, 고민하기를 여러 차례 했을 겁니다. 자기를 고칠 수 있는 예수님에게로 가고는 싶은데,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과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나병 들린 사람은 마침내 결단하여 예수님에게로 와서 모든 사람 앞에 자기를 드러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 급히 와서 자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며 간절히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수많은 무리가 둘러싸고 같이 다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수많은 무리를 뚫고 갑자기 나타나니까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다들 급히 피하지 않았겠습니까? 피하면서 손가락질하며 여기가 어디라고 나병 환자가 여기 온 거야? 어떻게 저런 더러운 놈이 이곳에 왔지? 빨리 저 녀석을 끌어내야 해. 저런 나쁜 놈, 우리까지 부정하게 만들려고 하나?’ 왜냐하면 나병 환자와 접촉할 때 자기도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온갖 욕을 다 먹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쳐 죽여야 한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이 나병 환자도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위험, 무엇보다 종교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자기 머리를 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 몇 년 전에 리메이크되기는 했지만 오래전에 나온 영화 <벤허(Ben Hur)>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중학교 때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굉장히 긴 영화였는데, 1959년에 나온 영화니까 얼마나 오래 됐습니까?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원래 귀족 집안인데 몰락하면서 나병에 걸립니다. 그래서 거리를 구걸하면서 다니니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돌을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1세기 당시, 아니 이미 그전부터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 앞에 나오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걸고 여기 나왔고,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

 

여기서 이 사람이 구하는 내용을 잘 보십시오. ‘주님, 만일 하실 수 있으면 저를 고쳐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은 저를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고칠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 이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병을 과연 고치실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습니다. ‘저분이 내 병을 고치실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다면 왜 목숨을 걸고 여기 나오겠습니까?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과연 이 능력의 예수님께서 나를 고쳐주실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되어 있는 자기와 같은 나병 환자를 과연 고쳐주실 마음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능력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쳐주실 마음이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고쳐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곧 돌에 맞아 죽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이 순간은 그에게 죽느냐 사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알지 못한 채,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간절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왜 목숨을 겁니까? 그냥 안전하게 숨어 있지,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벌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줄 수 있으신 유일한 분이심을 정말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에도 해결책이 있다면 예수님께 이렇게 목숨 걸고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오직 저분만이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분만이 유일한 해결책인데 왜 안 나오겠습니까?

 

어차피 나병 환자로 안전한 곳에 숨어 지내더라도 그것은 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닙니다. 숨만 쉬고 있는 것이지, 사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이렇게 비참하게 살 것, 자기를 치유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 앞에 나오는 모험을 택합니다.

 

저번 주 큐티 본문 중 아람(시리아) 군대의 사령관인 나아만이 나병 환자여서 그 왕이 북이스라엘로 보내어 엘리사가 그를 고쳐준 사건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큐티 본문에는 나병 환자 네 명이 나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아람 군대에 포위당해서 먹을 게 없어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그런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때 나병 환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저 아람(시리아) 군대에게 투항하자.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굶어 죽고, 성안에 가도 어차피 거기도 굶어 죽고 있으니까 거기 가봤자 소용없다. 또 우리가 나병 환자라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러면 아람 군대에 투항해서 혹시 우리를 살려주면 사는 거고, 죽이면 죽는 거다. 어차피 죽을 건데 가보자.” 이렇게 말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병 환자라는 것은 삶에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쳐주신 그때 예수님 주변에서 나병 환자가 이 사람 한 명이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1세기 당시에 나병 환자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이 치유 받은 이야기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만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나병 환자에게는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많았습니다.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지 댈 것이 많았습니다. ‘괜히 나갔다가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맞아 죽으면 큰일이다. 위험하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가 예수님께 나아갈 기회를 노리는데 어딜 가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가볼까 하는데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못 갔을 것입니다. 그러다 오늘은 꼭 가야지.’라고 하는데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 ,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네.’라고 하며 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려면 똑바른 길로 쫙 나가야 빨리 갈 수 있는데 지금 여기는 길도 울퉁불퉁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경사도 많아서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이기에 위험하다. 안 되겠다.’ 이랬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요즘 사회 분위기가 너무 날카로운데 괜히 나섰다가 더 비난받고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안 되겠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보려고 이렇게 보니까 저기 있는 사람 중에도 특히 나에게 막 욕을 해대는 그 사람이 있네. 안 되겠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 그분만이 자기를 고쳐줄 수 있는 분이심을 정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모험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 인생은 모험입니다. 그리고 인생에는 반드시 어려운 순간이 옵니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다 어려운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좋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결정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안 좋은 결정은 무엇이겠습니까? 해결해 줄 수 없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결정이고, 해결해 줄 수 없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어떤 어려움이 탁 생기면 해결해 줄 수 있으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니라 자꾸 해결해 줄 수 없는 다른 데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거나 그런 길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결국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대부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을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로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Savior)로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며 책임져주시는 주님(Lord)으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로서 나를 구원해서 천국에 보내 주시는 분인 것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그분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구주로도 믿고 주인으로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크리스천의 문제는 뭐냐 하면, 그리고 네 가지 토양의 비유에서 가시덤불이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았다고 믿는데 정작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십니다. 다른 데로 눈을 돌리기 전에 먼저 우리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주님만 바라며 주님께만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먼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 또 믿는 사람들이 함께 교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그다음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하나님을 먼저 찾으며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해결책이 보이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대로 있고 상황도 똑같은데, 놀랍게도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더 이상 불안하거나 염려하지 않게 되며 주님을 신뢰하니까 괜찮다. 이 정도는 괜찮다.’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게다가 또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것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아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안 해본 분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기도해봤자 소용없네.’라는 말은 기도를 안 하시는 분들이 주로 하지,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께 나아가고, 그럴 때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특별히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입니까? 단지 돈이 없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저번에 산상수훈에서도 살펴봤지만,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올 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요즘 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이 많은데, 건강에 어려움이 생기면 사실 낙심도 되고 짜증도 나고 힘이 듭니다.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거구나. 감사하다.’

 

여러분, 죽은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냥 썩어버릴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병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괴로운 문제 때문에 내가 고민한다면 그것 역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고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삶에 괴로움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아니, 나아가더라도 너무 편하게, 간절한 마음이 전혀 없이 나아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나의 삶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지금 나를 불안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거나, 걱정하게 하거나, 염려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까? 나를 두렵게 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께로 나아갈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십니다.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당연히 해결해 줄 수 있으십니다. 그럼 왜 해결을 안 해주시나? 이것을 통해 내가 뭔가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케이스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 능력의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간절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뭔가 또 다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긴 하는데, 그래도 내가 믿는 구석이 저기 있기 때문에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이나, 자기가 가진 것, 어떤 사회적 지위, 아니면 가족이나 아는 사람 중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등 이런 것을 믿으면 사실 마음이 간절해질 수가 없습니다. 거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또 새벽기도나 개인기도 시간에 기도할 때마다, 간절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도 안일하게 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셔서 간절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산상수훈팔복에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봤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절박한 마음과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제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2.   나병 환자를 일부러 만져서 치유하시는 예수님 (13)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온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를 바로 고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3)

 

여러분,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얼마나 어렵게 이 나병 환자가 여기 왔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목숨 걸고 온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으로 그를 직접 만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아라.”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했더니 내가 원한다.”라고 만지며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즉시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갑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지는데, 예수님은 전혀 지체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그를 만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꼭 만져야 고치실 수 있습니까?

 

가끔 보면, 우리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같이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손을 얹지 않고 기도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꼭 손을 얹어 기도해달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을 떼고 기도하면 뭔가 능력이 없고, 손을 대고 기도해야 뭔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 꼭 그렇게 손을 대고 기도해야만 능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특히 예수님은 만져서 고치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냥 말씀만 하셔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가 지금 바로 앞에 왔는데 일단 살이 썩은 냄새가 확 납니다. 이 사람이 오자마자 예수님이 코를 막으시며 , 좀 떨어져! 떨어져! 그러고 나서 내가 고쳐줄게. 알았어, 고쳐줄게. 일단 좀 떨어져.’라고 충분히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지면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은 멀리서도 고치시고, 심지어 병자를 안 보고도 고치십니다. 나중에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이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멀리서 안 보고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때 이 나병 환자를 만지면서 고치십니까?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이 얼마나 큰 사랑의 주님이신 가를 알게 해줍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단 종교적으로 부정하고 또 몸이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이 나병 환자를 절대 만지지 않습니다. 만지기는커녕 거리를 두고 떨어질 겁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균이 신경에 파고들어서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합니다. 나병에 걸리면 균에 감염된 피부가 썩기 시작합니다. 몸의 일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고름이 나오며 심지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은 코나 귀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떨어져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오래전 신학교 시절에 병원 채플린 실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각 노회별로 1년 정도 병원 실습을 하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녔을 때는 1년이 아니라 한 학기 동안 그것도 한 과목을 들으면 되었습니다. 목회 상담 과목을 하는 중에 두 달 정도 지정된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는 채플린으로 실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수업 시간 때 저는 아무 정보가 없이 갔는데, 미국인 친구들은 선배들에게 미리 들어서 그런지 굉장히 재빨리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저 친구들이 왜 저렇게 빨리 움직이고 막 뛰어나가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좋은 병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막 뛰어나갔던 겁니다.

 

그들이 먼저 신청하고 남은 곳을 보니까 제일 안 좋은 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제일 안 좋은 데가 바로 VA Hospital, 즉 상이군인들이나 군인 출신으로 아픈 분들이 있는 병원이었는데, 학교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그 병원에도 조금 늦게 갔더니 다른 친구들은 제일 좋은 병동을 이미 다 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게 뭔가 봤더니 정신병동이었습니다. 제일 안 좋은 그것이 하나 남아서 저하고 다른 한국 전도사님이 거기서 실습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저에겐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 병원에 가보니까, 거기에 에이즈(AIDS) 환자도 있었고, 여러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병원은 대체로 깨끗했는데, 거기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고 제2차세계대전 용사나 월남전 용사도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전 용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가까이 가면 정말 맡기 힘든 냄새가 났습니다. 그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다가가기도 싫었습니다.

 

그때 제가 20대 중반이었는데, 비록 실습이지만 병원 채플린으로 싫어도 가서 악수하고 또 웃으며 대화해야 합니다. 사실 악수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악수하며 인사하는데, 그중 80세 정도 되신 백인 할아버지 한 분이 제 손을 꼭 잡고 끝까지 놓지 않는 겁니다. 그분이 제일 냄새가 많이 나는 분이었습니다. 손을 꼭 붙잡고 오래 있다 가라고 하는데, 저는 여러 사람을 돌아야 하지만 오래 있다 가라고 그러셔서 굉장히 힘들었지만, 거기서 큰 인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웠습니다.

 

갈 때마다 그분이 저를 붙잡고 대화하는데, 솔직히 그분도 제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다 느낍니다. 하지만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 얘를 들어주지 않는데 아시안 사람 채플린이 와서 자기가 붙들고 얘기할 때 그래도 얘기를 다 들어주니까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사실은 제가 영어를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할 때였기 때문에 가만히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것인데, 이분은 제가 자기 얘기를 다 들어줬다고 너무 감격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You are my friend.”라고 하셨고, 이제 채플린 실습이 끝날 때쯤 되어서 이제 가야 합니다. 이제 못 옵니다.”라고 했더니 “You are my family.”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셔서, 저도 마음이 뭉클하며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예수님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렇게 냄새나는 환자를 절대 만지지 않고 그냥 멀리서 잠깐 거기 계세요.’ 하며 예수 이름으로 나아라.’라는 식으로 했을 겁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입장에서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두려움 가운데 엎드려서 고개도 못 들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를 만지는 겁니다. 그때 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드니까 그분은 따뜻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시면서 인자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아라.”

 

사랑으로 가득한 주님의 눈, 거기에 살짝 비치는 눈물, 나를 보시며 지으시는 인자하고 잔잔한 미소. 그는 즉시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 더럽고 까맣고 상처로 가득했던 피부가, 고름이 나고 피가 나던 피부가 하얗고 뽀얗게 변해있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동안 그 누구와도 피부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와 접촉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아무도 자기에게 이처럼 따뜻한 말을 건네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꺼져라’, ‘저리로 가라라는 사람들의 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훌륭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만져주신 겁니다. 게다가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낫자마자 아마도 감격에 겨워 엉엉 울며 기쁨의 눈물을 쏟았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 나오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에 대해 내가 그래도 적어도 어느 정도 되어야 하지 않나?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해서 어느 정도 경건하게 된 다음에 나가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잘못 생각하면서 뭔가를 이루고 나서 하나님께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나올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그냥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와도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나오면 그대로 돌려보내시는 게 아니라 변화시켜 돌려보내주십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지적하며 공격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의 가장 약하고 추한 부분을 만져주십니다.

 

우리는 문제가 없는 완벽한 사람, 잘난 사람,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주님 앞에 나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받아주시니까 그것을 믿으며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를 인정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나오는 사람을 주님은 오히려 기뻐하시며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끝이 없는 사랑을 가지신 주님, 우리가 믿는 주님은 바로 이런 주님이십니다.

 

 

3.   예수님의 명령과 기도 (14~16)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4)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애프터 서비스(After Service)’입니다. 확실하게 후속 조치까지 취해 주십니다. 이제 막 나병에서 치유함을 얻은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첫째로,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병 고치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오해할까 봐 미리 경계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율법에서 명령한 절차를 밟아 공식적으로 정결해졌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명하신 것은 이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사실 예수님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가서 어떻게 살든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이 제사장에게 가서 율법의 절차를 밟음으로써 다시 사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은 이미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당연히 사랑받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편견이 있고 선입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그가 제사장에게 확인받아야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고 또 시험에 들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5-16)

 

예수님이 치유 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주님에 대한 소식이 더욱 널리 퍼집니다. 이 사람이 가서 전한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직접 본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전한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얻으려고 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오는 수많은 무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시 조용한 장소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적한 곳이라는 말이 헬라어 원어에 보면 복수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한적한 곳들에 가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이 이처럼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신 것은 한 번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사역하시는 동안 계속해서 반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있어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사역이었습니다. 매일 하나님 아버지와 이렇게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은 영적 재충전을 받으시고, 그래서 나아가 놀라운 사역을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 있는가, 우리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내가 크리스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젊은 남녀가 서로 사귀며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인데, 애인인데, 약혼자와 약혼녀인데,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절대 안 만나는 커플을 보셨습니까? 서로 사귀는데 안 만납니다. 그건 완전히 잘못된 게 아닙니까? 사귀면 당연히 만나야지, 다른 사람들도 만나면서 사귀는 사람들이 서로 안 만난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인데, 절대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반드시 하루의 일정 시간에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따로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큐티도 하시고, 성경 통독도 하시고, 삶 공부도 하시고, 이렇게 예배도 참석하시고, 새벽기도도 하시고, 또 교회 유튜브 <라이브영상 목회편지>를 보는 것도 도움을 받는 한 방법이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 사역을 맡아서 하는 분들은 반드시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재충전 받는 시간이 없이 봉사만 하면 금방 고갈되고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과 교제를 가지며 나아가다 보면, 혹시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주님께서 선하신 뜻대로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소망 가운데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

 

여기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부분인데, 사실 거기에는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 하나님과 지금 관계가 있는 사람,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저절로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셔서 역사를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나병 환자에게는 나병이 정말 큰 문제였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 두렵게 하는 것, 염려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문제를 모든 것에 넣어 보십시오. 지금 그 문제를 모든 것대신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내 문제>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고백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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