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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Eh6IX5msyZk?feature=share&t=96

 

 

2023423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6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7)

 

[들어가는 말]

 

1909년에 여성으로서 최초이자 동화로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겔뢰프(Selma Lagerlof, 1858-1940)라는 분입니다. 그녀가 쓴 <진홍가슴새의 비밀>이라는 동화가 있는데, 아주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그 책을 읽은 건 아닌데,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읽다가 그 책 내용을 접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루는 저녁 무렵 잿빛 털을 가진 새를 만드시고 진홍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작은 새는 자기 몸을 물에 비추어 보았지만, 몸에는 진홍빛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온통 잿빛 털인데, 왜 진홍가슴새라는 이름을 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네가 참사랑을 베풀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진홍가슴새가 사는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한 사람이 못 박혀 매달렸습니다. 가까이 날아가 보니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씌워져 있었는데, 가시에 박힌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 나오고 있었습니다.

 

작은 새는 마치 자기의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십자가 위를 맴돌며 날다가 자신의 부리로 그 사람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구쳐 나와서 작은 새의 가슴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묻은 피를 나중에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 붉은 핏자국이 남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후에 이 새가 낳은 새끼들도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 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작은 새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라겔뢰프는 이 새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를 상징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이처럼 인간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쪼아 파는 딱따구리처럼 남들의 가슴을 후벼 파며 상처를 주는 인생이 아니라, 진홍가슴새처럼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인생이 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1.   나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복

 

지금까지 우리가 팔복의 네 가지 복을 살펴보았는데, 이 팔복을 통해 예수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의 외적인 행동을 말씀하시기 전에 내적인 태도를 먼저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 성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 신앙인, 크리스천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성도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는 온유의 모습이 있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성품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며, 첫 번째는 두 번째로, 두 번째는 세 번째로, 또 세 번째는 네 번째로 단계적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덟 가지가 모두 하나를 하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첫 시간에 잠깐 말씀드렸지만, 팔복의 첫 네 개의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복이고, 뒤의 네 개의 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복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과 관계되는 네 가지 복과 또한 사람과 관계되는 네 가지 복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번에서 2번으로, 2번에서 3번으로 단계적으로 가지만, 하나님 앞에서 첫 번째 복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복을 누리게 되면 다섯 번째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1번이 잘된 사람은 5번으로 갈 수밖에 없고, 2번은 6번으로, 3번은 7번으로, 4번은 8번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이 여덟 가지가 동시에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첫 번째 복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다섯 번째 복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번째(애통)는 여섯 번째(마음의 청결), 세 번째(온유)는 일곱 번째(화평), 네 번째(의에 주리고 목마름)는 여덟 번째(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복인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다섯 번째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의를 위해 고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인데, 그러니까 첫 번째 복과 바로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사람 앞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의 복을 거치고 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 복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망적인 죄인인 나를 보고 울고,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감으로써 위로와 은혜를 공급받으며 살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나의 눈이 이제는 이웃을 향해 나아간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은혜를 입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따르는 성경적 믿음,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편의상 종교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종교가 아니라 삶입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는 종교가 아니라,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 성경적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로운 영적 체험도 하고, 또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과의 비밀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좋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게 이리도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사람 앞에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바로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산꼭대기로 데리고 가셨을 때 아주 밝은 광채가 났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니까 베드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초막을 세 개 짓고 삽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사회로 내려와야 합니다.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따르는 신앙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나를 채우고 흘러넘쳐서 이웃으로 흘러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이웃과의 관계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항상 같이 가는 겁니다. 항상 동시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웃만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관계가 동시에 되지 않고 하나밖에 안 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열립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람과의 관계도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것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22:37-39)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으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것(첫째)과 같은데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즉 이웃 사랑도 이것(하나님 사랑)과 같다는 것,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순서는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 세워져야 이웃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중요성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둘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고 예배하는 것은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안 중요하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잘 드리면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 눈이 열려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가지고 있는 악함과 죄성이 빛 되신 주님 앞에 비추어져서 드러나는 겁니다. 이전에는 저 사람은 왜 저러냐?’ 하고 다른 사람들의 악함을 보고 분노하며 정죄했지만,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도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영적 가난함을 보고 탄식하며 울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했고, 외적 조건에 따라 좋으면 잘 대해주고 별 것 아닌 것 같으면 함부로 대하기도 했습니다. 내 마음에 들고 뭔가 나와 잘 맞거나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면 좋아하면서 친하게 지냈고, 나에게 별 이득을 주는 것 같지 않거나 내 마음에 안 들면 거리를 두었습니다. 특히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철저히 차단해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나 자신의 실체를 보고 나니까 다른 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차가운 말, 거친 말, 거칠고 무례한 행동을 보면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막말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전에는 분노하며 맞서 싸우거나 소극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피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깨닫고 나니까 다른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할까?’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는데 왜 죄와 마귀와 세상의 논리 앞에서 한 번뿐인 귀중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갈까? 왜 돈과 성공이라는 허상에 속으며 살고 있는가?’ 이런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을 다른 눈으로, 주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황폐함, 굶주림, 목마름, 갈증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보게 되니 안타까워지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겁니다. ‘참 안 됐다. 왜 저렇게밖에 살지 못할까?’ 그러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손을 뻗어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합시다.’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을 향한 눈이 열리면서 다른 눈, 즉 하나님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개가 알려져 있어서 그것을 한자어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중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23:34, 새번역)

 

십자가에 달리면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을 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이 기도를 하셨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중 하나인데, 자신을 조롱하며 손가락질하고 저주를 퍼붓는 무리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이 감겨 있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참으로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는 않겠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여, 저 인간을 죽여 주십시오.’라고 하지 누가 용서해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만 그렇게 기도하신 게 아니라 주님의 뒤를 따른 사람 중 스데반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자기에게 신성모독이라고 몰아서 돌을 던져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7:60)라고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나를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행위와 말이 악한 것은 틀림없지만, 눈먼 자처럼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2.   진정한 긍휼은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푸는 것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입니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누군가를 용서하기보다는 상대방보다 더 많이 갚아주어야 시원하고, 그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마구 드러내서 그 마음을 상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게 우리의 죄성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입에서도 주님,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스데반과 같은 기도가 나오도록 주께서 마음을 바꾸어주시는 것은, 우리가 성도로서 이 땅을 살면서 경험하는 영광 중 하나입니다. 보통 인간은 이런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과 모습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들만 보지 않습니다. 보복하거나 변명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게 원래 성도이고 크리스천입니다. 성도가 되고 직분을 받아 교회의 중직자가 되고 모사가 되었더라도 부패한 본성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넘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그렇게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세상은 보복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내가 당했으면 갚아줘야 하고, 원래 율법에는 하나를 당했으면 하나만 갚아주라고 했는데 두 개, 세 개를 갚아주고 싶어 하는 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렇게 보복하면 끝납니까? 그러면 저쪽에서 또 보복하고, 그러면 이쪽에서도 또 보복합니다. 끝나지 않습니다. 힘으로 누르려 하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리를 끊으신 분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미움의 고리, 죽음의 고리를 예수님은 스스로 용서를 선언하심으로써 끊으셨습니다. 보복의 논리?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크리스천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실패하고 세상의 논리와 마귀에게 속고, 아직도 눈이 열리지 않아서 여러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정죄하지 않아야 하는 겁니다. 행위와 말만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게 어떻게 쉽습니까?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용서는 감정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의지적으로 보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해를 끼쳤지만 나는 저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렇게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밖에 살지 못할까? 왜 저런 말밖에 하지 못할까?’ 하며 내가 함께 잘못을 범한 사람인 것처럼 대신 회개하고, 그들의 허물을 어떻게든 덮어주려 하며, 마음 중심의 공허함과 고통을 읽으면서 그들을 긍휼과 자비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아주는 것, 손을 먼저 내밀어주는 것, 그러한 사람이 성도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할 것 없이, 우리는 자신 안에서 수많은 죄와 악함을 보지 않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탄식하며 나는 구제 불능이야. 나는 안 돼. 그냥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라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나처럼 허물이 많고 악한 사람을 덮으시고 가려주시고 그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그 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원래 더러운 죄인인데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그래서 나를 살리시고 모든 복과 부요함을 자격 없는 나에게 거저 주신 겁니다. 그 은혜를 입은 것을 정말 깨달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런 눈으로 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누가 해를 끼쳤을 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용서해주지. 나는 용서할 마음이 있다. 먼저 와서 사과하면 용서하겠다. 내 앞에 와서 진짜 회개하면 용서해줄 의향이 있다.’ 그건 용서가 아닙니다. 진짜 용서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나는 보복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사실 우리도 먼저 주여라고 나아가서 주님이 용서해주신 게 아닙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함을 받는 게 가능했던 겁니다. 여전히 나빴고, 여전히 악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착해진 다음에 주님이 오셔서 구원해주신 게 아닙니다. 악한 죄인인데 오셔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나쁜 사람인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게 해주신 것입니다.

 

가슴을 찢고 돌아오는 것이 나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의 몫이라면, 그것과 상관없이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주며 손을 먼저 내밀어주는 것이 우리 몫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실패와 뾰족뾰족함, 어리석은 행위와 말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내는 생명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해를 당하면 상대방을 완전히 눌러버려야 성이 풀리는데, 우리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사명이고 그래서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똑같이 살라고 세워주신 게 아닙니다. 다르게 살라고 세워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르게 산다는 것이 뭔지를 알려주시려고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앞부분에서 팔복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때로는 실패하지만, 실패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면 됩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서 용서하면 됩니다. 다시 일어나서 용서하고, 그들을 탓하지 않고, 대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고, 긍휼 가득한 눈으로 봐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아프고 상한 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런데, 그래서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가는데,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정신 건강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정신과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정신과 또는 정신병원에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인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한인들 사이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내일 크레도(CREDO)에 가는데, 이번 강사진 중 정신 건강을 맡으신 분이 있습니다. 카운슬링 박사이신 분인데, 원래 신학도 하셨지만 목사는 안 됐습니다. 1.5세로 영어권이신데, 그분이 사무실을 열어서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한인들을 상대로 한다고 해서 잘 안 될 것 같아 약간 염려가 되어 물어봤습니다. 왜냐하면 한인들은 쉬쉬하면서 그런 데를 잘 안 가니까 그랬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 된다는 겁니다. 상담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심지어 목사님들도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마음이 아프고 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됩니다. 아픈 사람은 많은데 해결이 안 됩니다.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으면 되지만, 마음이 아픈데 치유가 안 됩니다.

 

바로 그러한 곳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깨달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눈으로 가서 큰일도 아니고 그냥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봐주고 이해해주려 하고 들어주며 등을 톡톡 쳐주면서 수고가 많으세요. 얼마나 힘드세요?’라고 하며 이 땅에서 흩어져 살아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 사는 곳에서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토닥여주자는 겁니다.

 

목장에서도 바로 그런 걸 하는 겁니다. 자기 속마음을 내놓지 않으면 치유가 안 되고, 내어놓을 때 치유가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 제가 이렇게 힘들었습니다.’라고 하면 다들 자기 일처럼 아파해주며 기도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벌써 반 이상은 치유가 일어난 겁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분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이고 영광입니다. 이런 삶이 영광스러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엄청난 것을 이루고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영광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영광은 바로 그런 아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주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불쌍한 생각이 든다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참으로 귀하지만, 마음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가는 것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긍휼히 여긴다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것이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마음으로만 안 됐다고 하는 게 아니라 행동까지 나가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그 불행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까지 포함된 말이 자비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라고 반문하시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27)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28)라고 하십니다. 그때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전부 빼앗기고 옷까지 빼앗겨 발가벗겨진 채 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그를 본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갑니다.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를 피해 지나갑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그를 불쌍히 여겨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맨 다음 나귀에 싣고 주막에 데려다준 다음 자기는 가야 하니까 비용을 주면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떠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응급조치만 한 채 제가 갈 길이 바빠 이제 어쩔 수가 없네요하고 가버린 게 아닙니다. 자기가 비용을 내어 거처와 양식을 준비해주고 떠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긍휼과 자비를 베푼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새인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37)라고 에둘러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라고 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누가 내 이웃인가?”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하고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 초점을 맞춰 율법 교사의 시각을 바꿔주십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은 게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마리아인처럼 긍휼을 베풀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것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3.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고 맛보는 성도의 복

 

자기 일에 바빠 저마다 분주히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가던 길을 멈추어 괴로워하거나 아프거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손을 내밀어서 그 필요를 공급해줄 수 있는 이웃을 예수님은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저번에 전쟁이나 지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을 하자고 해서 모아 보낸 것도 그런 것입니다. 먼저는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돈만 휙 던지는 게 아니라 안타까움을 가지고 내가 이것이라도 보태야지.’ 하며 낼 때,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봐주십니다.

 

불쌍한 이웃뿐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는데, 나를 힘들게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사실은 나의 사랑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성격이 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긍휼이 많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까칠하게 굴 수가 있습니다.

 

그저 마음이 통하는 사람 몇 명과 잘 지내는 것으로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주님이 명하시는 사랑을 다 실천했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듯 남들은 다 그렇게 살지만 나는 다르게 산다고 자기 의에 빠져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무슨 말을 듣겠습니까?

 

내가 힘들지만 값을 치르고라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저 사람이 거기서 나올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긍휼입니다. 긍휼이 영어로는 mercy(자비)인데, compassion이 더 좋은 단어입니다. 동정도 되지만 연민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com함께 한다는 말이고 passion고난입니다. 그 사람의 고난과 내가 함께 해주는 것이 연민의 마음, 자비의 마음,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거듭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긍휼을 계속 받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남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하나님이 내게 긍휼을 베풀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긍휼을 베풀고 그로 인한 보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우리의 조건이나 자격이나 공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귀한 긍휼과 사랑을 체험하고 나니까, 나를 향해 잘못한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며, 오히려 그들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고자 애쓰는 삶으로 바뀌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중 네 가지만 여기 나누고자 합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18:25)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1:17)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14:21)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13)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심판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스스로 이미 심판을 받는 겁니다.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복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지금 가치관이 많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내가 당하면 보복해줘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해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그 사람을 용서해주며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열리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복과 공급으로 인해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소되며, 우리 삶에 어떤 부요함과 아름다움이 있는지를 드러낼 길이 열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사람은 그 긍휼과 자비를 기초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과 자비로 상처 많은 이 세상을 긍휼하게 또 자비롭게 여기면서 그들을 치유하는 데에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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