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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4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장 5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지금 매주이 팔복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가르쳐 주신 8가지 복이 팔복 중에서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이 어느 것 같으십니까? 다 많이 있겠지만 특히 오늘 바로 5절 ‘온유’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 그렇습니까? 예, 한국 사람은 유난히 땅을 좋아하고 집착하는 경향이 강해서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신다이 말씀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딴 건 몰라도 내가 온유한 자가 되어야 되겠다.
사실 부동산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은 좀 개념이 다른데 미국에 와서도 한국식으로 그렇게 막 부동산 투기를 하려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장관 청문회나 또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이제 그 후보를 검증하게 되는데, 주소를 이제 불법이나 편법으로 이렇게 이곳저곳으로 막 전입했다가 또 옮겼다가 이전하는 사람, 그것도 여러 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에게 유리한 게 있으니까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게 부동산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엄청난 땅을 샀다가 뭐 큰 땅을 샀다가 막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그것이 이제 농지인 경우도 있는데, 농지는 원래 법으로 그 농사를 지어야 되어야 하게 되어 있는데 농사는 안 짓고 그냥 사 놓고 그러다가 이제 그게 걸려서 좀 곤욕을 치르고 뭐 그런 사람들도 요즘까지도 많이 있습니다. 또 집이 막 여러 채인 사람들도 있고, 특히 강남에 몇 채가 있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지난번 LH 사태 때도 미리 정보를 빼서 직원들이 노른자 땅들을 미리 싹 사 놓고 거기다가 나무를 막 심어 놓고 위장한 것도 적발되지 않았습니까? 근데 요즘에 뉴스가 한번 또 나온 적이 있습니다. 나무는 잘 자라고 있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나무는 참 잘 자란다고 합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형편인데 그렇게 땅에 사람들이 집착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땅을 주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온유하면 땅을 받는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성품의 특징이니 온유함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산상수훈에 나타난 이 바로 이 8가지 복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성품,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가져야 할 8가지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이 상품은 크게 두 가지로 또 나뉘는데,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하는 성품이고, 다섯 번째에서 여덟 번째까지는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어떤 성품을 가져야 하는가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그리고 두 번째 애통하는 자의 복에 이어서 이제 온유한 자의 복도 역시 사람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이 소유하는 독특한 성품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다 예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1. 온유란 무엇인가
먼저, 온유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절)
본문에 온유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프라우스’)는 ‘짐승을 길들여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굉장히 부드럽고 나약하고 순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온유하다, 겸손하다, 이해심이 있고 예의 바르다’라는 뜻으로 서로 혼용하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우리가 세상적으로 이해하는 온유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겠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무엇보다 가난한 마음과 애통에서 비롯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계속 우리가 같이 팔복 전체를 읽는 이유는, 여덟 가지가 따로따로 떨어진 게 아니고 첫 번째 복은 두 번째로, 또 세 번째로, 또 네 번째로 계속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게 되고, 또 애통하다 보니까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유는 산상수훈 첫 번째 복인 가난한 마음에서 먼저 비롯되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자기의 행위와 의는 마치 다 찢어진 걸레 조각 같고 자기의 마음은 정말로 부패한 것을 발견하면서, 그러다 보니까 통곡하고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니까 ‘정말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하고 나아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울게 되고 슬퍼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두 번째 복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자기의 죄에 대해 그렇게 애통할 때, 자기가 정말 가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며 울 때 생깁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서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 세상의 죄악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온유함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에 대해서 절망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비하나 저주가 아닙니다. 자기의 진짜 모습,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서로를 볼 때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다 우리가 볼 때 ‘저분, 참 괜찮은 분이다.’ ‘저 청년은 앞으로 아주 유망하다.’라는 식으로 우리가 서로를 좋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압니다. 자기는 그런 평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제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요즘은 앞의 스크린에 전부 다 너무 잘 비춰주니까 성경을 안 갖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이 앞에 쫙 비친다면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 앞에 내 마음이 싹 다 비추어진다면,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비추어진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중 자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마 부부끼리도 그럴 겁니다. ‘아니, 당신이 저랬어?’ 부부끼리도 서로를 모릅니다. 가족끼리도 모릅니다.
근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더러운 모습 때문에 정말로 절망하며 ‘하나님 밖에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이러한 나를 고쳐 주실 분이 없습니다.’ 하고 나오는 것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국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벌어지지는 악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라고 하고, 특히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며 비통해하고 대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렇게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그런 사람에게만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지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울 때 온유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가난한 마음이 애통을 낳고, 또 애통이 온유를 낳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많이 울면 됩니다.
앞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눈물을 흘린 적이 아마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셔서 그렇지 저는 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물론 하품해서 눈물 날 때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정말로 감동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슬퍼서도 눈물이 나지만,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감동했을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그냥 슬퍼하는 것과 감동을 넘어서 바로 그러한 자신의 죄, 그리고 이 세상의 악을 보면서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그렇게 많이 울 때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원한 가치를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을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고, 그런 사람이 온유한 자가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그저 와서 한 시간 정도 있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예배이고, 공 예배입니다. 공적 예배(public worship)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무가치한 존재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 앞에 가는 것, 감히 그 앞에 갈 수도 없는 그분께 자신을 드리는 것, 그분의 한없는 은혜와 자비의 옷을 입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는 그러한 마음, 즉 온유가 없다면 우리 예배는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지 못하고 자꾸 사람이 드러나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사실 예배를 많이 하는데, 저도 휴가 때 다른 데 가서 여러 교회들을 가보았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정말로 집중해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예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경우에 보면 지나치게 어떤 특정인이 굉장히 부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자도 그렇고, 어떤 일을 잘한 사람, 기도자, 또는 음악으로 찬양 인도를 잘한, 아니면 찬양대(성가대) 같은 것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된 예수님의 제자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애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하며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영광에 동참할 때 그 결과로 우리의 마음이 온유해지고 온유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단순한 부드러움, 연약함을 넘어선 성령의 내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온유이니까, 진정한 온유 속에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온유라고 하면 뭔가 부드러운 것만 생각하는데, 그 안에 강한 힘이 있는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유는 “거인의 손안에 있는 갓난아이”와 같다고 누군가가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강한 자만이 온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인은 한 손을 움켜쥐면 아이를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울고 귀찮게 하면 손만으로도 죽게 할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부드럽게 토닥여주는 것이 온유입니다.
강하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을 당해서 기분이 나쁜데 내가 힘이 있어서 확 받아치는 게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나를 위해서는 인내하며 참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이 손상당하고 그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질 때는 참지 않고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갈 때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입니다. 빨리 가다가 서야 하는데 안 서면 큰일 납니다. 사고나서 잘못하면 죽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는 사고가 나고 무서운 교통사고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 성격,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힘에 의한 폭력이나 복수나 술수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끔가다 보면 정말 술수만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하지 않고 항상 돌아서 술수를 통해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힘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권력이 있으면 그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흔들려고 합니다. 자기가 성공했으면 그렇게 가면 되는데, 자기가 가진 성공으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온유한 사람은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자기의 인격과 성품을 망치지도 않습니다. 자꾸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직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자비로 변화된 성품인 온유함만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지만 주장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협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한 방법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렇다고 저쪽에서 뭐라고 하면 흐느적거리는 것도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요즘 민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격이 예민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조금만 뭐라고 하면 그대로 반응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손해보는 것을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비난받으면 참지 못합니다. 굉장히 민감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온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열등의식의 동의어는 우월감입니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습니다. 같은 것인데 다르게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진 사람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 때로는 열등감 때문에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우월감이 있는데 그것을 잘 해결해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봉사를 엄청나게 많이 하고 신앙이 아주 좋은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남에게 뒤처지기 싫거나 남이 뭐라고 하는 게 싫어서 열심히 하는 겁니다. 또 우월감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아주 잘 믿는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평안이 없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항상 피곤합니다. 뭘 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우월감 때문에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 하면서 ‘나보다 못한 사람이 하는데 나도 해야지. 나는 더 잘한다.’라고 하며 나서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 항상 긴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으면 주인이 하라고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1세기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는데, 이전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막 잡아 온 것과 같은 그런 노예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면도 조금은 있었지만, 가족과 같은 종을 말합니다. 노예(종)는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주인은 종의 삶과 그의 가족의 모든 것을 책임져 줍니다.
그래서 종은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집에 살면 ‘나는 내일 뭘 먹고 살지? 먹을 게 없는데 어떡하지?’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인이 다 공급해 주니까 그렇습니다. 만약에 주인이 그렇게 챙겨 주는데도 ‘내일 뭐 먹어야 하지? 큰일 났네. 먹을 게 없는데.’ 하며 계속 걱정만 하며 항상 긴장하고 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만 믿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나는 천국 간다. 예수님 믿었으니 구원받았다. 영생을 얻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것은 ‘받은 구원’ 즉 영이 구원받은 것인데, ‘받는 구원’이 있다는 걸 모릅니다. 지금 성화의 과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만 믿으십니까, 주인으로도 믿으십니까? 주인으로도 믿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 예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종이고, 종은 주인이 책임져주는 존재이고,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따라만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막 긴장하고 벌벌 떨고 두려워합니다.
완벽주의자도 사실 그런 경우입니다. 1등을 하지 않으면 못 사는 사람, 항상 남을 이겨야 하는 사람, 결론은 항상 자기가 드러나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산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지금 주인으로는 믿고 있지 않는 겁니다. 구주로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되는데,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다 책임지며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해야 하니까 피곤하고 힘듭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또한 다른 사람과 계속 비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 항상 자기를 쳐다봐 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 거기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역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대로,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할 필요도 없고, 또 나는 저 사람만 못하다 해서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그게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하며 눈물짓고, 노래도 그런 노래만 듣고,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만 봅니다. 슬픈 것만 합니다. 그러나 슬픔을 즐기는 겁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겁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인정받고 칭찬받아야만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오해를 하거나 무시하거나 경멸하면 화가 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저렇게 얘기하지? 나를 뭘로 보기에?’ 하며 화가 날 수 있는데, 온유한 사람은 뭐라고 하든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진정한 온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온유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지만, 드러나는 것은 사람 앞에서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또 온유한 사람은 칭찬할 때 거기에 빠지지 않고, 조롱하고 무시할 때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난주 <생명 언어의 삶> 내용이 좋았는데,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2.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사람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실제로 온유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의 대표로 나오는 사람이 구약에서는 모세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첫 5권,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소위 ‘모세오경’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전통적으로 모세가 썼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기록한 것인데, 물론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쓰지만 ‘땅 위의 모든 사람보다 모세가 제일 온유한 사람이다.’라고 자기가 쓰면서 좀 조금 이상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쓰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모세가 원래 상처가 굉장히 많은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태어날 때쯤 히브리인에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바로 왕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근데 그를 죽이진 못하고 바구니에 담아서 강에 떠내려 보냈을 때 마침 바로의 딸 이집트 공주가 그걸 보고 입양해서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히브리 출신 것을 아는데 이집트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과 배척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또 안락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에게는 늘 감추어진 분노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자기 민족을 위하겠다고 나가서 이집트 노동 감독관 한 명을 쳐 죽이고
결국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니까 그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혈기가 넘치는 사람, 남을 때려죽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쓱 만지시고 다루시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항상 어떤 사람을 쓰시기 전에 먼저 쓱 만지시고 다루시는 일부터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첫 40년 동안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하셨고, 다음 40년 동안에는 광야에서 양치기로 장인의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되게 하셔서 그를 거기서 온유하게 빚으셨습니다. 그 광야 40년 동안 온유한 사람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광야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정말 그에게는 복이었습니다. 이 40년이 힘든 기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는 정말 복된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구스 여자의 일로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의 비방을 받았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모세가 거기에 별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싸우거나 막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참으며 인내하고 또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라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고 그걸 기록하라 해서 기록한 겁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온유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또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갈대와 우르에 살던 것을 떠나라 하셨을 때, 그는 갈 곳이 어딘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순종하고 같습니다. 이 순종이 바로 온유의 표현입니다.
떠날 때 자기 조카 롯을 데리고 갔는데, 롯의 아버지 즉 아브라함 동생이 일찍 죽어서 조카
롯을 불쌍히 여기며 자기가 아들처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롯도 이제 양들과 소들과 가축이 많아지다 보니까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여기
땅이 넓으니까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난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라고 그렇게 한 것이 온유입니다.
사실 누가 뭐래도 ‘야, 내가 네 삼촌이고 어른인데다 너는 내 밑에서 그동안 있었으니까 내가 먼저 땅을 택하겠다. 그러면 다른 땅을 네가 택해라.’라고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롯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네가 먼저 원하는 땅을 택해라. 그러면 나머지를 내가 가지겠다.’라고 합니다. 이게 온유입니다. 얼마든지 자기가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안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100세에 낳았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바쳐라.’라고 하십니다. 잡아 죽여서 그걸 불에 태워서 바치라는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인신 제사를 받는 분이 아니신데,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새벽 일찍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그가 순종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온유였습니다.
나중에 야곱의 열두 아들 중 11번째인 요셉도 역시 굉장히 온유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질투 때문에 부모를 떠나고 고향을 떠나고 애굽으로 팔려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정말 죽도록 고생합니다. 이제는 잘 되는가 했더니 또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세우셔서 이집트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형들과 다시 만나는데, 형들이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자기들에게 곡식을 팔고 또 여러 대화를 했던 그 무시무시한 이집트의 총리가 자기들이 죽이려 하다가 팔아 버렸던 요셉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질투하고 미워해서 죽이려 하다가, 그래도 돈이 되니까 팔자고 해서 팔았던 그 요셉이었는데, 지금 상황이 바뀌어서 이제 총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근데 그때 요셉이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창 45:5)라고 위로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여러분, 가족 식구나 친척이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과 미움의 관계에 있는 그런 경우가 혹시 없으십니까? 온유함으로 좀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온유함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이런 것을 실천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와서 예배하며 믿는 것 따로 있고, 삶이 따로인 게 아닙니다. 삶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삶에 드러나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은 오히려 그런 어려운 관계가 됐을 때 ‘여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라고 신뢰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섬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온유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비판하고 채찍질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온유한 자가 안 되면 땅을 못 받습니다, 그 중요한 땅을!
또 사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다윗을 우리는 그동안 오래 살펴보았는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생전에 사울을 한 번도 욕하거나 저주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자기를 그렇게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람, 그것도 장인인데,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하면서 막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전혀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울이 나중에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은 다음에도 끝까지 다윗은 사울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 슬퍼하며 노래까지 짓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이 온유입니다. 원수를 오히려 선으로 갚을 줄 아는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라고는 예레미야도 그랬고, 또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도 그랬고, 그들에게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온유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온유가 예수님의 성품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전에 베드로가 칼을 들고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중 하나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랐는데, 예수님은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으라.’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천군천사를 불러서 이것을 못 막을 줄 아느냐?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주신 잔을 마시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밑에서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못 구원하네?’라고 하며 마구 조롱하고 놀리며 약을 올립니다.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힘이 없으십니까? 있으십니다. 앞에서 깐족거리고 막 약 올리니까 얼마나 밉겠습니까? 나는 지금 고통 중에 있는데 그렇게 하는 걸 볼 때, 저 같으면 ‘타임아웃!’ 하고 일단 십자가에서 내려와 싹 쓸어버리고 그다음에 다시 올라가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면 되는데, 그 사람들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그렇게 할 힘이 없어서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구원하셔야 하기에 너무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바로 이렇게 나를 위해서는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3.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온유한 사람이 어떤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인데, 다시 말해 땅 즉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땅을 받는다거나 어디서 땅이 뚝 떨어진다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정복하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정복, 세상의 정복이 온유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강한 자가 무력이나 폭력이나 자기가 가진 힘으로 정복하는 게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땅을 정복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편 37편에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시 37:11).
예수님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군사적인 침략과 정치적인 압제와 경제적인 빈곤과 사회적 혼란에서 자기들을 해방해줄 정치적 메시아, 강한 메시아, 군사를 이끌고 나오는 그러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물질적일 뿐 아니라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천국관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자기들의 해방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과도 굉장히 비슷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떤 싸우는 걸 통해 뭔가 자기 뭔가 쟁취하는 것을 통해서, 집단의 힘을 통해서, 돈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천국은 침략이나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강한 힘을 가진 영웅이나 군사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라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겁니다.
지금 여러분 대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온유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 험한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출세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유하면 안 된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을 척척 해야 한다. 온유하면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십시오. 실제로 역사를 지배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은 엄청난 일을 했지만 젊은 날 요절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기가 믿던 오른 팔에게 암살당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하다가 불가능으로 가득한 섬에 위배됐습니다. 히틀러는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잠깐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것 같았습니다.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철저한 패배였습니다. 그들 중에 지금 인류를 지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능한 것처럼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러분과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시고, 지금도 온 세계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온유의 능력이고 온유의 복입니다.
공산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을 일으켜서 세상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계급 투쟁을 통해서, 미움의 힘을 통해서 전 세계의 아주 큰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테러리스트도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적개심을 부추겨서 테러를 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미움에도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 진정한 성공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만이 땅을 차지한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공의 기준이 다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성공을 할 것이냐,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을 좇아갈 것이냐?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도 좋지만 얼마 못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성공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온유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온유해질 수 있을 것인가?
먼저는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온유한 성품이 원래 없습니다. 혹시 있더라도 그 사람을 구별해서 온유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강퍅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온유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 세리, 창기, 바리새인 등 모두에게 온유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만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에게까지도 온유를 보여주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열등의식과 우월감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상처의 치유를 받을 때 온유한 모습이 됩니다.
셋째로, 어떤 경우에도 내가 가진 힘을 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누르면서 나의 이익을 챙기는 그런 일에 힘을 사용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이큐가 엄청 높다. 이런 재능이 있다.’라고 하며 자랑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온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긍휼을 의지하면서 힘을 절제하는 겁니다. 또 이기려 하지 말고 져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이기는 겁니다.
넷째로, 무엇보다 실질적으로 화를 안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는 분노와 화는 온유의 적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지금 내 주변에 혹시 화날 일이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만이라도 화내는 일을 내가 포기한다고 선언해 보십시오. 그때 온유가 우리 안에 승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온유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온유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만드시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온유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저 사람은 원래 온유한 사람이고 나는 아니야. 나는 성격이 강해.’라고 할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이러한 온유함을 사모하며 나갈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함을 주시고 그래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서 성공하는 하늘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