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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5 ✦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사무엘하 23장 1~7절)
[들어가는 말]
요즘 한국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면 아주 많습니다. 특히 요즘 축구를 소재로 만든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뭉쳐야 찬다>, <골 때리는 그녀들> 같은 게 있습니다. 이들의 원조격인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2015년에 방송되었던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입니다. 축구는 하고 싶은데 중간에 그만두고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 아직 포기하고 지는 않은데 현실이 따라 주지 않는 선수 출신 사람들을 모아서 축구를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때 감독이 국가대표 출신 안정환 씨였는데, 감독으로 이 선수들을 훈련하면서 아주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방송인데도 부적절한 욕을 막 해댑니다. 숨기지 않고 “야! 이 XX야!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그냥 집으로 빨리 가버려!” 하면서 막 몰아붙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코치진은 이을용 씨와 이운재 씨로, 한국 최고의 경력을 가진 분들입니다.
바로 그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을 4강으로 올려놓는 데 큰 기여를 했고 그것으로 엄청난 영광을 누렸던 선수였지만, 방송국에서 그들을 감독 코치 진으로 발탁한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고 그것을 이겨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청춘FC 선수들이 겪는 한계도 넘어 봤고, 선수들이 흘리는 눈물을 수십 번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감독 코치 진이 지나가면서 선수들에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가볍게 던지는 말 같은데, 선수들은 하늘 같은 대선배이자 레전드인 그들의 말 한마디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그들의 간절한 모습이 생각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인생의 교훈이 담긴 말을 ‘마지막 말’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마지막 말을 처음부터 이해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저게 무슨 소리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선배가 말해줄 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 찾아온 위기를 몇 번 넘기면서 ‘아, 그게 그 뜻이었구나.’ 하고 깨달아지는데, 그런 것을 가리켜 ‘마지막 말’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나오는데, 그렇다고 죽기 전에 하는 ‘유언’이 아닙니다. 다윗의 진짜 유언은 열왕기상 2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내가 인생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니까 결국 이것이었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해주는 말을 뜻합니다. 인생의 깊은 교훈을 담은 말입니다.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핵심 교훈)에서 다윗은 자기의 인생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오늘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다윗이 자신을 보는 시각 (1절)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1절)
1) 이새의 아들 다윗
다윗은 먼저 자기를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새(Jesse)는 아버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자기는 평범한 농부와 목축업자였던 이새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엄청나게 훌륭한 존재로 만드셔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으로 툭 던지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골 베들레헴에 살았고, 그것도 자기 집안에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런 막내아들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대우 받는 막내아들이 아니라, 천덕꾸러기로 무시당하는 막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골 베들레헴에서 농사짓고 양을 키우던 이새라는 사람의 여덟 아들 중 막내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무엘에게 사울이 불순종함으로 그를 폐위하고 다음 왕으로 이새의 아들 중 하나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아주 잘 생기고 키 큰 형들이 아니라 막내 다윗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담당하는 사명자는 처음부터 훌륭한 사람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화려하고 번듯하게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나가다가 실패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처음에는 초라해 보이고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키우셔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성경 인물들 대부분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생애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그러자마자 바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소를 몰고 아버지 심부름도 하고 형들한테 구박도 받으면서 계속 살았습니다. 골리앗을 이김으로 일약 민족의 영웅이 된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그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도망자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것도 20대의 황금기를 도망자로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는 왕으로 세워지기까지 광야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러한 고통의 세월 속에서 왕으로서 훈련되며 빚어졌던 것입니다. 20대 시절을 도망만 다니다 끝났습니다. 요즘 20대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스펙도 쌓고 인턴십과 레지던트 등을 하며 자기 경력을 쌓아서 나중에 성공을 도모하는 시기인데, 도망만 다니다 20대를 다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잃어버린 시간, 허비한 세월처럼 느껴집니까?
그러나 그것은 허비한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사울처럼 실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연단과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그를 훈련하셨고 빚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왕 다윗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시편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의 주된 주제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주님만 의지하라. 그분은 나의 요새시다. 나의 반석이시다.” 같은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나의 요새이시다!”라고 한 것은 빈말이나 시적인 언어가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나의 반석이시다!” 자기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믿음은 그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다져지고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글이나 학문으로 배운 이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어둡고 두려운 광야에서 원수의 추격 앞에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로 보호해주신다는 사실, 자기가 모르던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다져진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생에서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꽃길만 걸으면 밟힐 때 그냥 망가지는 인생이 될 뿐입니다. 오히려 잡초같이 어려운 시간을 겪어도 일어나고 살아나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오면 불평하고 원망할 게 아니라 ‘감사하다. 나를 훈련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 기간을 믿음으로 잘 넘길 때 하나님은 나를 놀랍게 사용해주십니다.
여기서 다윗이 자기를 가리켜 ‘이새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너무 평범한 인간인데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라고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2) 높이 세워진 자
두 번째로, 다윗은 자기를 ‘높이 세워진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용사’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고생, 고생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그것은 자기가 뛰어나서 자기 능력으로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자기를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세워주시고 올려주신 것임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순간적으로 겸손을 잊어버렸을 때 죄에 빠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해주신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래도 꽤 많습니다. 물론 고통이 와도 하나님을 안 찾으면 안타까운데, 어려움이 오고 고통을 겪을 때 그 자리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며 나아가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꽤 있습니다.
그러나 형통 중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꽤 있지만, 형통 중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잘되면 전부 자기가 잘해서 잘된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기까지 갔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게 아니라는 것, 자기가 잘하거나 잘 나서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비천한 자기를 높여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될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이렇게 하셨고 그것을 세상에 보여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사무엘을 낳고 그런 노래를 불렀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런 노래(마리아 찬가)를 불렀습니다.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는 하나님, 또 높은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아유, 저는 노래를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동양적 미덕이 될 수는 있는데 사실 겸손은 아닙니다. 잘했다고 하면 ‘아유,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저에게는 노래를 잘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게 더 좋은 겁니다. 그런 건 잘난 척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강점과 약점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무슨 수학 공식처럼 탁탁 맞아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교만이 꺾이고 또 꺾인 다음에야 비로소 ‘아, 나는 정말 주님의 손에 먼지 같은 존재였구나. 훅 불면 사라지는 연기와 안개 같은 인생이었구나.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런 나를 높여주신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고 다윗이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3)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하나님도 자신을 모세에게 그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아니고 이삭의 하나님도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는지에 따라 이 사람이 지금 어떤 하나님을 고백하고 싶은지가 드러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악을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비열한 사람이고 속이는 사람이고 사기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이 된 게 아니라, 비열했던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며 빚어나가셨습니다.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도 아주 형편없다가 하나님이 변화시키셔서 바뀐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약간은 훌륭한 점이 있었는데 더 빚으신 것이고, 야곱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에 크게 역사하셔서 그를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야곱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별로 없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서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겁니까?”라고 항변하는 백성들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쌍둥이 형이 에서인데, 그는 장자였으면서도 그것을 우습게 여기다가 믿음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감정이나 정서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다루시는 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너를 부르고 택한 이상 네 인생을 네 마음대로 가도록 두지 않겠다. 네 맘대로 하다가 망가지는 것을 보지 않겠다. 너를 붙들어서 내가 원했던 모습이 나올 때까지 너눈 너를 깎고 빚고 쓸고 만들어 놓겠다.’라는 하나님의 결심을 말해주는 표현이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야곱이 한판 씨름을 합니다. 몇 시간을 씨름할 정도로 야곱은 대단히 끈질긴 사람입니다. 야곱의 인생 속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놓지 않는 악한 인간의 집념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포기시키시기 위해서 그의 삶에 많이 역사하셨습니다. 다윗은 야곱을 만드신 하나님이 지금 자기도 그렇게 만들어 가셨다는 것을 고백하며 믿음의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다윗은 자기 스스로를 “노래 잘하는 자”라고 하니까 자랑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다윗이 실제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속에는 하나님의 자랑스러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은 입만 열면 하나님을 노래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음악적으로 노래를 잘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을 늘 찬양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도우심과 구원을 수도 없이 경험했던 다윗은 “나의 반석이시고, 요새이시고, 건지시는 자이시고, 피할 바위이시고, 방패이시고, 구원의 뿔이시고, 산성이시다.”라고 하나님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창주조 하나님’ 정도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굉장히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지켜주실 때는 그냥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도 좋지만, ‘반석이신 하나님, 요새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표현이 좋습니까?
다윗은 당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어느 성을 볼 때 ‘야, 저 성은 대단히 튼튼해서 아무 적도 쳐들어오지 못하게 생겼네.’라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저 성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보호해주는 분이시다.’ 우리도 뭔가를 볼 때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것보다 훨씬 강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라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머리로만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시적 언어가 다윗의 입을 통해서 나왔고, 악기를 통해서 표현되어 나왔습니다. 지금 음악은 전해지지 않고 가사만 전해집니다. 어떤 음악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노래로 악기로 언어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눈물과 고난과 넘어짐과 또 감추고 싶은 수치까지도 전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밧세바의 간음 사건으로 엄청난 죄를 짓고 회개하면서 시편 51편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자기가 수치스럽지만 그것을 드러내며 백성에게도 공개적으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 ‘노래 잘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자’,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그분을 드러내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다윗의 온 생애가 다 노래가 되었고 찬양곡이 되었습니다. 그 노래는 자기가 잘났다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노래였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언어가 우리 입에 계속 있으면 우리 삶도 놀랍게 될 것입니다.
2. 다윗이 인생을 사는 방식 (2절)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2절)
다윗은 왕으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사는 이 자세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왕이 없는 시대에 사는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왕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인생을 살았던 방식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혀에 있다는 고백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가 사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는 방식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 머리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었다는 겁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것인지 생각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요즘도 많이 쓰는 단어가 ‘리더십’입니다. 교회에서도 리더십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책 중에도 <영적 리더십(Spiritual Leadership)>도 있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목회자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자질 중 하나가 바로 리더십입니다. 목사가 리더십이 있어서 잘 이끌 수 있는가를 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리더십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담임목사뿐 아니라 모든 목회자, 당회원, 직분자 등 사람의 리더십이 자꾸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리더십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이끌고 가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고 가야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가?’ 하고 교회가 나가야 하지, ‘이것은 담임목사가 원하는 방향인가? 장로가 원하는 방향인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목장과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목장과 가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방향인가를 늘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교회의 리더십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늘 존중하고 예배하는 리더십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다윗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다윗은 백성을 마구 억압하거나 탄압하지 않았고, 혼자 통솔하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힘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좀 한심스러울 정도로 당하고 쫓기고 바보같이 살 때가 많았습니다. 도망자 시절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 당연히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모든 사람이 말할 때도 아니라고 하며 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답답할 정도로 살았던 다윗을 하나님이 쓰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혼자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도망자 시절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또 왕이 된 후 백성에게 다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백성을 이끄는 다윗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소중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가정을 보면, 자기가 나은 자녀도 자기 말을 안 듣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의 삶> 때도 다루는데, 그 큰 이유는 자기 생각으로 자녀를 통제하려 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게 이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라.’라고 하니까 아이가 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해야겠다.’라고 하며 자기부터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부모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가 잠시 잘못 갈 수는 있어도 결국 돌아오게 됩니다. 그 길로 같이 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갑자기 되는 게 아니라 평소에 훈련되어야 합니다.
3. 통치의 원리와 다윗 언약 (3~7절)
1) 생명의 빛과 같은 통치 (3-4)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3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이 흔히 말씀을 전할 때 사용하던 구절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말씀을 들으라.” 다윗은 마지막 말로 노래를 하면서 이 노래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반석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견고하심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한 약속이다.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올바로 갈 수 있지, 내 맘대로 가다가는 잘못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평하게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나중에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도 공의로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공의로 통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의라는 것은 무조건 법대로 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방향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4절)
‘돋는 해의 아침 빛’ 같으신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될 때마다 일출을 보겠다고 난리입니다. 이번에 코로나 상황이 조금 풀리니까 한국에서는 정동진에 가서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엄청난 인파가 몰렸습니다.
여러분, 아침에 구름 한 점도 없는 푸른 하늘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비가 내린 다음 빛이 좍 비치는 신비로운 모습에 거기서 새 풀이 돋아나는 물기 묻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셨습니까? 바로 이런 것들이 메시야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이때로부터 약 천 년 후에 예수님께서 메시야(그리스도, 구원자)로 오시는데, 그 모습이 그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아침에 일출의 아름다운 모습, 아침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모습, 비가 온 다음 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모습, 이런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어둠과 그늘이 물러가고 생명과 회복이 임하게 됨을 암시하는데, 예수님이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과 회복을 주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사가랴는 '돋는 해가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친다'(눅 1:78-79)고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또 마태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라고 묘사했습니다. 바로 그런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2) 영원한 언약 (5-7)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5절)
‘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와 내 집을 이렇게 돌보아주셨다. 주신 약속을 이루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은 일차적으로 자기를 이어 왕이 된 아들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것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질 것이 예언된 것입니다.
“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6-7절)
한마디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이지만 사악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오셨고 하늘로 가셨는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어유, 예수님이 지금 오시면 안 되는데. 나중에 오세요.’라고 두려워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축제의 날, 행복한 날, 기쁨의 날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악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축제의 날, 행복의 날, 기쁨의 날입니다.
가시나무 밭에 난 가시나무는 뽑혀 불에 태워질 존재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이렇게 멸망할 것임을 암시해줍니다. 또 ‘철과 창자루’(7)는 사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메시아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불사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무엇보다 다윗 언약이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가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윗은 마지막 말로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로서, 인생의 가장 핵심 교훈으로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나가는 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작년 가을 수요예배 때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구두 수선공 시몬은 외상값을 받으러 집을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저쪽에서 벌거벗은 채 교회 담벼락에 기대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의 이름은 미하일(‘미카엘’의 러시아어 발음)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양심에 찔려서 그곳으로 돌아와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입히고 털 장화를 신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옵니다.
원래 미하일(미카엘)은 하나님의 천사인데, “가서 산모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갓 태어난 쌍둥이가 엄마 없이 살 것을 생각하니 너무 불쌍해서 차마 여인의 영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을 받아 땅으로 추방당한 것입니다. 미하일은 하나님이 내 주신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달을 때까지 하늘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세 가지 과제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시몬이 속옷 바람에 빈손으로 미하일을 데리고 집에 도착하자 아내 마트료나는 화를 내면서 잔소리를 퍼부어 댑니다. 그래도 미하일을 보더니 불쌍히 여기면서 당장 자기들도 내일 아침 먹을거리가 별로 없지만 빵을 만들어 먹이고, 남편을 위해 만든 내의를 입히고, 자기네 집에서 지내도록 허락해 줍니다.
이때 미하일은 이들 부부의 얼굴에서 첫 번째 질문인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깨닫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하일은 시몬에게 구두 수선을 배워 같이 구둣방을 운영해 나가는데, 어느 날 아주 비싼 모피 외투를 입은 부자 신사가 최고급 독일산 가죽을 들고 와서는 매우 거만한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1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지도 않고 꿰맨 데가 터지지도 않는 튼튼한 장화를 만들어라.” 만약 1년 안에 망가지면 감옥에 쳐 넣고, 망가지지 않으면 그때 가서 품삯으로 10루블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체격이 아주 크고 몸이 무쇠로 만들어진 것 같이 무섭게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하일은 그 남자의 뒤에서 그를 데려가려고 서 있는 죽음의 천사를 봅니다. 그 부자가 돌아가자 미하일은 그 가죽으로 구두가 아닌 슬리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때 부잣집의 하인이 찾아와 부자가 가는 길에 갑자기 죽었다면서 장화 대신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 순간 미하일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알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아는 지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남자는 자기가 오늘 죽을 운명임을 알지 못하고, 1년을 신어도 망가지지 않을 튼튼한 장화를 주문했지만, 정작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관 속에서 신을 슬리퍼였던 겁니다.
6년째 되던 해 어느 날, 한 여인이 다리를 저는 여자아이와 다른 여자아이의 신발을 맞추러 옵니다. 전에 미하일이 갓 태어난 쌍둥이는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 엄마의 영을 데려가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던 바로 그 쌍둥이 아이들이었습니다. 엄마의 영혼을 거둘 때 엄마가 한 아기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그 아이는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다른 여인이 이 쌍둥이 아이들의 엄마가 죽자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데려가서 마치 자기 아이들인 것처럼 잘 키워주었던 것입니다.
그 쌍둥이는 비록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지만, 다른 사람의 사랑에 의해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미하일은 마지막 질문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에도 해답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세 가지 질문에 해답을 찾아 용서를 받은 미하일은 시몬 부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한 후 갑자기 날개가 나타나면서 힘차게 날개 치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그 이야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살아서 신을 장화인지 죽어서 신을 슬리퍼인지를 몰랐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다윗이 잘난 조건 때문에 역사의 별로 빛난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특히 그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는 마지막 말처럼, 그는 하나님이 높이 세워주신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는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세우고 사용하시는 일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에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원망이나 불평이 없어지고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서 있으라고 하시는 자리를 정확히 볼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할 사명은 이것이다.’라는 것만 알고 그리로 나아가면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다윗도 이 하나를 깨닫기까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말로서 그것을 선포하고 자기 인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인생 방식이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그대로 펼쳐져서,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진정으로 영광 돌려드리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