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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3 ✦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신 화해”
(사무엘하 21장 1~14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사업을 할 때의 계약을 비롯해서, 직장에 들어갈 때 계약서를 쓰고, 집을 사거나 렌트할 때 계약서를 쓰는 것이 다 약속입니다. 그런 법적 계약뿐 아니라 우리끼리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하는 것도 약속이고, 예배 시간도 약속입니다. 특히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 뭔가를 사달라고 할 때 “말 잘 들으면 사줄게.”라고 하는 것도 약속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약속을 많이 하는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럼, 나는 약속을 잘 지키지.’
그렇다면 5년 전 했던 약속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50년 전에 했던 약속은 어떻습니까?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라고 할 분들도 있습니다. 500년 전에 했던 약속은 지키십니까? 그때는 당연히 우리 중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상님들이 했던 약속까지 다 조사해서 안 지켰으면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500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500년 전에 한 약속까지 다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500년도 하루 같이 보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500년 전 여호수아와 기브온 족속이 맺은 평화 조약을 사울 왕이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이 기근을 내리신 내용이 나옵니다. 약속을 안 지키니까 징계하셨습니다.
5년도 50년도 아니고 무려 500년 정도 전에, 그것도 속아서 맺은 평화 조약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지키라 하십니다.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바로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 우리는 사실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500년 아니라 5천 년이 지나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어떻게 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 즉 한 번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너 왜 여기 들어와?’라고 하실 때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셔서 들어갑니다.’라고 하니까 ‘그건 2천 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달라졌지.’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하지만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약속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그 효력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깨닫고 믿으면 자신의 말씀이 됩니다.
둘째, 과거의 청산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리해서 잘못 청산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미래를 향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하면 오히려 심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 기근의 원인 (1~2절)
다윗이 사울이나 그 후손들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사울 집안과의 관계가 다윗이 통치하는 내내 껄끄러웠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지난번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가던 다윗에 대한 시므이의 저주 내용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향해 ‘살인자여!’라고 하며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된 살인자라는 식으로 저주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정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왕이 되어 귀환한 다윗은 시므이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압살롬의 반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시므이에게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이 진정한 용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필요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리하라고 유언한 것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이 모든 것은 다윗과 사울의 집안 사이에, 나아가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완전히 나뉘어 망할 때까지 그것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두 지파가 정의와 생명을 위해 연합할 때 이 땅에 성취되는 것인데, 지파들간에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반역만 하다가 망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뿌리 깊은 분열과 갈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은 이렇게 몇천 년 전뿐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심지어 같은 민족이나 나라 안에서, 또 같은 진영 안에서도 분열하고 갈등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이 분열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의 갈등이 표면화된 세바의 반역을 이야기한 다음에 다윗과 사울의 집안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결국 다윗의 통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 믿음의 사람, 그리고 위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도 많이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것, 그의 통치에는 한계에 있었다는 것, 그래서 진정한 소망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서로 다른 지파와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용서와 이해와 평화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1절)
이 이야기는 다윗의 통치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구약학자들이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실은 이 내용이 9장 전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9장에서 다윗이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마치 왕자들 중 하나처럼 거두고 상에서 먹게 해준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로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사무엘하의 뒷부분에 놓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배경입니다. 즉, 기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정기적으로 기근을 겪은 나라입니다. 고대에는 비가 안 오면 죽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땅은 건기와 우기가 아주 뚜렷합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우기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건기로 아주 날씨가 좋습니다. 날씨가 로스엔젤레스 쪽과 아주 비슷합니다.
적어도 다윗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그다음이 다윗인데, 사울 때는 사사시대에서 넘어와 약간 과도기였습니다. 그래서 사울 정권은 강력한 중앙 정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뭄이나 전염병과 같은 재해를 대비한 국가적 체계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해만 가뭄이 들어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3년이나 연속으로 가뭄이 들었다면 죽음의 위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재앙입니다. 실제로 가뭄이나 지진이나 전염병은 고대 사회에서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왕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다윗은 회의를 소집하고 장관들 불러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국무회의를 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이 말을 풀어서 보면 ‘주님의 얼굴을 구했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3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제발 저희에게 비를 내려주십시오.’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기근이 든 첫해부터 다윗은 ‘왜 기근이 들었습니까? 그 원인을 알려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원인을 여쭤보며 간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근이 다윗의 통치 중 어느 때에 발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여쭤보며 모든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때도 하나님께 여쭤보며 나아갑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의 기근을 해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아니라, 통치자이고 왕인 다윗의 한계를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서 지금 이스라엘 국기 안에 그려진 별도 다윗의 별이고, 최고의 왕이었고,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그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오실 정도로 아주 훌륭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정치적인 결정도 많았고, 그런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해친 적도 많았고,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을 영웅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윗 위에 계시며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이지, 다윗을 우상이나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는 메시지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리스바라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 오히려 다윗이 귀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늘 우리처럼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종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너무나 많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악을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복을 받아라.”라고 했고,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을 종종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으로 한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서 다윗은 사울과 그 가문에 3년 기근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사울 집안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하며, 그 책임을 그 집안에 돌리는 겁니다. 다윗에 따르면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화친 맹세(수 9:15-27)를 어기고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2절)
여러 구약학자들이 말하기를,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죽였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어보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기록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미드라시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 그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오래전 다윗이 젊은 날 너무 인기를 끄니까 사울이 질투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자기 사위인데도 죽이려 해서 다윗이 도망갔는데, 급하게 도망하느라 무기도 없이 갔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자기가 죽였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고 그것을 받아서 들고 떠났습니다.
그런 일 때문에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처형합니다.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의 손으로 죽일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멜렉이 유일하게 도망을 쳐 다윗에게 와서 나중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날 그 자리에 기브온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때는 대략 BC 1000년 정도이고, 모세와 여호수아 때는 BC 1500년경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벌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화친을 맺으려 시도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속여서 낡은 옷을 입고 음식도 곰팡이가 난 것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며 멀리서 왔으니 화친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평화 조약을 덜컥 맺었습니다.
얼마 후 알고 보니 그들은 바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깰 수가 없었고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로 살도록 합니다.
그때 놉 성소에도 기브온 사람들이 제사장들을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그들을 죽일 때 거기 있던 기브온 사람들도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유대인의 전승에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복수를 위해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내달라고 했는데, 거기서 죽은 기브온 사람들이 일곱 명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제단 봉사자였기 때문에 사울의 제사장 학살 때 함께 죽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죽은 기브온인이 일곱 명이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일곱 명을 요구했다는 것도 약간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왕이 신의 이름으로 맺은 맹세를 깰 때 국가적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과 맺은 맹세를 어긴 것이 사실이라면, 3년 기근이라는 국가적 재앙은 다윗에게 사울 집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기근의 원인이 사울 집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기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공감을 얻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울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맹세에 대한 다윗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히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다윗이 너무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여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죽음에 넘겨줄 때 그것은 다른 하나님의 맹세를 어기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나단과 맹세를 했는데, 그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의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 20:15) 하고 부탁하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의 맹세는 직접적으로 요나단과 그 후손들에게만 해당하지만, 요나단의 의도는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포함한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왕위를 빼앗은 왕이 이전 왕조 사람들을 살려두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왕권을 잡으면 이전 왕조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그러지 않도록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 맹세를 넓게 해석하여 사울의 다른 후손들도 살려 주었어야 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선택된 자’라고 사울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사울의 음악치료사이기도 했는데, 사울에게 악한 영이 내릴 때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면 악한 영이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군으로 나가서 싸우기도 했고, 사위로서 많은 전과를 세운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 하니까 다윗이 도망자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라는 이유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으로 왕이 된 것이라면,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으면 이전 왕과 사람들을 죽이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사울의 자녀들을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사울의 집안은 거의 몰락했기 때문에 죽일 것도 없습니다.
요나단과의 맹세를 넓게 해석해서 그렇게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면모가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려둡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어릴 때 떨어져서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다윗이 살려두었을까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심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엄청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중 ‘내가 다윗보다 믿음이 더 좋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100% 선하거나 100%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다 선한 면과 악한 면이 있는데, 어느 쪽이 더 드러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100%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윗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왕으로서 또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더러운 짓도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주님을 잘 믿어보려고 합니다. 이 일요일 아침 황금 같은 시간에 왜 이렇게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지.’라고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러운 것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만 동시에 그렇게 악한 면과 죄악 된 면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일부가 아니라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입니다. 여호수아 때 했던 맹세 때문에 이스라엘 영주권을 얻어서 나중에 시민권까지 얻어 그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은 다릅니다. 그런데 맹세를 어긴 것이 사울의 민족주의 정책이라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왕국을 순혈주의, 오직 단일민족 이스라엘 사람의 국가로 만들려는 열심을 가지고 그 가운데 사는 기브온 사람 같은 이방 민족들을 핍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 대한 사울의 정책을 그보다 훨씬 더 과장해서 부풀려 묘사합니다. 사울이 그들을 죽이고자 했다는 것, 즉 완전히 그들을 끊어 버리려 했다고 합니다.
2. 기근에 대한 해결책 (3~9절)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3절)
이처럼 사울에 대한 반감을 다윗이 상기시킵니다. 기브온 사람들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울의 잘못이라는 것을 굉장히 부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근 때는 민심이 굉장히 흉흉하기 때문에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속죄’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 말속에 피흘림 혹은 희생의 개념이 들어 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들을 속죄물로 달라고 요청하도록 이끌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4절)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은 피해자였지만, ‘우리에게 돈으로 보상해주십시오.’ 또는 ‘우리도 복수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자기들이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는 말도 이민자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이방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로 물러가며 자기들은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이 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돈도 복수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뭐든지 이야기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라고 자꾸 뭔가를 하라고 부추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 왕이 원하는 게 따로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의중을 파악하고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5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5-6절)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단일민족 정책, 순혈주의 정책이 있기는 있었지만 다윗이 그것을 부풀려서 과장하여 말하니까 그 의중을 정확히 알고 ‘그럼 이제는 우리가 보복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자손 중 일곱 남자를 요구합니다.
기브온의 요구대로 사울의 후손을 넘겨주는데, 이것도 다윗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분명히 맹세를 어긴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죄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을 깼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죄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을 깨면 왕이 반드시 그것을 깬 사람에 대한 심판을 집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이방인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나무에 매달아 죽게 하는 것은 기브온 사람들을 ‘피의 복수자’로 간주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들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집안사람들을 사적으로 죽이도록 허락하는 게 됩니다. 원래 왕인 자기가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보복하도록 내어주겠다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범죄는 반드시 왕이 주도권을 가지고 사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단순 살인죄라면 개인적으로 보복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말은 해놓고서는, 처형에 있어서는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살인 사건이나 단순 살인죄처럼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처형하도록 허락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울의 후손들을 매달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다윗의 귀에 좋게 들리도록 말한 것뿐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한다면 기브온 사람들이 처형하면 안 되고 다윗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브온 사람들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자기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들을 직접 죽이면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사울에게 원한이 있는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한 다음에 우리아를 죽일 때도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암몬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죽였습니다. 여기도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려 사울의 자손들을 죽입니다.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7-9절)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려줍니다. 그러나 그가 므비보셋을 살려준 진짜 이유는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이 아니라 므비보셋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북동쪽인 길르앗 지방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 꽁꽁 숨어 있어서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를 찾고 보니까 그가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위협이 안 되기 때문에 살려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볼 때, 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사울 집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사울의 후손들을 모두 숙청한 겁니다. 다윗의 주장대로 사울의 범죄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재판권이 왕에게 있으니까 자기가 해야 하는데,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 집안의 처형을 맡겼다는 것은 다윗이 기근을 자신의 정적 제거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근 자체를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도 시도하고 저것도 시도했지만 안 되었다고 누가 왕을 비난하겠습니까? 사울의 후손을 죽였지만 기근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왕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기근이 왔다고 하셨는데, 오래전 죽였는데도 왜 하필 이때 기근이 왔는지부터가 이상합니다.
어쨌든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해결하게 해준 다음에도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기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는지도 사실 의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뭔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셨던 것은 사울의 후손들을 처단하는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들을 향한 다윗의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근이 임한 것은 사울의 죄나 사울 집안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울 집안에 대해 여전히 다윗이 품은 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속으로 사울 집안과 아직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다윗의 마음속에 사울에 대한 증오가 있고, 그 집안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습니다.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울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화해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앞으로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집안을 완전히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다윗의 후손들이 다른 지파들과 화해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기근을 주신 이유는, 사울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진짜 이유는 다윗의 마음의 치유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정말로 화해하기를, 원수 집안이라도 사울의 집안을 품어주고 용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3. 사울 집안과의 진정한 화해 (10~14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0절)
이 이야기의 결론이 약간 의외인데, 의외의 주인공이 바로 사울의 첩이었던 리스바라는 여인입니다. 리스바는 자신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모셋이 사울의 첫째 딸인 메랍의 다섯 아들과 함께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약 6개월 동안이나 산속에서 베옷으로 만든 간이 천막 아래에서 시체들을 지켰습니다. 매장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라도 왕의 명령이 없이는 죄수의 시체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리스바는 보리 수확이 시작되는 4월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산에서 아들들의 시체와 함께 생활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들을 사랑해도 누가 아들 시체를 6개월 동안이나 붙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체들이 새나 들짐승에게 훼손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들들의 죽음을 항의하고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1-12절)
리스바가 한 일이 다윗에게 보고되니까 다윗은 그 일곱 명의 유골뿐 아니라 길르앗 야베스에 묻힌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거두어서 사울의 조상 무덤에 정식으로 매장하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들을 위해 애가를 짓고 그들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히 치러 주었지만, 정작 그들의 유골은 기브아의 조상 무덤에 매장해 주지 않고 그냥 저쪽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애가를 지은 것과 옷을 찢고 운 것에도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장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과 뼈를 수습해서 조상의 무덤에 안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당시에는 다윗이 아직 그럴만한 정치적 힘이 없었다고 해도, 왕이 된 다음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요단 동편 길르앗 땅에 방치해 두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울의 집안과 마음속에서 화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3년 기근을 빌미로 사울의 일곱 후손을 죽인 것도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우리와 똑같이 부족함이 많은 사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대한 그도 그랬다면, 우리는 얼마나 만이 부족합니까?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13-14절)
여기 보십시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울 집안 사람들을 처형했을 때 아직 비가 안 내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골을 가지고 모든 것을 돌려놓았을 때, 다 거두어 화해했을 때, 바로 그때 비가 내립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오늘 리스바라는 한 여인의 헌신과 눈물의 간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움직였는지, 특히 어떻게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의외의 인물 리스바가 끝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다윗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결국 사울의 집안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 결과 비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리스바 같은 중보자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중보기도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다윗이 변화되어 진정한 화해를 이루었고, 그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아니 다윗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이웃과 원수까지도 마음에 품고, 해결하지 않은 채 계속 덮어두고 사는 게 아니라 결국 그것을 해결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임하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