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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9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2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장 3~12절)
0. 들어가는 말: 복의 기준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면 왜 행복한가? 또는 아주 불행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면 왜 행복하지 않은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하며 시작하는데,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의 팔복(마 5:3-10)은 “복이 있나니”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꿈꾸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불행해지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유명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행복론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철학 책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행복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행복’이라는 말 대신 ‘복’이라고 나옵니다.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입니다. 그게 진짜 객관적인 행복, 참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너는 행복한 존재다.’ ‘네게서 행복이 보인다.’ ‘행복이 네게 있다는 것을 내가 알려준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어느 정도는 행복하지만 그 정도까지 행복한 건 아닌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행복하다고 하실지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을 위한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행복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팔복 내용은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라고 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참된 행복(하늘 복)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주신 복의 선물꾸러미는 풀어보지도 않고 아직 다른 데 뭔가 없는지 자꾸 나가서 찾으며 밖에서 헤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 ‘이미 행복은 너에게 주어졌다. 그걸 풀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안 풀고 자꾸만 다른 데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다른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행복론과는 다릅니다. 요즘 긍정 심리학에서도 행복을 많이 다루는데, 그런 행복과는 다릅니다.
몇 년 전 설문조사를 했었는데 국민 행복 지수 1위가 아시아 변방의 부탄이라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19년에 UN에서 조사한 ‘UN 국가별 행복지수’에서는 95위로 나옵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겁니까? 왜 1위에서 최하위권으로 떨어진 겁니까? 그것은 그전에 했던 조사와 다른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1위를 했을 때는 국민이 행복한지 주관적 느낌을 조사한 것이고, 95위가 되었을 때는 삶의 질, 사회 인프라 등을 따졌더니 부탄은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한국은 54위였고, 미국은 19위였으며, 1~3위는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였습니다. 사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게, 그런 나라들의 자살률이 또 얼마나 높습니까?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런 나라에서 왜 사람들이 못 살겠다고 하는지 참 의아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조건이 다르다는 겁니다.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측정할 때마다 행복했다 불행했다 왔다 갔다 한다면, 그런 행복이 참된 행복이겠습니까? 어떤 때는 행복했다, 어떤 때는 불행했다 한다면, 진짜 행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좋은 조언’(good advice)이 아닙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good news)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누가 복된 사람인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팔복’을 보면, ‘복을 받기 위해 뭔가를 해라.’라고 하시지 않고, 특정한 어떤 ‘태도'나 ‘상태’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나중에 마태복음 7장에서 나오지만(17절), 예수님은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아름다운 열매’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쁜 나무라면 나쁜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이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 이전에 존재가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복 이전에 인격적인 성품과 관련된 복, 특히 영적인 복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복을 받으세요.’라고 하지 않고 ‘하늘 복 받으세요.’라고 하며 하늘 복을 구하는 겁니다.
팔복이 바로 하늘 복입니다. 주님이 이야기하시는 진짜 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아야 팔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팔복 안에는 예수님의 성품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행동의 모델과 목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는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내 제자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고 보여주셨는데, 사실은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팔복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보통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가리켜 ‘야, 저 사람 참 복을 많이 받았네.’라고 말합니까? 사업을 하다 대박 나서 돈벼락 맞은 사람, 몇천만 달러 복권에 당첨된 사람, 자식이 잘 풀린 사람, 명문대를 나온 사람, 부잣집에 태어나고 부자인 사람, 인물이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 아니면 높은 자리에 올라간 정치인 등을 꼽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오복’이라고 해서 장수, 부귀영화, 평안함,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임종을 평안히 맞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헬라 문화에서는 훌륭한 지식을 두는 것, 물질적으로 부요한 것, 지혜가 특출한 것을 복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을 복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하다.’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것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팔복의 내용은 예수님 당시 1세기 헬라 문화권에서 경멸받아 마땅한 것들이었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 무시당할 만한 것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고 하는 것들인데,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blessing)은 행복(happiness)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행복이 영어로 happiness인데, happen 즉 우연이나 행운으로 주어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복은 blessing인데 bless라는 단어는 bleed(피 흘리다)와 같은 어원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피 흘림(bleed)과 희생으로 주어지는 게 하늘 복, 진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모두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피 흘림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팔복도 내용을 보면 다 역설적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들이 많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반대가 되는 역설로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지금 이 세상의 질서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빌라도가 심문할 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기준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바로 그 하늘나라, 천국의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천국 백성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는가? 그것을 이 산상수훈, 특히 팔복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1. 가난한 마음이란
5~7장이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인데, 그중에서도 마태복음 5장 3~12절을 특별히 ‘팔복’ 또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품’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특별히 팔복 중에서도 오늘 본문 말씀인 5장 3절은 팔복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팔복의 여덟 가지 복이 산상수훈을 여는 열쇠가 되고, 5장 3절은 바로 팔복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겁니다.
사실 이 팔복은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성품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라시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3절)
누구나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가난’일 것입니다. ‘가난해지세요.’라는 인사는 없습니다.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는 많이 하지만 ‘가난해지세요.’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사상가는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가난은 퇴치해야 할 악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갖기지 사회악을 키우는 원인이 가난이기 때문에, 가난해서 저지르는 범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이라는 단어를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런데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아예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가난해지세요.’라는 인사와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돈과 향락을 우상처럼 받들고 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정말 매력 없는 말이며 거부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가 왜 가난해지고 싶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가난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를 알게 되면 이것은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가난’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토코스’(ptokos)인데, 이 말은 재물을 적당히 가지고 살면서 약간 아쉽다고 느끼는 정도의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우리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모았는데, 어떤 사람이 ‘나는 가난해서 못 합니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가난한지 보았더니 은행에 몇천 달러가 있는데도 ‘내가 더 가난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난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가난하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동냥하는 ‘거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부잣집 대문 밖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 구걸만 하면서 살다가 죽은 나사로와 같은 사람을 일컬어 ‘프토코스’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의미로 가난이란 용어를 여기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가난은 복이 아니라 아주 저주스러운 겁니다.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아무리 듣기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은 마치 가격표를 바꿔 달아 놓은 상품을 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예를 들어, 5만 달러짜리 엄청난 드레스 붙어 있던 가격표를 떼어다가 200달러짜리 셔츠에 옮겨 붙였다고 해서 그 셔츠가 엄청난 드레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가난이고, 부한 것은 부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게 아니라 ‘심령이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니면 그냥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그러셨으면 얼마나 인기를 끄셨겠습니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의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유한 자는 복이 있다. 그러니 부자 되세요!’라고 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하신 말씀이니까 진리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게 아니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심령’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니까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만 보기가 힘들어지는 겁니다. 사실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도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제가 왜 그동안 산상수훈을 하기를 꺼리고, 하더라도 아주 뒤에 하기를 원했던 것은, 누가 들어도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아할 내용이 없습니다. ‘설교할 때 30~40분 정도 꾹 참아주고, 나가서는 내가 알아서 살아야지.’라고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선입관을 내려놓고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성품이 마음의 가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뭔가 남에게 줄 것이 있고 베풀 수 있을 때는 떳떳하고 자신만만합니다. 그런데 줄 것이 없으면 미안하기도 하고, 줄 게 없는데 자꾸 나가서 주장할 수도 없고, 남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뒤에 숨는 겁니다.
이같이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처절히 느끼고 깨닫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내가 진짜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기도를 잘하고, 말씀을 많이 읽고, 전도를 잘하고, 헌금을 잘하고, 봉사를 많이 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또 사랑과 용서밖에는 바랄 수 없는 사람인 상태가 바로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입니다.
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길
여기에 여덟 가지 복이 나오는데, 각 복을 분석해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복이 있다는 선언이 있는데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행복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행복의 이유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먼저 ‘복이 있다.’ 하고 행복 선언을 한 다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라고 상태를 이야기하고, 그다음에는 ‘천국이 너희들 것이다.’라고 행복의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천국이 너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을 받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행복 선언부터 하십니다. ‘이러이러하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냥 ‘너희는 행복하다.’ 하시며 선물부터 풀어놓아 주시는 겁니다. ‘하늘나라를 얻는 사람은 행복하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얻는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삼단논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을 얻은 사람은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을 얻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는(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앞뒤가 맞지 않고, 상식에도 어긋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는 가난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다들 생각하실 겁니다. 이것은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인 말로 들릴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경은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거부감이 들거나 좀 부담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쏙쏙 빼서 믿어야지.’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쏙쏙 빼는 사람들이 뭡니까? 그게 바로 이단입니다. 이단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구절들만 쏙쏙 뽑아서 자기들의 이론을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앞뒤가 안 맞고 상식에 어긋나고 논리가 안 되고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이고 특히 내 마음에 안 들고 부담스러워도,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듣고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인생은 망합니다. 사람끼리도 달콤한 말만 듣고 살면 그 사람은 정말 나약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쓴 소리가 약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첫 번째 복은 세상에 없는 복이고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복입니다. 이건 정말 세상 가치관과 다른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꺼리는 가난을 이야기하시고, 애통을 이야기하시고, 또 온유와 굶주림과 목마름 같은 것들을 복되다고 ‘축하합니다. 복되십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란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하늘 복이고 이런 것이 하늘의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엄청난 사건이지만, 구원받은 다음에 정말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순간 결단해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심령의 가난이라는 것은 사실 모든 복의 열쇠가 됩니다. 팔복에서도 가장 앞에 오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됩니다. 이 복을 받지 못하면 다른 복은 볼 수도 없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모든 복의 기본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게 뭡니까? 그것은 비우는 겁니다. 다른 복들을 보십시오. 채우는 것들입니다. 일단 마음이 비워져야 다른 것들을 채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답고 비싼 그릇이 있어도 그 안이 더럽고 곰팡이가 나서 썩어 있으면 누가 거기에 좋은 것을 마시려고 붓겠습니까? 깨끗해야 그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일단 더러운 것을 비우고 그다음에 거기다가 좋은 것들을 채워야 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특히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서는 거기에 뭘 채워도 되지 않는 겁니다.
천국에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겠습니까?’
심령(마음)이 가난하다고 이것이 꼭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엄청난 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꼭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영향은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마음의 가난함, 영적인 가난함, 영적 빈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 ‘마음이 가난하다’고 번역하지만, ‘심령’이 헬라어 원어로는 ‘영’입니다. ‘프뉴마’라는 단어인데, 성령을 말할 때도 대문자를 써서 표기하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에서 그 ‘영’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우리 인간의 영이 함께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 못할 때 우리는 가난해지고 빈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 내가 지금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내 마음이 너무 가난한 상태이구나. 내가 정말 비천한 상태이구나.’라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서 교회 예배를 못 가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못 갈 때, 가면 가는 대로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아무 영향이 없고 똑같다면 심령이 가난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예배하지 못했다면, 마음에 찔림이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이 올라오고, ‘내가 비록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데에 몸이 아파 나가지 못하지만 이 자리에서라도, 누워서라도 하나님을 예배해야겠다.’라는 갈망이 올라오는 상태가 심령(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고, 아무 감각이 없고, 가든 안 가든 똑같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영적으로 병이 생긴 겁니다. 문제가 생긴 겁니다.
우리가 며칠 굶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니엘 금식으로 채식만 해도 배가 허전한데, 며칠을 굶으면 배고픈 게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 먹어서 배가 고픈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자기가 먹은 줄 알고 있다면 뭔가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겁니다.
심령의 가난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어떤 행동이라기보다 태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나는 나를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라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 이사야 6장을 보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하며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며 자기가 파산했다고 하며 자기의 영적 가난을 고백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영적 가난을 고백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난하니까, 비어 있으니까,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히 채울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복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심령(마음)의 가난함이라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바랄 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이것이 느껴집니다.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만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자신의 가난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분이신데, 그분 앞에 내가 서면 나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엄청난 부자 앞에 섰을 때 ‘나는 참 가난하구나.’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돈을 조금 가졌다고 부자 앞에서 돈자랑을 하면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찾아보니까 현재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 1위가 베르나르 아르노라는 사람인데, LVMH 회장입니다. 그게 뭔가 하면 루이뷔통을 가진 회사입니다. 무려 2,137억 달러를 갖고 있습니다. 감이 안 옵니다. 일단 백만이 넘어가면 느낌이 없습니다. 2위는 엘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 회장인데 1,370억 달러를 갖고 있습니다. 3위는 아마존 회장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인데 1,232억 달러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가서 ‘내가 얼마 있는 줄 알아? 이래 봐도 내가 2백만 달러가 은행에 있는 사람이야.’ 그러면 아르노 회장이 듣고 뭐라 하겠습니까? ‘아, 예, 훌륭하십니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속으로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진 게 이 정도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비웃지는 않으시지만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자기가 가난한데도 가난한 줄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볼수록 자신의 가난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난함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가 어느 수준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이 어느 수준인 것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랑할 수 있고 자기가 부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마음(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특징은 영적 갈망이 크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가진 게 없으니까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을 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나오는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세리이고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파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오,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고, 십일조를 드리고,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하고, 나는 이렇게 의로운 삶을 살기에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럽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한 세리가 예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었고, 바리새인은 전혀 의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와 같은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다는 것은 또한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낮추면 높여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큰 능력이 있고 재능이 여러 가지가 있어도,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와서 ‘나는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며 나오는 그런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초월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재능이 아무리 많아야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말씀으로 온 우주를 만드신 분 앞에서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못 잡았습니다. 이 사람은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어디에 고기가 있는지 다 아는데 그날밤은 하나도 못 잡았습니다. 그 후 아침 일찍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부의 상식으로는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리면 안 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가서 그대로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목수가 어부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훈수 둔 것인데, 상식에 어긋납니다. 그렇지만 말씀대로 했더니 엄청나게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그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특징은 남의 말이 들린다는 겁니다. 특히 이런 진리의 말씀이 들립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리지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뭔가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까 엄청난 수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요즘은 왜 이런 기적이 없는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주님, 저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거룩하신 예수님, 전능하신 분 앞에 섰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이고 죄인인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기가 고기를 많이 잡으며 먹고 살 수 있었던 게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된 것이구나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그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베테랑 어부가 그날 밤 어떻게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을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데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동안 고기를 잡고 살았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엄청난 하나님 되심과 신성에 압도가 되어서 그런 겁니다. 자기 능력을 의지할 때는 실패하지만 주님을 의지할 때는 성공하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만 의지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다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5, 새번역)
‘저는 주님을 떠나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상대로(?) 아멘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않고서는 천국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야 이미 천국을 받은 사람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면 천국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심령이 가난한 자를 원색적으로 말하면 ‘영적 거지’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모든 부족한 점을 다 채워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의 왕이신 주님의 관심과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예배에 올 때마다 갈급한 마음으로 교회당에 와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아프거나 어떤 사정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면 있는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가정예배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또 생방송은 더 이상 안 하지만 온라인으로라도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