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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6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3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4)

 

[들어가는 말]

 

제가 처음 기타를 배우던 게 중학교 때였는데, 그게 19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통기타 가수들이 굉장히 많이 활동하던 때인데 인기를 많이 끌었고, 그래서 저도 교회 선배들과 친구들이 기타 치는 걸 보고서 나도 좀 쳐 봐야겠다 생각하고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복음성가집이 나와 있는 것을 가지고 열심히 치면서 노래도 해보고, 또 그때 가요 책 나오는 것도 사서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그 인기 있던 가수 중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른 조동진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70세 가까이 되신 분인데, 그 당시 굉장히 인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무슨 방송이나 콘서트에 나와서 복잡하지 않게 기타 한 대로 드르릉 튕긴 다음에 울고 있나요?” 딱 한마디만 부르면 막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이 아주 난리였습니다.

 

그 노래의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이처럼 굉장히 시적이고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아마 저랑 비슷한 또래 분들은 이 노래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걸 보면서 나도 기타를 저렇게 드르릉 하고 튕기면 와~ 하며 난리를 치는 오빠 부대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그 비전(?)과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언제 울어 보셨습니까? 그리고 왜 우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소망 때문에, 어떤 사람은 뭔가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어떤 사람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어떤 사람은 시련을 당해서, 어떤 사람은 실패해서, 어떤 사람은 아파서, 어떤 사람은 이별해서,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그렇게 울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런 상실, 이별, 실패, 좌절, 빈곤, 불화 같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 아직 슬퍼하며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그냥 울기만 한다고 복인 게 아니라 왜 우는지 그리고 누구 앞에서 우는지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입니다. 슬픔을 혼자 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져와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 슬픔이 복이 됩니다.

 

 

1.   자기를 보고 슬퍼하며 우는 성도의 복

 

사람들은 대개 고통과 눈물과 슬픔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할 때, 돈이 많은 사람, 명랑한 사람, 뭔가 이룬 사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웃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프로그램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웃으면 복이 와요가 아니라 울면 복이 와요’, “슬퍼하며 우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히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4)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늘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슬픔이나 눈물을 싫어하는 오늘 같은 시대에도 많이 울라고 하십니다. 사실 누가 사람들 앞에서 막 엉엉 우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슬퍼하며 애통하면서 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애통은 단순히 그냥 내가 슬퍼서 우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울다 말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마음 아파하며 우는 그러한 슬픔입니다.

 

애통하는 자라고 되어 있는 말은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에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통했던 자, 애통하고 만 자, 또는 애통할 자가 아니라 지금 애통하고 있는 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번 애통하고 마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애통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애통하는 것, 슬퍼하는 것이 삶의 습관, 영적 습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이라는 것은 엄청난 비통함을 느끼는 겁니다. 그냥 조금 슬퍼서 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얼마나 슬픕니까? 그런 것처럼 강한 슬픔을 가져오는 때 어울리는 단어가 애통입니다.

 

그런데 이 애통하다라는 헬라어 원어가 수난을 받다, 고난을 받다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는 데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이 애통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으시고 수난 당하신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으로 슬퍼하며 우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 중에 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언제 애통합니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아주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 웁니다. 최근 들어 지진 피해를 당한 튀르키예와 시리아 뉴스를 보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린 상태에서 잔해에 파묻혀 죽은 자기의 갓난아기 시체를 들고서 오열하는 아빠의 모습, 부모를 다 잃고 혼자 어린아이가 살아남아서 지금 상황이 뭔지 모르고 그냥 우는 그러한 모습, 이러한 것이 애통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사실은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였는데, 오늘 <목회편지>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애통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팔복전체를 매주 계속 읽는 이유는 팔복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복이 아니라 8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 같이 읽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애통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가난해서 마지막까지 정말 다 비우고 나면 눈물밖에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지금 자기의 영적 상태를 살펴볼 때, 자기가 얼마나 지금 바닥을 치고 있는가를 정확히 보게 되니까, 죄로 죽어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까, 그래서 너무나 큰 충격과 고통 중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성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보며 또 자기를 보며, 사실은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기의 모습을 보며 많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무능과 가난함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가져오는 죄악과 영적 어려움과 비참함이 그 뒤에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래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기를 보며 울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있는 많은 죄악과 영적인 어려움을 보면서 애통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사람들을 대할 때 보면,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모릅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서도 우리가 그런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많이 따지는 게 뭡니까? IQ(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를 많이 따집니다. 그리고 요즘엔 또 EQ(감성지수, Emotional Quotient)도 많이 따집니다.

 

그런데 만약에 CQ(긍휼지수, Compassion Quotient)를 생각해 보면 아마 우리는 낙제점일 겁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게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모든 게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딴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그렇게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서 함께 마음을 모으자고 한 것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아주 좋은 기회의 통로가 됩니다. 사실 우리가 한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주 큰 액수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음을 함께 모을 때 나는 오직 나만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저렇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해 나도 같이 사랑을 나눠야겠다.’라고 하는 그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CQ(긍휼지수)가 좀 올라갑니다.

 

그런데 사실 평소에 보면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일주일에 한 번 보면서 안녕하세요? 잘 지내요?” “, 잘 지냅니다.”하면 끝입니다. 더 이상 뭐가 있습니까? 그냥 잠깐 앉아서 조금 대화하고 식사하고 그런 정도인데, 그래서 목장에서라도 좀 더 친밀한 대화를 함께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기도해주는 것을 자꾸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끼리는 그래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지만, 여기를 떠나서 밖에 나가보십시오. 커피 마시러 가거나 그로서리에 가서 일하는 사람이나 마주치는 사람의 인생은 어떤 인생일지 우리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혹시라도 오늘 주님이 오시면 천국을 갈 수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 가겠는가?’라는 데에 솔직히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나?’ 아니면 빨리빨리 하지 왜 이렇게 느리나?’라고 하는 등 오직 나에게 관심이 있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에겐 막 화를 내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훌륭하게 이룬 성과를 시기하기도 하고, 또 악한 생각을 막 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 그러면서도 돌이켜 생각해보며 나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중에 돌아와 생각해 보면 오늘 내가 그렇게 좋은 삶을 살지 못한 것 같다.’라고 후회도 되고 조금 더 나아가면 절망이 되며 낙심이 됩니다.

 

그런데 성도는 거기서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가 왜 이렇게 했을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올바르지 못한 삶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자기를 보며 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는 이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고 슬퍼하며 우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는 바로 그런 나의 영적 상태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걸 가질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파산한 상태인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는 겁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내놓을 게 없는 자신의 영적 가난과 무지와 무능과 어리석음을 보면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절망과 낙심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거기서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현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 혼자 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와서 우는 사람, 그것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악과 부패한 모습을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울면서 부르짖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즐겁게 살면, 자기가 그런 상태인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가운데서도 바로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내가 낳은 자녀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면 더더욱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막 화가 나고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게 얼만데?’라는 생각도 납니다. 그러나 내 자녀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그냥 화를 낼 게 아니라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겁니다.

 

내 배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싱글들은 또 사귀는 사람이라든지, 부모님이라든지, 친구라든지, 또 교회 지체라든지, 서로에게서 안타까운 모습이 보일 때 울어 주는 겁니다. 대신 우는 겁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긴 하지만 불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바로 그러한 불의를 보면서 애통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이 뭔가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세상의 애통과 다른 애통

 

첫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세상적인 애통과는 다른 애통입니다. 세상에서 애통은 보통 손해 보거나 남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또 이유 없이 피해나 고난을 당했을 때,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겪는 아픔을 말합니다. 좋아하는 물건이 없어졌을 때고 그렇지만,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것들을 애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인 애통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목격하며 죄의 결과는 결국 죽음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죽음에 속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슬퍼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입니다.

 

 

2)  죄의 고백과 다른 애통

 

두 번째로, 그래서 죄의 고백과 애통은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물론 죄를 고백하는 우리의 회개가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회개할 수는 있는데, 정말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뭔가를 잘못하면 정말 애통하면서 회개합니까? 저만 해도 뭐 좀 잘못했으면 아이고, 하나님, 제가 좀 잘못했네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이 정도지, 우리가 정말 가슴을 치면서 나는 정말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그러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애통하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특히 이 시대에는 죄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를 보통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처음 교회 오시거나 아니면 우리 VIP 분들도 그렇고, 교회에서 항상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난 죄인이 아닌데 왜 자꾸 죄인이라 그러나? 당신들끼리 죄인 하시오. 나는 죄인이 아니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생각하는 죄는 범죄(crime)입니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정해놓은 법에 어긋나는 범죄를 나는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범죄를 한 번도 저지르지 않셨습니까? 안 걸린 것뿐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안 걸렸다 뿐이지, 사실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 35마일 지역에서 36마일 이상 달리지 않은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거 사실 범죄입니다. 35마일까지 가야 하는 게 법이니까 그렇습니다.

 

근데 조금 넘어도 경찰이 그냥 봐줍니다. 하지만 심각하게 넘으면 잡는데, 많이 넘었어도 안 걸린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안 걸렸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주운전을 했는데 안 걸렸다면, 안 걸린 것뿐이지 사실은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법에 나와 있는 것을 어겼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안 걸리면 죄가 아닙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죄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사람들 다 그러고 사는데, 목사도 죄 안 짓습니까? 근데 뭐 이 정도 갖고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합니까?’ 하고 따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본능 아니면 무슨 심리학적 현상 같은 걸로 자꾸 해석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정말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고백을 한 크리스천이 똑같이 그렇게 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살인이나 강도나 그렇게 심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법규를 어기는 것이 사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한 것까지도 다 보십니다. 그런데 그 죄를 별것 아니라고 취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서도 만약 말씀 시리즈가 제자의 삶 산상수훈에서 팔복이 아니라 ‘7가지 큰 죄악시리즈로 해서 계속 죄 얘기만 하면, 아마 상당히 인기가 없고 설교가 언제 끝나나 계속 시계만 들여다 보실 것 같습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나가면서 은혜받았습니다.’라고 하지 않으실 겁니다. 부담이 돼서 되도록 피하려고 하실 겁니다.

 

그래서 요즘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그 사람들은 들킨 사람들이고 밖에는 안 들킨 사람들이라고 구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 들키면 영웅도 되고 애국자도 됩니다. 사람 앞에서만 안 걸리면 되지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죄인가를 따져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만 안 걸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 생각을 하면 괴로우니까 자꾸 그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사람이면 세상에서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변명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자꾸 죄책감이 올라오니까, 그것을 최대한 느끼지 않기 위해서 뭘 합니까? 술을 마십니다. 마약을 합니다. 또는 성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그런 걸 통해서 이런 걸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지, 끝나면 또 그것이 몰려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하고 깨닫고 가슴을 치면서 내가 이대로는 안 되는데 그럼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엎드려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3)  남의 죄 때문에 하는 애통

 

특히 중요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남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뿐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지금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 얼마나 악이 많습니까? 그냥 뉴스만 봐도, 거기에 너무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어유, 저런 저런 악한 것들이 있나?’라는 식으로 그냥 욕이 나오는 타락과 거짓과 비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조적인 약점을 파고들어서 돈을 몰래 빼돌리 일들이 많습니다. 양심 없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런 못된 것들!’ 하면서 막 분개하고 분노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고, 그런 범죄나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애통하는 겁니다. 우는 겁니다. ‘,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너무나 안타깝다.’ 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러한 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면서 슬퍼하시는 그 마음 때문에 애통하는 겁니다.

 

감리교 창시자가 존 웨슬리(John Wesley)인데, 웨슬리가 자기 일기에 이렇게 쓴 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은 뉴캐슬 거리를 걸을 때 매일매일 고통스러웠다. 우리의 삶을 맡긴 가난한 사람들의 어리석고 뻔뻔스러운 죄악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멋모르는 불경스러움 때문이다. 군인들의 끊임없는 저주와 맹세, 방자한 신성모독은 소박한 기회는 고문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무관심하게 이런 말을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애통하는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 성도는 자기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에스겔서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데 천사에게 다니면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9:4) 하셨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사회악과 여러 가지 악한 일들 속에, 그걸 보면서 그 가증한 일 특히 우상숭배 같은 것을 보면서 탄식하고 우는 사람의 이마에 표를 그려서 표시를 남겨두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나중에 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을 찾았는데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명도!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된다고 에스겔 선지자가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신 사람은 바로 애통하는 사람 한 명입니다.

 

남들은 다 법을 어기고 그러는데 나 하나 잘 지킨다고 되겠습니까? 그냥 나도 적당히 살죠.’가 아닙니다. ‘나 하나가 한다고 되겠습니까?’ , 됩니다. 나 한 사람이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사람. 그런데 한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흥정(?)을 잘해서, 50명에서부터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0명이 아니고 한 명이 없어서 그냥 망했습니다. 거기 한 명만 의인이 있었어도 되는 건데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악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세상에 나 혼자 제대로 살면 너무 티 나고 남들이 뭐라고 그럴 텐데, 내가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하겠는가?’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복을 내려주십니다. 무엇보다 그런 악을 보면서 슬퍼하는 겁니다. 슬퍼하면서 우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요즘 어떤 뉴스를 보셨습니까? 유명한 배우가 마약을 했다는 게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거기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데 어떻게 저럴 수가! 팬들을 배신했다.’ 하면서 막 분개하고 그러십니까? 아니면 아유, 참 안됐다. 왜 이렇게

됐냐?’ 이러십니까? 여러 가지 반응을 하실 수 있는데, 애통하는 자로서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왜 저 영혼은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애통하는 겁니다.

 

세상에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비롯해서 정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많습니까? 또 살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미국의 총기 사고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아이고, 무섭다. 위험하다.’라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바로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애통하며 기도해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냥 비난하고 욕하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4)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애통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세상의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서 애통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같이 하는 겁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정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같이 애통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느헤미야, 호세아, 바울 등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분들은 정말 이웃을 위해서 애통했던 분들입니다. 특히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눈물의 사역자였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죄로 인해서 아픈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그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요즘 우리가 다니엘 금식을 해서 미디어 금식을 하고 있지만, 다른 때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중간중간 광고가 나옵니다. 한국 뉴스를 봐도 중간에 광고가 나오는데,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아시아 출신 아이들이 나옵니다. 아주 비쩍 마르거나 병에 걸려서 배가 튀어나온 아이들이 나오면서 여러분의 도움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만약 내가 뉴스를 보다가 그런 광고가 나오면 에이하며 다른 데로 돌리십니까? 아니면 유심히 보십니까? 우리가 꼭 물질로 항상 도울 수는 없지만, 지금 이 광고를 내가 바로 이 시간에 보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 내 눈에 왜 이런 게 보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저 어린이 또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마음 아파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애통하는 자이고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눈물의 사람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은 굉장히 많이 웃으시고 재미있고 유머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슬픈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무덤 앞에서 우셨는데, 물론 그가 불쌍해서 우신 건 아니지만 인간의 그 현실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곧 멸망할 걸 아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라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이십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실 때, 바로 그것이 애통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슬퍼하고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게 필요합니다. 정말 최고로 복 있는 사람이 예수님 아니시겠습니까? 애통하는 것은 그 예수님을 닮는 길입니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 한국에서 문제가 된 신천지라든지, 그 전 세월호 때의 구원파, 그리고 요즘 JMS 등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런 걸 보면서 여러분은 또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런 저 악한!’이라고 하면서 막 분노가 일어나십니까?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너무 역겹다. 구역질이 나서 못 보겠다.’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런 사람들이 왜 저런 이단에 빠졌을까?’라고 그 사람들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겁니다.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왜 저 사람들은 저런 데 빠져서 저렇게 인생을 낭비할까? 가출한 청년들도 있고 깨진 가정들도 있습니다. 특히 이단의 특징은 가정을 깬다는 겁니다. 집에 있는 것을 다 들고 오게 해서 가정을 깨고,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집을 나오게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버려진 아이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번 코로나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선교사님 한 분도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코로나와 싸우기 위해서 의료진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학대로 죽는 아이들, 그리고 가난과 여러 질병에 찌든 사람들 등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그럴 때 그냥 아이고, 마음이 좀 안 됐네.’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주님, 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내가 지금 접하는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기도하라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기도를 하면 됩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몇 초면 끝납니다. 4~5초 정도 하나님, 저 사람 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뉴스를 보면서 애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범죄 소식이 나올 때 아이고, 한심하다.’가 아니라 정말 불쌍하다.’라는 마음으로 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잠시 몇 초라도 기도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뉴스를 볼 때 다른 점입니다. 뉴스를 볼 때 아유, 저거, 저거, 저거할 게 아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를 해주는 겁니다. 특히 그렇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애통하는 자입니다.

 

 

3.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늘의 위로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겁니다. 눈물이 많은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위로를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게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를 보면서 울고, 그다음에 또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울며 하나님 앞에 아뢸 때 정말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애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범죄자인 사람,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서 너무나 안 됐다. 안타깝다.’라고 생각하며 너무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시라도 기도했을 때,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어떠시겠습니까? ‘참 기특하다.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니? 참 기특하다. 내가 너에게 복을 안 줄 수가 없구나.’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너도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너의 마음을 드리고 행동까지 하며 섬기느냐?’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위로하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부모의 마음으로 자녀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하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시>로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많은 시를 썼는데, 그중에 <팔복>이라는 시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 시는 이렇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여덟 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한 다음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팔복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팔복을 전부 슬픔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한 다음에 여덟 번을 했으면 이제 , 진짜 엄청난 복이 있나 보다.’라고 사람들이 기대할 텐데, 그 기대를 깨뜨리고 더 절망으로 떨어뜨립니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그게 복이 있는 것인지 좀 이해는 안 가지만,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정말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슬픔을 꿋꿋이 견디며 미래적인 소망으로 민족의 독립을 갈구했지만 일제 식민치하에서 나라와 민족의 어두운 운명만이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그렇게밖에는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에게는 회복과 기쁨이라는 것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슬펐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슬퍼하는 자에게 분명한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복, 하늘의 위로를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힘이 되고, 슬픔이 소망이 되고, 슬픔이 위로가 되고, 슬픔이 평화가 되고, 또 슬픔이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바로 그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더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또한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그 속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이 땅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 자신을 보며 애통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 즉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과 친구들의 삶을 보며 그 죄 때문에 애통하고, 또한 이 세상에서 악한 것들을 보면서 애통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애통할 때, 그런 우리가 이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참으로 애통하는 자, 슬퍼하며 우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세상에 전달해 줌으로 이 땅의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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