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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19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6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들

(사무엘하 238~23)

 

[들어가는 말]

 

제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주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그 제목은 <플래툰>입니다. 미국 발음이 프툰처럼 들려서 아버지가 자꾸 프툰이라고 우기시기에(?) 저도 그게 아니고 플래툰이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월남전 배경의 영화인데, 전쟁에서 군인들이 무수히 죽어 나갑니다. 이쪽도 저쪽도 치열한 전투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사람의 심리를 잘 그렸습니다. 배신 장면도 나오고 굉장히 잔인한 장면이 많았는데, 아주 실제적인 전쟁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것도 전쟁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람보>라고, 이건 그와 완전히 반대로 혼자서 천하무적입니다. 저쪽에서 몇백 명, 몇천 명이 몰려와도 혼자 다 죽입니다. 저쪽은 아무리 총을 쏴도 주인공은 한 번도 안 맞고, 이쪽은 대충 쏴도 저쪽은 다 맞습니다. 만화 같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전쟁에서 그렇게 한 사람이 수백 명, 수천 명을 상대로 승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폭탄을 터뜨려서 이기면 몰라도, 맞붙어 싸우는 백병전에서 한 사람이 그저 몇 명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용사들이 있었다고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첫 번째 세 용사’ (8~12)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맹스럽게 목숨 바쳐 싸운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23장의 뒷부분은 안 읽었지만 맨 뒤에 보면 총수가 37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39). 그런데 세어 보면 사실은 36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족속인지와 함께 죽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용사 중 가장 용맹한 세 명에 대한 일화가 간단히 나온 다음에 삼십 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특별한 사건 없이 죽 나옵니다.

 

역대상 11장에도 다윗의 용사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장과 역대상 11장 명단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용사들의 숫자가 역대상 11장에는 46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36명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또한 그 두 명단에 모두 나오는 용사들 가운데 이름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게 나오는 등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예들이 있다는 겁니다.

 

두 명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명단이 나오는 문맥에 있습니다. 앞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다릅니다. 역대상 11장의 명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 대관식이 나온 다음 명단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왕으로 통치를 시작할 때가 그 명단을 작성한 배경입니다.

 

그뿐 아니라 역대상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 46명은 훨씬 더 많은 용사들의 일부입니다. 명단에 굉장히 많은데 그중 일부만 적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역대상 12장에서는 다윗을 도운 용사들의 이름을 추가적으로 죽 말해 줄 뿐 아니라, 용사들을 도운 병사들의 숫자도 지파별로 몇 명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명단은 다윗을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나옵니다. 22장이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이 명단이 나온다는 것은, 사무엘하 이야기의 결론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주석가 아브라바넬이라는 사람은 역대상 11장에 나오는 용사의 명단과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명단이 왜 다른가 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즉위식에 참석해서 충성을 선언한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반면, 여기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용사들은 끝까지 다윗에게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들, 즉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던 진짜 충신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수가 더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이런 유대인 주석가의 설명이 맞는다면,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용사들은 단순히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들이 아니라 다윗에게 끝까지, 변함없이 충성했던 용사들이었고 충신들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37명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36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안 나오고 빠진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놀랍게도 가장 다윗을 위해서 많은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던 동시에 또한 다윗에게 가장 골칫거리가 되었던 요압입니다. 요압은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랍고도 큰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  요셉밧세벳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더라” (8)

 

첫 번째로 소개된 용사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인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합니다. 이 이름은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상 1111절에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야소브암도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역대상 12장에 따르면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해서 시글락에 머무를 때 다윗의 부하가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첫째 달에 24천 명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했습니다(대상 27:2).

 

여기 보면 그는 군지휘관이었고 그중에도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지휘관의 두목이라는 말은 가장 용맹한 세 사람(용사)의 우두머리였다는 겁니다. 세 사람 중에도 대장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세 용사또는 세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100%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 성경을 읽어보면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도 사실은 세 명이 아닙니다. 앞에도 세 사람이라고 나오고 뒤에도 세 사람’(또는 세 용사’)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요셉밧세벳이 그렇고, 뒤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비새도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두머리라는 말입니까? 세 명 중 우두머리가 두 명이면 나머지 한 명만 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첫 번째 세 용사가 있고 두 번째 세 용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A급인 최고의 용사 세 명이 있었고, 그다음 레벨 세 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A가 세 명, A가 세 명이었습니다. 그다음 세 명도 엄청난 용사들인데, 그들을 능가하는 세 명이 또 꼭대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최고의 특A급 세 명의 우두머리가 바로 요셉밧세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시피 이 사람은 여기서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별로 알려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최고의 용사인데 전혀 나오지 않다가 여기 잠깐 나오고 역대상에 잠깐 나옵니다. 오히려 요압 같은 사람은 여기 끼지도 못하는데 계속 나왔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해 주고 사람들 앞에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잘 알려졌는데 다른 민족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런 요셉밧세벳 같은 사람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 준다는 겁니다.

 

요셉밧세벳은 특수부대 30명 중에도 세 용사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중에도 첫 번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무용담이 무슨 신화나 전설 같은 스케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용사였는지, 단번에 800명을 쳐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히브리어 과장법입니다. 이 말은 창을 들고 한 번 휘둘렀더니 800명이 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800명을 한 번 휘둘러 다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800명을 죽였더라도 한 번 휘둘러서 다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엄청난 용사, 최고의 용사 중의 최고의 용사였던 사람이 바로 요셉밧세벳이라고 하는 생소한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하나님은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엘르아살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9-10)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여기 보면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 군대를 향해 조롱하고 도발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다윗이 어렸을 때 군대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그때 블레셋에서 엄청난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와서 막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 군대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워낙 대단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특A급 세 용사가 블레셋을 상대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여기서 싸움을 돋우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고 했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 진을 갖추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러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다는 것은, 싸움을 피해 평야에서 높은 데로 올라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후퇴했을 때 엘르아살이 일어나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검을 든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10).

 

그때 산으로 피했던 백성은 전투가 끝나자 내려왔고,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따라가며 전리품을 취하는 것뿐이었다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쁨에 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르아살도 대단한 용사입니다. 혼자서 다 하니까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장군만 하나 있으면 다른 군인들은 든든했을 겁니다.

 

 

3)  삼마

 

A세 사람의 셋째 용사는 삼마라는 사람입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1-12)

 

삼마에 대한 설명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전투에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투가 있었고 세 사람은 각각 공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바로 레히라는 곳입니다. 레히와 연결되는 인물이 바로 삼손입니다.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이 블레셋을 당나귀 턱뼈로 다 쳐 죽인 곳이 바로 레히입니다. 그후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간구하니까 하나님이 물을 주신 바로 그곳입니다.

 

엘르아살의 전투가 세 용사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었다면, 삼마의 전투는 블레셋이 약탈하기 위해 침략한 것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레히에는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이 있었는데 블레셋이 바로 그것을 약탈하기 위해 침략해온 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군인들)은 또다시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하지만 삼마는 홀로 서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 밭을 지켜냈다는 겁니다. 혼자서 지켜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블레셋과 싸우면서 오래전 바로 이 장소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이 블레셋과 싸웠던 삼손을 생각하며 싸웠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가 승리한 것을 가리켜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12)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2.   세 용사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베들레헴 우물 사건 (13~17)

 

지금까지는 특A급 세 용사의 이름을 소개하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들을 짧게 설명했는데, 13절 이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다윗의 최고 엘리트 용사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사건을 말해 줍니다.

 

앞선 이야기들이 세 용사의 신화적이고 전설 같은 전투 능력을 이야기했다면, 이 사건은 다윗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 그들이 세 사람’(최고의 용사)의 영예를 얻은 것은 남들보다 훨씬 강한, 다윗 왕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 이후에 보면 두 번째급 세 사람(용사)이 나오는데, 그것은 두 번째 세 용사가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다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보면 첫 번째 세 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 용사도 용맹하고 엄청난 장수였지만 그들은 다윗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 중 두 명만 이름이 나옵니다. 아비새와 브나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름이 안 나오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요압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부러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는 겁니다. 워낙 불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다윗을 힘들게 할 때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3~17절에 나오는 세 용사는 그들이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새와 요압은 언제나 다윗이 사울과 대적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물론 요압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군대장관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에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길어 오는 사건의 주인공 세 사람은 앞의 세 사람, 즉 요셉밧세바, 엘르아살, 삼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에서는 이름뿐 아니라 누구 아들이라고까지 다 나오는데 왜 여기서는 이름이 안 나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주인공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명예를 드높이려고 일부러 순교하며 죽을까 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통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무엘서는 다윗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둘을 연결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오시는데, 다윗이 메시아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3)

 

삼십 두목 중 세 사람30명의 대장 중 세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은 다윗의 30 용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장에서 전부 3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36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기 때문에, 30 용사가 있고 세 명의 용사가 따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다윗은 자신의 경호 부대의 병력을 30명으로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37(또는 36)의 명단에 이미 죽어서 없는 아사헬(요압과 아비새의 동생)과 다윗이 죽게 만든 우리아와 같은 사람의 이름도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죽는 용사가 나올 때마다 30명에 새로 충원해야 했습니다. 한 명이 죽으면 채워 넣고, 또 다른 사람이 죽으면 또 채워 넣다 보니까, 36명 또는 37명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은 다윗의 삼십 용사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트리오였다는 것, 그 최고 엘리트 트리오가 둘이었다는 것, 그중에도 가장 최고가 처음 나온 세 사람이었다는 것, 그 외에도 엄청난 세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세 용사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4-15)

 

블레셋과의 전쟁 중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있는 곳에 베들레헴 성문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배경이 언제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아둘람 굴’(13)이 언급되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 사울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고 다윗은 다른 데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르바임 골짜기’(13)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사무엘하 5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투가 어떤 전투였든지 간에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진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곳입니까? 자기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쪽으로, 블레셋과 가까워 블레셋이 잦ㄹ 쳐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우물은 다윗이 어릴 때 양을 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자기도 마시곤 했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던 그 우물이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저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내가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냥 해본 말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 중에서도 내 고향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에 있었습니다(14). 그런데 놀랍게도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달려가서 우물물을 떠서 가지고 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6)

 

나는 베들레헴 우물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부하였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무 물이나 마시지, 베들레헴이 어딘데 무슨? 게다가 블레셋 군대가 거기 있는데 무슨 베들레헴 우물? 그냥 이거나 드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 용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 왕이 원한다고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가는 길에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합니다. 또 물을 떴어도 오늘 길에 다시 블세셋 군대를 뚫고 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왕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엄청난 충성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최고의 엘리트 트리오 세 명 안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 세 용사가 다윗이 목을 축이도록 목숨을 걸고 적진 안에 들어가 물을 길어 왔고, 그때 다윗은 그 용사들의 행위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부어 버립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서 블레셋 군대를 뚫고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는 동안 다윗은 이미 물을 실컷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을 떠 왔을 때 주여, 제가 이 물을 어떻게 마시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사이드 스토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시면 될 것을 하나님께 부어서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배를 드린 겁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유비의 부인들과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온갖 위기를 벗어나서 아들을 구하여 왔을 때, 유비가 구해온 그 아들을 땅에 던져 버리고 조자룡에게 가서 크게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압록강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군인들이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7)

 

다윗이 세 용사의 목숨값인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버렸다는 것은 그가 정말 자기 용사들을 아끼며 위하는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곡식을 벨 때’(13)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해 침공하기 좋은 때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곡식을 벨 때이니까 그것을 빼앗으러 오는 게 아닙니까. 또한 곡식을 벨 때라는 것은 다윗의 갈증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이때는 건기의 끝자락으로 물이 귀한 때였습니다.

 

이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명의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깨고 들어가 우물을 길어 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업적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길어 온 물은 그들의 목숨값입니다. 그들의 피입니다. 그냥 물이 아닙니다. 같은 물이라도 콸콸 나오는 것과 한 방울이 아쉬울 때 마시는 것은 가치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어버립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서 된 것이고, 또한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다윗이 혼자 잘나서 위대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왜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다윗을 위해 충성하며 싸웠습니까?

 

첫째, 다윗의 용맹함을 그의 부하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졸장부인데 부하들만 용맹한 게 아닙니다. 다윗은 어떤 용사보다도 용맹하고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리더였습니다. ‘얘들아,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나가서 싸워라.’ 하는 리더가 아니라, ‘나가자! 나를 따르라!’ 하던 리더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때는 어렸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도 어떤 사람보다 용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다윗 왕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사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보고 배워서 그와 같이 용맹한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녀들이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는 것은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라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모범을 보여줄 때, 하라고 안 해도 따라 합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배운 겁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질투와 야망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지금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데 다윗을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다녔습니다. 군사력을 낭비했습니다. 개인의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군사력을 낭비하는 사람이었던 사울의 부하들은 그런 그의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명령이 이스라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다. 백성을 위해 싸우는 분이시다.’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다윗에게 충성했고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따랐지, 못 믿을 만한 사람이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다윗은 갈증 해소를 위해 부하들에게 베들레헴에서 우물물을 길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하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한 요구였음을 깨닫고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그를 더욱더 따르게 한 요소였던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용사들이 물을 떠 왔는데 목숨 걸고 떠 왔으니 얼마나 많이 떠 왔겠습니까? 근데 그때 다윗이 그것을 받아서 마시면서 이야, 시원하다!’라고 한다면 다른 용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이것은 이들의 목숨값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어버릴 때, 충성심이 활활 타오르며 내가 저분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리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더이십니다. 자신이 생명까지 주신 분입니다. 성도는 완전한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는 용기와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나도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 하는 결단이 나오는 겁니다.

 

가끔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다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처형당하거나 테러범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낙심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의문도 듭니다. ‘왜 하나님은 저분들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이것은 헛된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돌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3.   두 번째 세 용사’ (18~23)

 

1)  아비새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18-19)

여기 세 사람이 나오는데 또 첫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로 구성된 첫째 세 사람과 구별되는 둘째 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급 세 사람 트리오가 있었고, 그다음인 A급 트리오가 있었는데, 그중의 우두머리가 아비새였다는 겁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세 사람의 반열에도 첫째둘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둘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는데, 왜 그를 자꾸 요압의 동생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요압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압의 이름이 여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압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되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지나치게 다윗의 일을 간섭하고 개입하면서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 같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에게 불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용사들은 단순히 잘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다윗에게 충성하는 충신들이었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이야기는 첫 번째 용사인 요셉밧세벳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가 한 번 휘두르니까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세 사람에 들었는데, 첫 번째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충심이 미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단순히 군사력이 모자랐다는 게 아니라, 다윗을 향한 마음이 첫 번째 세 사람보다 못했다는 말입니다.

 

 

2)  브나야

 

둘째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입니다.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0-21)

 

그는 다윗 아래서 블렛 사람과 그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고(삼하 20:23), 후에 아도니야의 반란 때 솔로몬을 지지하고 아도니야를 처단하는 업적을 세운 사람입니다(왕상 2:25). 또 솔로몬 아래서 요압을 대신해 군대장관이 됩니다(왕상 2:35). 본문은 그런 브나야가 어떻게 자신의 용맹을 처음 알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인 에돔 접경 지역의 도시(15:21) 갑스엘 출신의 용사인데,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의 무용담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먼저, 그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나오는데(20), 원어에는 아리엘 둘을 쳤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엘이 두 명이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기에 개역개정은 아리엘의 아들로 고쳐 번역했습니다.

 

둘째로, 브나야는 눈 오는 날 구덩이 안에 내려가 사자를 죽였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족 가운데 용사로 인정받으려면 사자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손도 사자를 죽여 자신의 용맹을 인정받았음을 생각할 때, 사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 용사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사자와 싸우는 것은 절대적 힘에서 밀리는 사람에게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일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 오는 추운 날은 사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사자를 이겼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악조건에서 이겼을 정도로 엄청난 용사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막대기로 장대한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고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21). 다윗도 그랬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 그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사람은 역대기에 의하면 키가 다섯 규빗거인입니다. 220~230 센티미터(7’4“)나 되는 엄청난 거인입니다. 지금 NBA 선수 중 최장신 정도 되는 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묘사는 브나야가 다윗과 비슷하게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22-23)

 

시위대 대장을 삼을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지만 앞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시 충성심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전투 능력보다는 충성심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인 여섯 명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사람 중 세 번째 용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배신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바로 요압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요압은 이 37명의 용사 명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비새나 브나야는 용맹했고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실은 무모하게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자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왜 일부러 거기 들어가서 싸웁니까? 참 무모한 일입니다. 거인과 막대기로 싸운 것도 무모한 일입니다. 공은 세웠지만 무모했고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합니까? 이렇게 거칠고 제어가 안 되고 막 나갈 수 있고 조폭과 같이 될 수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용맹한 장수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훌륭한 리더를 만남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계는 있지만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냥 놓아두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사도가 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놀라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고의 리더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리더, 최고의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과 질책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값지고 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요압처럼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자기가 마치 왕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면, 여기서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처럼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느 용사보다 요압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명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물론 다 받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어떻게 따르는지를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인정받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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