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에서가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한 이유" (창 27:30-40)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5 (8/30/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ZlxDFY19Eps?t=2112
2020년 8월 3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5 ✦
“에서가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한 이유”
(창세기 27장 30~40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인 1990년대에 한국에서 유행하던 말들 중 ‘야타족’이 있었습니다. 20대 청년들은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아기였으니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아실 겁니다. 자가용이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젊은 여성들을 유혹하던 부잣집 아들들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부모의 자동차나 부모가 사준 고급 자동차를 타고 우쭐대며 거리를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자기 눈에 괜찮아 보이는 젊은 여성이 보이면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도 창문을 내리고서 “야, 타!”라고 했다고 ‘야타족’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야타족’은 대부분 ‘오렌지족’이었습니다. ‘오렌지족’은 1990년대에 유흥가에서 돈을 물 쓰듯 하며 돌아다니던 부유층 자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로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비롯하여 강남이 그들의 주요 무대였는데, 당시 수입 오렌지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그들처럼 돈이 많은 젊은이들을 ‘오렌지족’이라고 불렀고, 또한 해외유학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서구의 대표적인 과일인 오렌지를 따서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오렌지를 차 안에 가지고 다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맏아들 에서가 바로 자기 시대의 ‘오렌지족’이고 ‘야타족’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렌지족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고급 호텔과 유흥가를 드나들며 쾌락을 즐기듯이, 에서도 그 당시 바로 그런 생활을 즐겼습니다. 이곳저곳의 경치 좋은 사냥터에 있는 5성급 리조트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잡아놓고 단골 고객으로 다니며 살았던 사람이 에서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도 멋진 별장 같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압구정 오렌지족처럼 당시에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 같은 낙타나 말을 타고 다니면서, 지나가는 아가씨들에게 ‘야, 타!’를 외치면서 ‘야타족’으로 생활했던 겁니다. 그렇게 쾌락만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며 다니는 삶을 살면서도 자기는 당연히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던 에서가 거절을 당하고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 이삭의 충격과 두려움 (30~33절)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지난주 본문을 보면, 야곱이 자기가 에서인 것처럼 변장을 하고 들어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0-31절)
야곱이 나가자마자 바로 다른 아들이 들어와 자기가 에서라고 하며 음식을 드리고 축복해달라 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32-33절)
여기서 이삭은 그냥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심히 크게 떨며”(33) 두려워합니다. 새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크게 충격을 받고서,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이삭은 너무 충격을 받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이때 왜 이렇게 놀라며 크게 떨고 있습니까? 지금 자기가 야곱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을 이어가는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 약속을 자기 뒤에 이어갈 아들을 축복하고 이 약속을 넘겨주는 것이 이삭의 중요한 마지막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일에 속임수가 끼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중요한 일에 있어서, 감히 아들이 아버지를 속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중차대한 일에 어떻게 속임수가 들어갔다는 말입니까?
이삭이 이토록 충격을 받은 것이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단순히 야곱에게 속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이렇게 중대한 일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속고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자기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이삭이 신실한 것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사실 이삭이 별로 한 게 없는데도, 조금만 우물을 파면 막 물이 나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그와 함께 해주신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삭은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건을 통해 이삭은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순간 자기와 함께 하고 있지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두려워하며 심히 크게 떨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이제 에서에게 축복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리라고 기대하면서 흐뭇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야곱이 속이고 들어와서 음식을 주었을 때, 잘 먹고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약간 의심은 들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진행되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에서를 축복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지금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떠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이삭은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조금 전에 분명히 에서를 축복했는데, 또 다른 에서가 들어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계셨을 텐데도, 자기에게 아무런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다. ‘얘, 이삭아, 지금 들어온 아들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다. 야곱이 너를 속이려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야곱을 축복해라.’ 하는 식으로 하셨을 텐데, 전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이삭이 하나님의 길로 제대로 가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럼 네가 알아서 한 번 해봐라.’ 하고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자기 마음대로 죄 가운데 사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고 불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살고 싶다면 한 번 살아보아라.’ 하고 놓아두신다는 것입니다. 그것과도 같습니다. ‘네 인생을 네 맘대로 해보고 싶으냐? 그럼 한 번 해봐라.’ 하고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아주 무서운 징계입니다.
만약 제가 이삭이었다면 야곱을 불러서 크게 혼을 냈을 것 같습니다. ‘야, 네가 어떻게 감히 네 아버지를 속일 수 있어? 너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이야? 네가 나를 속였으니 내가 네게 한 축복은 다 무효다. 너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놈이다.’ 이렇게 야단치는 게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이삭이 부족한 중에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훌륭한 점입니다. 그래도 그는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을 조금 보이면서, 이 어려운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겁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한 축복을 무효라고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축복한 것을 그냥 둠으로써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이야기한 것이 새번역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그것을 이미 다 먹고, 그에게 축복하였으니, 바로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33절, 새번역). 비록 자기가 속아서 축복을 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축복한 것은 취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야곱은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에 살았던 이삭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믿고 살지만, 때로 삶에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겁니다.
내가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 때 놀랍게도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 말씀을 안 하시는 겁니다. 아무런 사인을 주시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내 삶에 이상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정신 차리고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있던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면서도 안 하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나는 아는 게 있지 않습니까? 내가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않고 있는 것, 놓아야 하는데 아직도 움켜쥐고 있는 것, 남들은 그것을 몰라도 나는 압니다. 그것을 빨리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렇게 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그것은 재앙이 아니고 오히려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그 동안 알면서도 자기 욕심으로 붙들고 있던 에서에 대한 애착을 이제는 포기하고, 그 대신 야곱을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는 것만이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사실 이삭도 이것을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야곱보다 에서가 이 약속을 이어가기를 계속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욕심이었을 뿐입니다.
이제 자기 욕심대로 계속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이삭은 결국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삭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삭은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두려워하며 빨리 결단을 내립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고집해오던 에서를 내려놓고, 이제는 야곱을 인정함으로 위기를 벗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사인을 받고도 그것을 무시하다가 망한 사람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자기 사위이며 신하인 다윗의 인기가 자기보다 더 올라가니까 사울은 왕위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죽음의 위기에 닥친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동굴 속에서 쉬고 있을 때, 다윗과 부하들이 마침 거기 있었고, 찌르면 죽는 건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모두 잠이 든 사이에 경호 망이 뚫리고 다윗이 와서 물병과 창을 가져간 사건입니다. 그때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것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경고의 사인이었습니다. ‘네가 지금 잘못 가고 있으니까 너는 빨리 마음을 돌이켜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이었고, 자신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두 번이나 죽임 당하는 것을 면한 후에 그저 ‘다윗아, 네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었구나.’ 하고 조금 감격하다가 말았습니다. 첫 번째는 감격하고도 또 쫓아다녔고, 두 번째는 그때부터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난 참 재수가 좋은 사람이야.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야.’라는 정도로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서 잠시 뉘우치는 것 같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내 판단과 내 생각을 믿고 계산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삶에서 정리하고 바로 잡도록 기회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어떤 사고가 나거나, 갑자기 아이가 아프거나,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직장이나 사업체에 터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냥 살다 보면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자녀가 아플 수도 있고, 내가 아플 수도 있고, 직장이나 사업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불행한 일들이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전부 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영적으로 뭔가 해결되지 않은 부분을 그냥 가지고서 순종하지 않고 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보면서 갑자기 내 안에 있는 죄를 깨닫고 충격과 불안함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면, 마치 하나님이 지금 나를 치신다고 느끼게 된다면,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이 빨리 내 삶을 정리하라고 주시는 사인(sign)이며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니까,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으니까, 빨리 돌이키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겁니다. 버릴 것은 빨리 버리고, 그 동안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았던 말씀에 빨리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계속 ‘다음에 하겠습니다.’ 하며 미루고 있던 것을 그냥 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무슨 자존심을 따지고 돈 계산을 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엎드리는 겁니다.
‘내가 이걸 포기하면 얼마나 손해를 보는데.’ ‘내가 이걸 관두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바보 같이 생각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저하면 사울처럼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사울은 계속 다른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다 망했습니다. 우리는 빨리 말씀으로 돌아와야 되겠습니다.
2. 에서의 불신앙과 교만 (34~36절)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이삭이 단호하게 말하니까 에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34절)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자기에게도 축복을 해달라고 떼를 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에서가 억울하게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 안 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에서가 장자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축복받기 원하는데, 야곱이 그것을 속여서 빼앗은 나쁜 놈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살펴보면, 에서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서가 엉엉 우는 것을 본 이삭이 또 다른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35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래, 이 축복이 원래는 에서 네 것이었다.’라고 위로하는 겁니다. 물론 에서가 엉엉 울고 대성통곡하면서 막 조르니까 마음이 안 됐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위로한답시고 ‘그래, 이 축복은 원래 네 것이었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이 순간 나에게 말씀을 안 하시다니...’ 하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이삭의 애매한 태도가 에서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편애와 잘못된 방식의 사랑이 에서로 하여금 신앙의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이라고 다 잘하는 게 아닙니다. 실수를 참 많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두 가지 잘하고 신실하게 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래도 사용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삭은 이때 오히려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얘야,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불순종하고 억지로 너를 축복하려 했는데, 결국 그 축복이 받을 사람에게 가고 말았다. 에서야, 원래 그 축복은 네 것이 아니라 야곱의 것이다. 너와 내가 잘못 생각하며 고집을 부린 것이고, 이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이다. 그러니 그만 울고 이제 야곱을 축복해주자.’
그러나 이삭은 아직 야곱에 대해 감정이 상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원래 그건 야곱이 아니라 에서 네 것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게 원래는 네 것이었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에서가 어떻겠습니까? 다시 기가 살아나면서 아버지 이삭에게 더욱 매달립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36절)
에서의 이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야곱은 되지도 않겠지만 그냥 던져본 겁니다. ‘이 죽 한 그릇과 형의 장자권을 바꿉시다.’라고 했지만, 진짜 그럴 것이라고는 기대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선뜻 그러자고 하며 자기가 장자권을 아무렇게나 여기며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버리고는, 그것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나를 속였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다 이런 것 같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똑같습니다.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자기가 잘못한 것은 싹 빼놓고 상대방이 조금 잘못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부각시킵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더 잘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털이 많았다는 것은 우락부락한 사나이답고 남성미가 펄펄 풍기는 몸짱인 사람입니다. 인간성도 좋고, 성격도 씩씩하고, 아주 활달한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바람에 수염을 휘날리며 씩씩하게 나아가는 멋진 사람입니다.
이삭이 볼 때는 당연히 그런 에서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오늘 교회에서 에서와 야곱이 같이 예배드리며 봉사한다면, 에서가 훨씬 더 인기가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서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다. 정말 장로감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심지어 조금 더 나가면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고 주의 종이 될 사람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누구나 주의 종이지만 대개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다, 즉 에서나 야곱이나 하나님 보실 때는 자격 미달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정말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설명이 되는 부분은 뭐냐 하면, 은혜가 주어졌을 때 그 은혜를 붙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믿음이었고, 그 은혜를 받고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산 것이 에서의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수많은 자신의 결점과 잘못된 부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그것을 붙든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에서의 남성다움과 용기와 외모를 높이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서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자기 힘으로 축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사냥을 하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을 갖다 드리는데, 당연히 자기가 복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자기 노력으로 얻는 게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귀한 일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은 귀한 일인데 마음 없이 행동만 하는 열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기 교회당에만 가만히 계시라고 우상처럼 모셔 놓고, 나 혼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하고 봉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서 역사하시며 나와 함께 그리고 나를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삭은 에서를 그토록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기며 자기의 후사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전혀 쓸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가득 찬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금 그릇, 아니 다이아몬드 그릇이라도, 그 안에 오물로 가득 차 있다면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에서에게는 하나님이 들어가서 역사하실 공간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 나! 나!’였습니다.
에서의 특징은 철저한 자기도취와 교만입니다. 에서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축복도 원래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늘 은혜를 주십니다. 특히 우리에게 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고, 전부 다 자기 맘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영적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도취를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적 나르시시즘이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보기에 자기가 굉장히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나 같은 신앙인이 어디 있겠나? 이 정도면 하나님도 놀라실 정도로 내가 잘하고 있지. 나보다 하나님의 복을 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는 식으로, 자기가 너무 잘나 보이고 자기를 보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느끼며 자기 기분을 내고 자기도취에 빠져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되는 이유가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것인데, 신앙생활을 너무 잘해서 그렇습니다. 꼬박꼬박 예배드리고, 꼬박꼬박 십일조를 하고, 꼬박꼬박 기도에 말씀에 다 잘하고 있으니까, ‘나 정도 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가 되는 겁니다. 신앙의 자기도취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든지 ‘은혜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교만이 있고 자기도취가 있어서, 조금 못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우습게 여기고 낮게 보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남들을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출 줄 모르고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혹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도 모두 이삭처럼 사람을 잘못 보는 실수를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상황을 잘못 보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에서처럼 자기를 잘못 보는 실수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히 보십니다.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었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천사 또는 하나님과 씨름할 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니까 “야곱입니다.”라며 숨기지 않고 대답합니다. 에서가 여기서 그의 이름이 야곱인 것이 맞는다고 하며 ‘야곱’ 즉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라고 했는데, 야곱은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잘못된 사람입니다.’라고 하며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겁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3. 진정한 축복 (37~40절)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7절)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 축복한 것은 취소될 수 없고 자기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기서 보여줍니다. 자기는 에서를 축복해주고 싶었지만, 주인이 되는 축복과 곡식과 포도주의 축복까지 야곱에게 이미 다 해주었기 때문에 이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에서가 뭐라고 반응합니까?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8절)
에서는 끈질기게 이삭에게 축복해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머리가 되는 축복을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여럿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여러 개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게 머리가 되는 축복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축복해달라고 매달리니까 몇 마디 해주기는 합니다.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39-40절)
이것이 에서의 후손인 에돔 민족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에서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면 불안정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가, 돈이든지 성공이든지 다른 기회가 보이면 신앙의 자리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내지 돌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이삭의 이 예언은 에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 말씀을 듣고 알았으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자기 칼, 즉 자기가 가진 것을 믿고 신앙의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다가도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버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에서의 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칼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잘 살 수 있는 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우인 야곱의 멍에를 메고 그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은 저주인데, 성경에 나오는 저주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마귀의 저주는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는 책망을 하면서도 생명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돌이켜 이리로 오라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에게 하신 선지자들의 말씀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것을 붙들지 않고 결국 자기 칼을 믿고 자기 길로 그냥 가버림으로써 이 복을 놓치고 맙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방식과 말씀대로 하는 것이고, 특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 은혜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섬기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를 내려주시지만, 그것을 붙들 수 있는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받고 못 받고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가뭄이 들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비가 내리면, 거기 그릇을 갖다 놓아서 비를 받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을 때 그릇을 잘 놓아야 하는데, 그 안에 뭘 가득 채워놓았든지 거꾸로 놓으면 전혀 물을 받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냥 갖다 놓고 받는 것이 믿음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야 그것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비를 내려주십니다. 받고 못 받고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바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자매를 섬기는 것으로 믿음이 드러납니다. 자기 기질을 꺾으며,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깊은 절망감으로 우울증에 걸린 어느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괴로워서 심지어 몸에 마비 증세가 왔고, 너무 힘들어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간호해주던 간호사에게 ‘내가 마음이 답답하니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라고 했습니다. 바닷가로 가서 바위 쪽으로 데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위험해 보였지만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고 갔습니다. 그는 사실 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데리고 가던 간호사가 바위가 미끄러워서 죽 미끄러져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 살려!’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그러자 마비 증세가 와서 못 일어나던 그 의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바다로 뛰어들었고 결국 그 간호사를 구출했습니다. 그때 그는 우울증과 마비 증세에서 벗어난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에는 자살하려던 마음을 바꾸어서 ‘살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남을 살리는 것이 곧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삭처럼 또는 에서처럼, 자기 마음대로 할 때가 있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계속 기회를 주시고 사인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그 사인을 붙드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쓰시는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