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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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교회 인터넷 사정이 고르지 못하여 중간에 방송이 중단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https://youtu.be/HA2RnsIAXkc?t=2588

 

2020524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1

연속되는 문제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16)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제가 서부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잘 날아가고 있던 비행기에서 갑자기 하는 소리가 크게 났습니다. 그때 마침 제가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쿵 하는 겁니다. 비행기는 계속 가고 있었는데, 그때 기장이 안내방송을 하면서 방금 난 소리에 놀라셨을 줄 압니다. 엔진 하나가 고장 나서 꺼졌습니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근처에 있는 공항에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무사히 바로 근처에 있던 공항에 내려서 비행기를 바꾸어 타는데, 그 과정에서 뜻밖에 저에게 일등석(First Class)을 주는 겁니다. 그 덕분에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잠도 잘 자면서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좌석을 배정받아 갈아타고 갔어도 예정보다 여섯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미 시작된 강의의 첫 부분을 다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틀 전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99명을 태운 여객기가 주택가에 추락해서 97명이 죽고 두 명만 살아남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지막 통신 때 기장은 엔진을 잃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행기에 있어서 엔진이 고장 나는 것은 아주 엄청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비행기 엔진이 고장 나서 갈아타고 갔던 것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엔진이 고장 나면 아무리 값비싸고 엄청나게 좋은 비행기라도 비행을 계속 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목적지까지 갈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다른 데 서서 돌아가느라 시간이 한참 지체되었지만 감사하게도 중간에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파키스탄 비행기 같은 경우처럼 잘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아무리 계획을 해도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 한 순간에 그냥 사라질 수도 있는 아주 연약한 것이 인생임을 우리는 지금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한국의 가족 친지들을 방문하려고 계획하셨던 분들, 출장가려고 했던 분들 모두 무산되지 않았습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도 여러 사정들이 있습니다. 가족들과 좋은 데로 여행을 가려고 예약했던 것, 여름 캠프 보내는 것, 컨퍼런스 참석하는 것, 직장 잡는 것 등, 계획한 것들이 모두 다 취소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나중에 하지라는 말처럼 위험한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 일들이나 계획들도 그렇지만 특히 관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관계가 틀어지면 나중에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그랬다가 그 나중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빨리 해결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아브라함을 살펴보고 있는데, 오래 전에 제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만큼 인생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믿음으로 끝까지 나아갔던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어주시고 그들도 하나님을 붙들었을 때 그들은 믿음의 조상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어려운 시기에 이분들을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생각되어 지금 이렇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16장은, 비행기가 고장 나서 불편한 과정을 거쳐 다른 데로 빙 돌아서 목적지에 한참 늦게 도착한 저의 경우처럼, 아브람과 사래의 인생이라는 엔진에 고장이 생겨서 불편하고 먼 길을 돌아서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은 그들의 가정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이스마엘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소위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믿음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문제의 시작 (1-6)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도 로마서, 야고보서, 히브리서 등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훌륭한 아브람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것을 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문제는 생깁니다. 그리고 힘든 문제는 여전히 힘들지, 믿음의 사람이라고 쉬운 게 아닙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1)

 

오늘 본문은 아내 사래가 출산하지 못했다는 것, 즉 아브람과 사래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토록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나이가 점점 더 들수록 더욱더 애가 타는 상황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손들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 15장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때 믿음의 사람 아브람은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런데도 계속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완벽한 게 아니라, 계속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고 3절을 보면 가나안 땅에 산지 10년이 지났으니까, 아브람은 이때 85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은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처음 나타나신 이후로 이 10년이라는 기간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3년 만에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동네에 이사 온 게 벌써 15년인데, 처음 이사왔을 때와는 아주 다른 동네가 되어 버렸습니다. 건물들도 많이 들어오고 집과 아파트를 많이 지었습니다. 15년 동안 많이 변한 것인데, 사실 요즘은 3-4년이면 굉장히 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주 정확한 시간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빨리 되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정확한 시간표대로 움직이십니다. 서두르지를 않으십니다. 계획대로 실행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오히려 실수는 우리가 서두르다 저지르지, 하나님은 정확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오래 아브람에게 자녀를 안 주십니까? 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까? 약속하셨으면 그냥 착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아브람과 사래가 완전히 죽은 자와 같이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11:12). , 인간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고 자기들의 힘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 되게 하셔서, 아기를 낳았을 때 , 드디어 우리가 낳았구나.’가 아니라 정말 우리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해주셨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셨다.’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더 신뢰하게 하십니다.

 

그래도 아브람은 그런가 보다 하고 나아가는데, 사래는 정말 기다리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남편에게 약속을 주셨어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여 그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2-3)

 

아내가 이렇게 하라는데 거절할 남자는 거의 없는 것 없습니다. 아브람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다른 말들은 잘 안 들으면서 이런 말을 하면 잘 들을 겁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첩으로 들이는 것에 대해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해도 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문화나 법적인 측면을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입니다. 그 당시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아내나 첩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래가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는데 왜 우리라고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 우리도 그렇게 하자. 특별히 지난번 이집트에 갔을 때 얻어온 종들 중 건강하고 젊고 예쁜 내 몸종 하갈을 통해 아기를 낳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래의 계획이 처음에는 아주 성공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갈이 곧 잉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4).

 

결과만 보면 사래의 생각이 맞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옳은 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문화나 관습으로 볼 때 괜찮았을지 몰라도,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아주 급할 때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지금 급하니까 원칙에서 벗어나 편법을 써야겠다.’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실천까지 안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 유혹이 얼마나 심합니까? 얼마나 달콤합니까? ‘요것만 하면 내가 괜찮아지는데. 할까 말까?’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자꾸 유혹이 됩니다.

 

편법이 당장은 좋아 보이고 뭔가 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할 점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이고 이 사람도 하고 저 사람도 하더라도, 또 그렇게 하니까 정말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아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도 성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잘나간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반드시 인정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생활을 떠나 하나님께 예배도 안 드리면서 대신 나가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위도 받고 상도 받고 좋은 데로 취업도 합니다. 교회에 안 나가니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가보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거나 편법을 쓴 것 때문에 결국 그것이 자기 인생에서 발목을 잡는 일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갈을 아브람의 아내로 인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을 아내로 취하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래가 꾀를 낸 것입니다. 나중에 도망가는 하갈에게 나타난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아브람의 아내 하갈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래의 여종 하갈아”(8)라고 부릅니다. 이것만 봐도, 지금 이 일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여종에게서 태어나고 한 사람은 종이 아닌 본처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4:22-23, )

 

너무 분명합니다. 아브람은 육신을 따라 하갈에게서 아들(이스마엘)을 얻었지만, 그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육신의 결과로 나온 겁니다. 사래의 말을 듣거나 자기 생각을 의지하기보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조금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남편이 아내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아내 말을 잘 듣습니까? 그런데 사실 조금 따지고 보면 아내가 하는 말이 맞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내들이 지금 우쭐하고 좋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혜로운 조언,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조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에 그러한 지혜의 여인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좋아하는 식의 말을 사래가 한 것처럼, 이런 식의 말로 남편에게 여지를 주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사래가 이런 말을 했을 때에는 그것이 진심이었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손을 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면 아브람은 사래의 그러한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 제안을 거부하고 이런 식으로 위로하며 격려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보, 당신이 오죽 힘들었으면 이런 말까지 하겠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읍시다. 분명히 때가 되면 아들을 준다고 하셨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하면서 허그도 해주고 그랬으면 좋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라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여자는 몰라도 되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라는 말이 있는 반면, ‘남자는 꼭 알아야 할 일을 너무 모른다. 전혀 관심도 없다.’ 참 맞는 말 같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내를 도와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인 줄 알고 가서 하갈과 동침합니다.

 

사래가 당연히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그렇게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겠습니까? 자기는 나이도 많고 하갈은 십대 소녀인데 그녀를 통해 자녀를 낳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4)

 

지금 아기를 가지더니 하갈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인간적인 편법이 이렇게 처음에는 잘되는 것처럼 보이고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자기 발목을 잡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면, 처음에는 잘 안 풀리는 것 같고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풀리고 은혜를 체험합니다.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자 사래는 마음에 분이 일어납니다. 속이 확 뒤집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브람을 향해 격렬한 공격을 퍼부어 댑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

 

여기 여호와도 언급하고 그러니까 여성분들이 은혜를 받으면서 아멘, 아멘!’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아닙니다. 혹시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면 여기 창세기 165절을 인용해가면서 성경에도 이렇게 있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전혀 잘못 읽는 겁니다.

 

사래의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이 일을 누가 먼저 하자고 했습니까? 자기가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화를 냅니까? 이럴 줄 모르고 그런 겁니까?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어린 아이인데 어린 아이가 무슨 성숙하겠습니까?

 

사실 사래가 원래 이런 여인이 아닙니다. 막말을 하고 독설을 퍼붓는 여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번 실수 때문에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사래가 한 막말과 독설을 우리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한탄할 일입니까? 그러니까 정말 말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화가 나고 분이 올라올 때 심한 말과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자녀 앞에서 정말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로서 잘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생명의 삶>이나 <부모의 삶> 때도 계속 하는 말이지만,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듣고 배우지 않는다는 말은 가르쳐도 소용없다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를 통해 배운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해라고 한다고 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어떻게 사는 것을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자연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동물 울음소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물어봅니다. “여러분, 강아지는 어떻게 짖죠?”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멍멍!” “왈왈!” “, 잘했어요. 그럼 호랑이는 어떻게 울죠?” “어흥!” “, 잘했어요. 그럼 여러분, 제비는 어떻게 울죠?” 그런데 아이들은 제비가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갸우뚱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합니다. “싸모님~!” 그 아이는 카바레 집 아들이었습니다.

 

평소에 말을 우리가 조심해야 하지만, 부모의 태도와 삶 자체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아이들은 정말로 우리가 말한 대로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래가 독설을 퍼부으니까 아브람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6)

 

사실 아브람의 이러한 대답은 안타깝다 못해 한심합니다. 슬슬 눈치 보면서 맘대로 하세요.’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사래는 당연히 자기 맘대로 합니다. 물론 사래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한지를 아브람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말한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래의 감정적인 제안을 애초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실수였지만, 이제 하갈이 아기까지 임신했는데 학대를 받도록 그냥 내버려둔 것은 어떻게 보면 더 큰 실수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편법을 쓰면 처음엔 좋은 것 같고 잘되는 것 같아도, 갈수록 일이 꼬이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실수에 실수를 연발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결국 하갈은 사래에게서 도망쳐버립니다.

 

 

2.   도망가다가 다시 돌아온 하갈 (7-16)

 

이 믿음의 가정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개입해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7-8)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지금 하갈은 하나님을 전혀 찾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오히려 하갈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갈은 지금 모든 사람에게서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녀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하갈은 몸종일 뿐이고 그 뱃속의 아기는 약속의 아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도 사랑하시고 이스마엘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실 누구나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도 악인도 다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시고,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것을 이어받은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주님 품에 안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하갈에게 뭐라고 합니까? 먼저 사래의 여종 하갈아고 부릅니다. 이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네 주제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주제파악을 해라.’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자기가 여주인이 됐습니까?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는 위치에 오른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중요합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저도 철학을 전공했지만, 이것이 철학에서 묻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하갈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사래 집에서 도망쳐나왔으니 어디서 왔다는 것은 대답하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도망을 나온 사람은 어디서 온 것은 알아도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입니다. 어디서 온 것은 대충 알겠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고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혹시 가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이젠 끝장이야. 난 안 되겠어. 이 문제는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사실 그럴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 순간이 왜 안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 반드시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며 절망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내 곁에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며 나 자신에 대해 포기하려는 그 자리에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오히려 그러한 나,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있는 나를 찾아오시고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라.”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하갈은 기대하지 못했던 복을 받게 되는데, 복을 받기 전에 한 가지 해결할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10-11절에 보면 굉장한 복을 약속받는데, 그 복을 받으려면 한 가지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해결해야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러한 복의 근원인 아브람의 집, 즉 사래가 떡 버티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

 

두 가지 명령입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네 여주인에게 복종하라.” 하나님의 천사는 이 명령을 전한 후에 엄청난 복을 약속해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0-11)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셨다하는 뜻입니다. 여기 이게 얼마나 엄청난 내용입니까? 그러나 이런 큰 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갈이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지금 너무 힘들어서 도망쳐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서 봐야 하고 그 밑에 복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관계가 가끔 불편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껄끄러운 관계가 생길 수도 있고, 차가운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때 그 상대방을 계속 대면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목장이나 교회 내에서 누군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불편해졌을 때, 사실 마음 같아서는 목장이나 교회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런 이유로 교회를 옮긴 경우도 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일입니다. 자기 일을 하고 공부하고, 영적으로도 새벽기도나 기도원에 가고 금식기도 하는 것 등은 쉬운 일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아주 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쉬운 일입니다. 무엇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까? 내가 정말 불편한 사람, 껄끄러운 사람을 매주 본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목장에서, 교회에서 훈련하는 겁니다. 보기 싫지만, 불편하지만, 껄끄럽지만, 그래도 가서 보는 겁니다. 만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도 싫은데 들어주고, 맨 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들어주며 참아주고, 오히려 사랑한다고 말도 해주며 섬기고, 내가 말할 때 뭐라고 틱틱 거려도 참아주고... 이런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절대 피상적인 게 아닙니다. 무슨 뜬구름 잡는 게 아닙니다. 저 어딘가 계신 하나님을 뜬구름 잡으면서 하나님,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경배합니다.’라고 하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배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 삶 속에 나와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것, 그래서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씀대로 해보려고 하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갈이 이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갈이 아마도 마음속으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사래에게 돌아갈 수 없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갈이 여기까지 도망을 나온 이유는 진짜 따져보면 사실은 사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게 자기 문제인 겁니다.

 

, 아기를 갖고 나자 어떻게 됐습니까? 교만해져서 난 이제 그냥 종이 아냐. 나는 이 집의 마님이야.’ 이러고 있는데, 사래가 뭐라고 합니까? 사래는 당연히 하갈이 자기 몸종이니까 , 하갈, 너는 그래도 젊고 나는 늙었으니까 가서 물 좀 떠와. 밥 좀 가져와. , 저기 내 옷 좀 걸어놔. 청소 좀 해.’ 이러니까 열을 받아서 확 받은 겁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2)

 

이것은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을 보십시오. 이스마엘이 딱 자기 엄마를 닮은 겁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보고 배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보고 배웠습니다. 하갈이 이와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엄마를 보고 이런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좌충우돌하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런 하갈이 막 성질을 부리고 자기 자리를 떠나 도망 나온 상태에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그것이 네가 살 길이고 복을 받는 길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성질을 낸 것까지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도망쳐 나와 다른 데로 가버리면, 결국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이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주인에게 돌아가라는 것은 너무 힘든데 하갈을 괴롭히는 차원만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때 하갈은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인데, 이렇게 어린 하갈이 이제 처음 아기를 갖고 어떻게 해야 할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계속 광야에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데에 가지도 못합니다. 그냥 목마르고 굶주려서 금방 죽게 되든지, 아니면 맹수의 밥이 됩니다.

 

9개월 동안 용케 버텨서 아기를 낳게 되더라도 그 아기가 어떻게 온전히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시 사래에게 돌아가라하시는데, 이것은 실제로 하갈을 보호하시는 손길입니다. 그것이 안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3-14)

 

감격한 하갈이 천사의 그 말에 싫어요라고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간다고 해도 사래가 자기를 잘 받아 줄지는 의문입니다. 그래도 그 말씀에 순종해서 성질을 죽이고 자존심을 꺾으며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돌아가기만 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래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얼마나 속에서 욱 하고 올라오겠습니까? 그 밑에 복종하라는 것은, 돌아가서도 여전히 자기가 여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건방을 떨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자세를 낮추고 복종하며 인내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기도 살고, 자기도 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엄청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당연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삽니다. 화가 나서 막 나갈 때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실수를 할 때는 있지만, 그것이 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힘들지만 실패한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길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악의 결정이 뭐냐 하면 슬쩍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해결이 안 되었는데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대충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뱃속의 아기가 죽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관계입니다. 그래서 관계가 깨질 때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길 원하십니다. 혹시 해결되지 않은 관계가 있다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부부끼리도 냉전이라면, 자녀와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같은 교회의 다른 지체와의 관계, 또는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어떤 사람과의 관계,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슬쩍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돌아갈 수 있는 문제라면, 찾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정말 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러나 해야 내가 살고 하나님의 복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믿음의 사람의 삶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실수했을 때, 말씀대로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는 도저히 못하겠으니까, 아예 광야에 텐트를 치고 사래가 죽기까지 기다립니다. ‘이제 늙었으니까 조금 기다리면 죽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래가 죽기 전에 내 뱃속의 아기가 먼저 죽는 것을 왜 모릅니까?

 

혹시 사래가 먼저 죽게 되더라도, 그러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사래가 죽게 되어도, 내 뱃속의 생명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광야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자존심이 살아서 펄펄 뛰면, 결국 뱃속의 생명도, 약속도, 나도 죽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죽이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며 나아갈 때 생명이 살아나고 약속이 이뤄집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15-16)

 

여기에는 아무 말이 안 나와 있지만, 하갈이 사래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래도 받아준 것입니다. 사래도 미안하면서도 기뻤을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매일의 삶이 언제나 평안과 기쁨으로만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일이 잘될 때도 있지만, 화가 날 때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리며 꼬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하며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약속해주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내가 나서서 할 때도 있습니다. 마냥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릴 수가 없어 나름대로 편법을 쓰며 대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더 어렵고 힘듭니다. 아무리 일등석에 타서 편안하게 가더라도 그것은 돌아가는 길일뿐입니다. 아무리 이코노미(Economy) 석에 타더라도 직행을 타고 그대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빠릅니다. 아무리 좋은 데에 타면 뭐 합니까? 빙빙 돌아가면 목적지에 늦게 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이삭을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브람과 사래에게 있어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표시가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썼을 때 태어나게 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 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볼 때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결국 그의 잉태로부터 아브람의 집안에는 문제가 연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기 맘대로 편법을 쓰면 이렇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혹시 편법을 써서 성공해도, 결코 하나님은 그러한 성공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됩니다. 똑같은 방법을 써도 다른 사람은 다 잘 되는데 나는 안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게 아니라 나를 너무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불순종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뿐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또한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것을 이루실 때까지 순종하고 인내하며 결국 풍성한 복을 누리며 또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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