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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6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7 ✦
“내일 이맘때에 주님의 능력을 보리라”
(열왕기하 6장 24절~7장 2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특히 여러 기적들, 즉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 명(다 합치면 수만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셨다 부활하신 사건 같이 놀라운 기적 사건을 접할 때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건 좀 너무 황당하다. 말이 안 된다.’라고 합니다. 또는 이런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그래도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결코 황당무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신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기록이 쌓이면서 지금의 성경을 우리가 한 권으로 갖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역사를 다 기록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꼭 배우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냥 보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의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여 주관하시고 일으키신 일들을 기록해놓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기적들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엄청난 기적들을 일으킨 사람을 꼽으라면 엘리야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사실은 그의 제자인 엘리사가 더 많은 기적들을 일으킨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직접적으로 엘리사가 기적을 일으킨 내용은 안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그가 선포하는 것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도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시간이 걸려도, 이런 사건들을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아, 이게 그랬던 것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배경을 살펴보려 합니다.
0. 본문의 역사적 배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엘리사가 선지자(예언자)로 활동하던 시기로, 대략 BC 9세기 중반부인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아 왕과 여호람 왕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BC850~842).
북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들을 괴롭히며 영향을 끼쳤던 나라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앗시리아입니다. 성경에는 앗수르라고 나옵니다. 다른 하나는 아람(시리아)입니다.
앗시리아의 수도는 니느웨였고, 선지자 중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앗수르가 저 앞에 있는 창세기 2:14에 처음 등장합니다. 티그리스 강 상류에 위치한 도시로서, 니느웨가 지금의 이라크 제2의 도시인 모술입니다. 그 당시 앗시리아가 이집트와 더불어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주변 나라를 위협하면서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나라입니다. 역사책에 보면 최초의 초강대국으로 패권을 잡은 나라로 나옵니다.
한편 아람(시리아)은 앗시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있는 시리아의 조상입니다. 이 아름은 앗시리아보다는 약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던 나라로 작지만 강한 나라였습니다. 아람이 강했던 이유는 전략적 요충지인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많은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고, 주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교류하는 교역로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아람도 큰 힘을 기르며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뉜 다음에, 대체로 북이스라엘과 아람과 동맹을 체결해서 그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에 대항하는 동맹 전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해질 때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치열한 전쟁을 치른 적도 많습니다.
앗시리아는 BC 10세기 이후 시리아-레바논 지역에 관심을 보이며 영토 확장을 꾀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노력했는데, 왜냐하면 그곳이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동서가 만나는 지역이고 교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에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체결하여 앗시리아와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통적으로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국력이 비슷했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북이스라엘이 더 세고 어떤 때는 아람이 더 세고, 그 우열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통일왕국이던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조공을 받으며 우위에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북이스라엘로 된 다음에는 힘의 우열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시대인 BC 853년에 아람 벤하닷 2세의 연합군과 앗시리아 살만에셀 3세 사이에 카르카르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전투에서 앗시리아가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비슷하게 하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시리아-레바논 지역의 패권이 앗시리아에게 완전히 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아람이 그 지역을 잡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에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으로 인하여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엘리야 때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통틀어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이 다스리던 때였지만, 그 후 엘리야와 엘리사로 이어지며 회개와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람과 군사적 동맹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고, 잠시 물러나 있던 앗시리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아람 두 나라가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군사적으로 아람이 북이스라엘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앗시리아가 조금 약해져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던 틈을 타서 아람이 지속적으로 북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그에 따라 북이스라엘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이 엘리사의 사역을 기록한 열왕기하 5-7장 사이에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을 알고 열왕기하 5~7장을 읽으면 더 이해가 됩니다.
엘리사 당시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치유 사건입니다. 이것은 어린이 주일학교 때부터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람(시리아)의 핵심 장군인 나아만이 당시 불치병인 나병에 걸려서 이스라엘의 소위 ‘용하다’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오는데, 나가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 그냥 가려다가, 부하들이 ‘더 어려운 것을 시켜도 했을 텐데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하겠습니까?’ 하면서 권하여 해보았더니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당시 불치병인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위험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뭐냐 하면, 엘리사 당시 군사적 우위가 북이스라엘이 아닌 아람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자기 장군을 보내면서 이스라엘 왕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아람이 위에 있어서 북이스라엘 왕에게 고쳐달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군사적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던 아람은 그 원인이 엘리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한 말까지 엘리사가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략에 실패했다고 그들은 판단했습니다(왕하 6:12). 그래서 ‘저 놈만 없으면 된다’ 하면서 엘리사를 제거하기 위해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 지역에 병거와 군사를 보냅니다.
그때 엘리사의 사환이 그들을 보고 두려워 떨면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까,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6:16). 그런데 이 사환은 그것을 보지 못하니까 그의 영의 눈을 열어 이것을 보게 해달라고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가 거기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비록 군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아람보다 열세에 놓여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아람의 침략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지, 군사력의 강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주십니다.
이후 사건을 통해 엘리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그들을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 한복판으로 이끕니다. 그것을 왕이 보고 “칠까요? 칠까요?” 하며 그들을 쳐야 되지 않느냐고 재촉할 때, 북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떡과 물을 주어서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아람 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해줍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때문에 아람이 결코 이길 수 없음을 경고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당분간 아람의 침략이 중단됩니다. 하지만 아람 왕 벤하닷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침략합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되었고, 식량이 완전히 떨어지자 자식까지 잡아먹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고난이었고, 해결책이 전혀 안 보이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왕과 백성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돌립니다. 그 전에 아람에게 큰 타격을 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베풀어서 돌려보냈더니 그 바람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반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1. 아람의 침입으로 굶주린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일 (6:24-31)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24절)
엘리사가 아람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낸 다음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람의 벤하닷은 다시 북이스라엘을 침략해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아람 왕 벤하닷’이 정확히 누구인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어 왔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벤하닷 2세라고 봅니다. 벤하닷 2세는 이스라엘 왕 아합과 그의 아들 여호람 시대에 주로 활동했던 왕입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앗시리아와도 전쟁을 치르며 아람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한 아람 군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사마리아가 먹을 것이 떨어져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도록 만드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그에 따라 사마리아 성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며 아주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25절)
이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라고 하는데, 세겔이라는 것은 화폐단위이기 전에 무게입니다. 지금의 약 2파운드 정도의 무게입니다. 은이 2파운드라면 꽤 무거운 무게입니다. 또 비둘기 똥 4분의 1갑에 은 다섯 세겔(2온스)로 값이 치솟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세겔이 뭔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엄청나게 값이 뛰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벌어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 안 하던 마스크 값이 확 뛰었습니다. 평소에는 별 것도 아니던 것이 값이 확 뛰는 바로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나귀는 평상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식용으로 먹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그 머리는 평소 같으면 그대로 버려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귀 머리 하나가 은 80세겔이라는 엄청난 액수에 팔리고 있다는 것은, 그 정도로 사마리아 성의 식량 부족이 매우 극심했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 ‘비둘기 똥’이라고 되어 있는데, 진짜 그것을 먹었다는 게 아니라 비둘기 똥처럼 여물지 않은 콩을 말합니다. 이것도 평상시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혀 먹지도 않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 먹을 것이 귀하게 되자 그런 것조차 4분의 1갑에 은 5세겔이라는 비상식적인 가격으로 팔릴 정도로 사마리아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와중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여인이 왕에게 와서 재판을 청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6절)
이때 왕은 일종의 자격지심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말이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보나마나 식량을 요청하는 것이겠지’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27절)
‘나도 먹을 게 없는데 어떻게 너를 돕겠느냐?’ 하고 체념과 한탄을 섞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왕에게 자신이 당한 억울한 상황에 대해 다시금 재판을 청하는데, 그 내용은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28-29절)
식량이 떨어진 사마리아 성에서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도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분들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귀합니까? 그런데 내가 너무 배가 고프니까 애들이 음식으로 보인 겁니다. 그래서 잡아먹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귀엽고 소중한 내 아이를 어떻게 잡아먹습니까?
이 정도로 이 상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오래 전에 예언한 내용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자식을 잡아먹을 정도의 위기 상황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은 대가로 벌어지는 심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신 28:53). 참 끔찍한 상황입니다. 내 아이를 먹었고 이제 저 집 아이를 먹기로 했는데 숨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 잡아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닙니까?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입니까?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30절)
이런 상황에서도 왕은 자기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인의 말을 들으며 크게 분노해 자신의 옷을 찢었지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무기력하게 분노만 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백성도 볼 수 있도록 안에 베옷을 입고 회개의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다음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31절)
그의 이러한 태도는 신약시대 때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겉과 속이 다른 태도와 똑같습니다.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자기가 먼저 회개하며 본을 보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원인이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내가 오늘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서 포위를 당했는데, 왕으로서, 나라의 지도자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하고만 있습니다. 넋을 놓고 아무것도 못하던 왕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죽이려는 데는 아주 속전속결로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여기 보시면 “오늘” 죽이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그렇게 빨리 하겠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 왕이 겉으로는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속에 입으면서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왕으로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데에만 급급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크리스천인데,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하는가 아닌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우리 삶에 벌어졌을 때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간절히 하나님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열심히 노력을 하는지? 아니면 ‘이게 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라고 하는지? ‘이게 다 저 사람 때문이다’, ‘부모 탓이다’, ‘조상 탓이다’, ‘나라 탓이다’, ‘나라의 지도자 때문이다’, ‘정치인들 때문이다’, ‘대통령 때문이다’, ‘저 나라 때문이다’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위기 앞에서도 담대한 엘리사 (6:32-33)
사마리아 성의 위기는 북이스라엘 왕 혼자만의 위기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위기입니다. 엘리사도 역시 이때 똑같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며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고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왕이 보낸 군사의 칼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느껴지는 분위기를 보면, 그는 별로 이런 끔찍한 위기상황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32a절)
지금 왕과 함께 앉아 있어야 할 백성의 장로들이 엘리사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이 엘리사와 함께 있는 것은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 대책 없이 한탄만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죽이려 하는 북이스라엘의 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에게서는 현실을 한탄하거나 원망하는 모습, 또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 즉 ‘엘리사 당신 탓이요’ 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회개하며,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32b절)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왕이 그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담대하게 왕의 사자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장로들에게 왕의 사자를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왕의 사자는 장로들에 의해 엘리사에게 접근하는 것이 차단되었습니다.
이것은 왕의 권위가 이미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무기력함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살인한 자의 아들’이라는 말은 북이스라엘 왕의 성품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2c절)
왕은 자기의 결정을 후회했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 자기가 보낸 사자(장군)를 곧 뒤따라갔고, 엘리사는 이것도 영으로 감지하면서 ‘그 주인의 발소리가 뒤에서 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33절)
이것은 해석이 조금 어려운 부분입니다. “왕의 사자” 곧 왕이 보낸 장군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왕이 이르되”라고 하며 왕이 나타나 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조금 쉽게 생각하여 본문의 전후 관계를 생각해보면, 6장 32절에서 ‘왕의 사자가 다가올 때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난다’는 엘리사의 말과 7장 2절에서 엘리사 앞에 왕과 그 수행원들이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면, 6장 33절의 ‘그 사자’는 원문으로는 ‘그’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자보다는 ‘그 왕’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자냐 왕이냐?’ 하는 것보다도 왕이 무슨 말을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라는 것이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재앙이 여호와로부터 나왔으니까 주님으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할 수가 없다. 상태가 호전되는 것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왕의 믿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신 것은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주셨는지, 이스라엘이 정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었던 왕은 이제 하나님께로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뭘 더 기다리겠는가?”
여러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지금 내가 힘든 상황에서 자꾸 남의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험담하고 비난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있으셔서 지금 이렇게 하시고, 분명히 하나님은 인도해주실 것이다.’라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3. 엘리사가 바라본 회복의 소망 (7:1-2)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자녀까지 잡아먹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사마리아 성에서, 엘리사는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1절)
여기서 엘리사는 직접적인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물가가 변화된다는 것을 회복의 상징으로서 제시합니다. 즉,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나귀 머리 하나가 은 80세겔에 팔리고, 설익은 비둘기 똥 같은 콩 1/4갑이 은 5세겔이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하루아침에 회복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일 이맘때에” 고운 밀가루 1스아가 1세겔, 보리 2스아가 1세겔에 거래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까지 잡아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 볼 때, 아람 군대를 물리칠 수도 없고 그래서 사태가 장기화 될 것을 누구나 아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먼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내일 이맘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위기가 지나가고, 사마리아 성이 전쟁 이전의 상황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기 힘든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정말 믿기 힘든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세겔’이나 ‘스아’라는 단위가 나오지만, 중요한 것은 엄청나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아주 싼 가격으로 내렸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 상황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능력을 정말 경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고통 속에 있는 백성이 가장 듣기 원하는 말인 ‘내일 이맘때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원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사람이 받을 심판에 대해서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2절)
이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라고 묘사된 장관은 아마도 왕의 군마를 포함하여 전투에 참가하는 모든 군마와 병기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직책을 맡은 아주 높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회복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신의 언어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왕이 이야기한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이야기한 것을 보면, 왕과 그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가 전혀 믿음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어 곡식들을 사마리아에 쏟아 붓는다 한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불신의 말을 합니다. 이 장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때 물이 땅에서도 터지고 하늘에서도 ‘하늘의 창’(창 6:11)을 열고 쏟아 부으신 것과 같은 표현을 여기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곡식을 쏟아 부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맞는 말이고, 누구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 능력의 역사를 믿지 못했던 이 장관에 대해 엘리사는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정확히 너는 죽을 것이라는 심판의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장관은 성문 앞에 있다가 백성에게 깔려 죽습니다(7:20). 정말로 역사가 일어난 것을 봤지만 먹지 못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장관은 아주 똑똑한 사람입니다. 가장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가 제일 똑똑했는데, 그런 사람입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이 안 된다고 전혀 믿지 않고, 자기 상식, 자기 지식, 자기 경험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성으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어떻게 하실 수 있겠느냐?’라고 합니다.
가끔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 같은 데 보면, 왕이 있고 그 앞에 조정대신들이 앉아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청자 입장에서 그런 장면을 볼 때, 특히 엉뚱한 것을 가지고 “전하, 이것을 해주십시오. 저것을 해주십시오.”라고 하거나, 왕이 뭔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불가합니다.”라고 반대하는 모습을 볼 때 굉장히 답답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아니,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멍청하게 반응을 하나?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못하게 하나?’라고 느끼는데, 우리는 역사를 다 알고 그것을 거꾸로 그려낸 사극을 보니까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당시 그 조정대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제일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제일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전하, 그건 안 됩니다. 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아는 우리가 나중에 볼 때는 ‘어휴, 저런 멍청한 사람들. 저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꼴이 됐지.’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하는 제일 똑똑한 말, ‘하나님이 뭐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시겠나? 이건 상황에 이건 이거지. 저건 안 되지.’라며 굉장히 똑똑하고 굉장히 합리적인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니 조금 시간이 지나서 나중에 돌아보면 ‘그렇게 멍청한 생각이 없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담대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신뢰했던 엘리사와,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듣고도 의심한 장관의 운명은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7장을 죽 읽어보면, 이후 상황은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에게 큰 병거 소리와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굉장히 두려워합니다(7:6). 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정보를 준 것도 아닌데 그냥 큰 소리를 듣고서 ‘아, 이스라엘 왕이 헷 사람과 애굽 사람들 용병을 샀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군대가 우리를 치러 왔다.’ 하면서 막 두려워하고 도망갑니다. 물건도 안 챙기고 야반도주를 합니다(7:7).
그래서 그들이 남기고 간 엄청난 군수물자로 인하여 엘리사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7:16).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장관은 성문에서 백성에게 밟혀 죽음으로(7:17)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셨다고 알더라도, 그 회복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참 적다는 것입니다. 이는 북이스라엘 왕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고난의 환경을 주셨다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낸들 아람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해결할 능력은 없다.’라고 장관의 입으로 같이 이야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6:33).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지금도 ‘이런 일은 하나님도 못하신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능력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신자들 중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무시하고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러 고난의 환경을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모든 고난은 즉시 중단되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환경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그들을 징계하시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표현이며, 그들이 돌이킬 것을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엘리사는 고난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장로들과 함께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그때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자 사랑입니다.
지금 많은 어려운 일들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은 죽음과 같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엘리사처럼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르게 움직이고 계심을 확신하며 회복의 소망을 담대히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할 것을 확신하고 외쳐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