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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5 ✦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발생한 문제”
(창세기 21장 8~21절)
[들어가는 말]
어린 아이들은 두 살 정도만 되면 굉장히 활발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두세 살 정도의 아이들은 대개 자기와 잘 놀아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나 사람의 이름이 자주 바뀌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세 살 아이의 부모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나가서 신나게 다른 아이들과 놀던 내 아이가 울면서 들어옵니다. “왜 울어?” 하고 물으니까 “같이 놀던 형아가 때렸어.”라고 합니다. “어디 봐.” 하고 몸을 보니까 멍 자국도 있습니다.
그걸 보니까 너무 열 받아서 즉시 밖으로 나가 내 아이와 같이 놀던 큰 아이를 붙들고 야단을 칩니다. “야, 너는 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어린 동생을 때리고 왜 그래?” 그러자 “내가 언제 그랬어요?”라고 오히려 대들며 화를 냅니다. 그런데 한두 번이 아니고, 아이가 나가서 놀 때마다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 부모로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 싸움이 부모 싸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스러운 상황입니다.
바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겁니다. 이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태어났으니까 ‘야, 이제 다 끝났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 이제 꽃길만 걷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새로운 갈등 (8~13절)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8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고 잘 자라서 젖을 떼던 날에 잔치를 베풉니다. 젖을 떼는 시기는 시대나 문화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요즘은 이유식도 굉장히 발달했고 여러 가지 조건이나 위생도 너무 좋아졌으며 아이들 발육도 좋으니까, 한 살도 되기 전에 젖을 떼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먹을 것도 별로 없고 간식도 마땅치 않던 고대시대 때는 아이들이 젖을 뗀 시기가 늦었습니다. 빨라도 두 살 정도였고, 대개는 서너 살 정도였습니다. 그 이상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관례에 따라 아이가 젖을 떼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100일과 돌잔치를 중요시하듯, 그 당시 유목민들은 젖 떼는 것을 아주 크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태어난 후 가장 중요하고 기쁜 날이 되었는데, 정작 주인공인 이삭이 놀림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또 다른 문제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9절)
이삭이 젖을 떼는 것을 기념하여 큰 잔치를 베풀던 날에, 사라는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 즉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삭을 놀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놀림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마엘은 동생인 이삭을 왜 놀렸는가? 둘째, 이스마엘이 어떤 식으로 이삭을 놀렸는가?
먼저, 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겠습니까? 고대사회는 사라 같은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을 때 종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경우가 많았는데,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종의 아들이 재산을 다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이 자기 종 엘리에셀에게 다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종이라고 못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이니까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부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종의 아들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고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애굽 출신 여종 하갈에게서 86세에 낳은 아들입니다(16:16).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열네 살 더 많습니다.
이스마엘은 14년 동안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아들이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가 열네 살 때 90세이던 본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열네 살이면 웬만한 것은 다 판단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 동안 자기 엄마 하갈이 ‘야,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모든 아버지의 재산에 네 것이 된다.’라고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의 본부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하갈의 꿈은 이제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하갈이 어떤 성격입니까? 지난번에 사라가 학대한다고 집을 확 뛰어 나가버린 아주 강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도 역시 “들나귀”(16:12)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성격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스마엘이 이삭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저 녀석만 없었으면 이 엄청난 재산이 다 내 것이 되는 건데 저 놈 때문에 다 틀렸다.’라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이제 젖을 떼게 된 이삭이 2~4살이라고 한다면, 이스마엘은 이제 16~18세 정도입니다. 다 큰 겁니다. 그 동안 이삭은 자기 엄마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는데, 이제 어느 정도 뛰어다니며 놀 만한 나이가 되자, 이스마엘은 그런 이삭을 슬슬 데리고 놀다가 자주 놀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이스마엘이 놀린 것이 어떤 식으로 놀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점은, 이 ‘놀림’이라는 것이 결코 순진한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리다’라는 동사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짜학’입니다. 구약에서 몇 번 사용됩니다.
26장 8절을 보면, 이삭과 리브가가 흉년으로 인해 블레셋으로 갔을 때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 왕이 보니까 숙소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는 것을 봅니다. 이 ‘껴안다’라는 단어가 ‘짜학’입니다.
또 나중에 요셉이 애굽에 팔려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가 안 통하니까 집 사람들을 불러서 요셉에게 누명을 씌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39:14). 여기서 “희롱”이라는 단어가 바로 같은 단어인 ‘짜학’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는(짜학) 것은 단순히 아이들끼리 툭툭 치고 약 올리며 놀린 정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보다 더 심한, 어떤 성적 행동이 포함된 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16~18세 이스마엘이 2~4세 이삭에게 아동 성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나이 청소년, 특히 남자 아이들은 절대 순진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스마엘이 그 당시 어떻게 놀았겠습니까? 주변 가나안 민족들의 애들과 놀았을 텐데, 가나안 민족이 얼마나 음란한 민족입니까? 어릴 때부터 음란한 것만 보고 자란 가나안 민족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그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즘 고등학생 성범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며칠 전 중학생도 성범죄를 저지른 소식을 듣는데, 요즘만 아니라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짜학’이란 단어가 쓰였다고 해서 100% 반드시 성범죄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들을 살펴보면 다 그런 경우였습니다. 성범죄와 관련된 경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이삭에게 단순한 장난 이상의 어떤 짓을 한 겁니다. 성폭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말로만 하는 성희롱을 넘어서 만지는 성추행을 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이삭이 이상한 반응도 보여서 사라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서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날은 마침 사라가 이스마엘의 이삭에 대한 성추행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9). 이때 사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0절)
사라가 처음부터 이스마엘을 쫓아내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갈이 임신했을 때 사라의 학대를 못 이기고 도망쳐 나가지 않았습니까?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이때까지 약 16~18년 동안 함께 살아 온 것을 보면 처음부터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인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아주 악한 가나안 식의 성추행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더 이상 이스마엘과는 함께 살 수 없고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완강한 태도로 나오는 사라의 말에 대해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1절)
사라에게 이스마엘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 “이 종의 아들”(10)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입니다.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매우 근심하게 됩니다. 자기 잘못으로 낳은 아들이긴 해도, 어쨌든 자기의 아들 아닙니까? 또한 사실은 사라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낳은 아들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 아들 이스마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아가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었지만, 자기 아들 이스마엘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겁니다. 사라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되도록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크게 근심이 됩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실수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아들 문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고 포기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잘 만들어나가신 인간이지, 절대 처음부터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똑같은 고민이 있었고, 우리보다 더 안 좋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놀랍게도 이스마엘을 포기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2절)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14년 동안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아무리 이삭이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아들이라고 해도, 첫 번째 아들인 이스마엘을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스마엘은 아직 포기하지 못한 최후의 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포기할 수 없는 자기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이것만은 안 된다고 꽉 쥐고서 고집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질 문제, 진로 문제, 자녀의 공부 문제, 사업 문제, 직장 문제, 결혼 문제, 가정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 다른 문제는 그렇게 잘 처리하면서 유독 이것만큼은 안 된다고 하며 포기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져 제대로 처리를 못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혹시 그런 부분이 나에게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하며 다스리시도록 내어드릴 수 없는 부분이 뭡니까? ‘다른 것은 다 주님 뜻대로 하겠지만 이것만큼은 내 뜻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영역이 있습니까? 이 문제만 나오면 판단력을 잃고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입니다. 우상이 단순히 만들어놓고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내가 하겠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다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이것만은 내 거니까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래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내 인생이 망가집니다.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나를 위해서 또 그 사람을 위해서, 내려놓고 포기하라 하십니다. 너무 사랑해서 붙들고 있는 사람도 그렇고, 너무 미워해서 증오하는 사람도 그렇고, 그 사람을 내가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내가 망가지고 그 사람도 망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인생이 망가지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3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내려놓고 포기하라고만 하신 게 아니라 한 약속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주어가 누구입니까? “내가”, 즉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마엘도 한 민족이 될 것이고,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으시니까 거기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근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근심하는데, 진짜 문제가 근심하여 붙드는 것입니다. 놓으면 근심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붙들고서 ‘이스마엘이 정말 잘되어야 하는데’라고 한다고 그가 잘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고 맡길 때 오히려 이스마엘이 잘되고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마엘의 인생을 아브라함이 책임져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스마엘의 인생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져주십니다. 그래서 이때 아브라함이 할 일은 하나님께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맡기고 그들을 집에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내보내야 하나님이 직접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 맡깁니다.’라고 해놓고 자기가 계속 끼고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스마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 일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알아서 처리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그 문제를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잠도 못 자고 근심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알아서 책임져주실 것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내보내는 것은 사람마다 문제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보시는 하나님 (14~21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4절)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 명령대로 행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을 받으면 항상 시간 끌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실행하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가서 즉시 행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제가 신뢰합니다. 내려놓겠습니다.’ 해놓고는 시간을 질질 끌다가 ‘하라니까 왜 안 해?’라고 하시면 ‘아이, 조금만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라고 하는 게 아니라 즉시 하는 것입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5-16절)
졸지에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헤매다가 아브라함이 준 떡과 물이 다 떨어집니다. 이제 광야에서 빵도 그렇지만 물이 없으면 어떻게 삽니까?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하갈은 이스마엘을 덤불 아래 뉘어 놓고(15), 자기는 화살 쏘면 떨어질 정도의 얼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아이와 마주보며 아주 통곡을 합니다(16). 그래야 엄마가 우는 소리가 아이에게 안 들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하갈이 소리 지르며 울었지만, 그것이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들 속에 있는 절망과 낙심과 원망과 분노 같은 것을 막 쏟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소리조차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7-18절)
“저 아이” 즉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이스마엘이 ‘목 말라. 목 말라.’ 하고 괴로워하며 소리 지른 것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아브라함 가문의 밖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돌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가끔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데 일이 잘 안 풀리고,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일이 잘 풀린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들을 보십시오. 주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자이고 잘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만 챙겨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나 사랑하시고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요즘 한국에서 참 문제가 되는 게 ‘진영논리’입니다. 우리 편은 뭘 해도 맞고 잘못된 일을 해도 괜찮고, 상대방은 좋은 일을 해도 비판하고 잘못한 일을 하면 완전히 깔아뭉개는 것이 진영논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논리에 빠져 있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당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갈과 이스마엘은 둘 다 포기하고 죽으려는 상태입니다. 16절에서 하갈이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제 아들이 목 말라 죽으면 나도 죽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천사가 나타나 하갈의 소리가 아니라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17)습니다.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고, 하갈의 소리를 들으신 게 아닙니다. 자세한 것이 안 나와 있으니까 모르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스마엘은 ‘내가 목말라 죽겠다.’ 하고 울부짖으며 울었던 것이고, 하갈은 분노와 원망과 불평과 독설과 저주를 쏟아놓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를 내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무슨 뜻입니까? 아직 힘이 남아 돈다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힘이 없어서 그냥 뻗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막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히 지쳐 떨어진 이스마엘에게 일어나 물을 떠서 마시라 하지 않으시고, 힘이 남아도는(?) 하갈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샘물을 보여주시며 떠서 마시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살리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여종의 아들도 네 씨”(13)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정말 신뢰했기 때문에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그의 믿지 않는 가족까지 책임져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3, 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할 때 “모든 것”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뭘 고민하십니까? 그게 여기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이스마엘도 “모든 것”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 대신에 내가 지금 고민하고 근심하는 문제를 넣어보십시오. 내 앞길도, 자녀도, 가정도, 진로도, 물질도, 직장도, 사업도, 교회도, 인간관계도,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이 ‘모든 것’이라는 말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할 때 다 채워주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행하라는 게 아니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우선순위를 올바로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일들을 다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딘가 비는 구석이 있습니다. 자녀 키우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도 아들이 어릴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가르친다고 해도 아이의 성격을 잘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조심을 시킨다고 해도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내가 완벽하게 막아줄 수 없습니다. 학교에 가서 또는 가는 동안 어디서 무슨 일이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다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지고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19절)
지금 하갈과 이스마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 바로 옆에 샘물이 있었는데, 못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샘물이 있는데도 모르고 ‘아이고, 나 죽겠네.’ 하면서 죽으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샘물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것을 못 보고 죽어가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가 못 본 건데도 이스마엘은 목이 말라서 ‘나 죽겠다.’ 하며 누워버렸고, 그것을 본 하갈은 ‘차마 눈 뜨고 내 아들이 죽는 꼴은 못 보겠다.’ 하며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아이를 보며 울고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자기들을 살릴 수 있는 샘물이 있었습니다. 단지 자기들이 못 본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우리 주변을 잘 보면,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주셨는데도 자기가 못 보고는 안 주신다고 분노하고 원망하면서 ‘에이, 확 그만둬버릴까?’ 하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주로 이런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인데 하늘에서 갑자기 물이 확 떨어져서 마시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미 있는데 못 보고 있었지만 그것을 보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엄청난 기적들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이미 우리 삶에 주어진 것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못 보고 있던 것인데, 내 눈을 뜨게 하셔서 그것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잘 살펴보십시오. 부족하고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 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못 본다는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말씀이 너무 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마셔야 할 샘물은 바로 이 말씀의 샘물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샘이고, 이것을 마시면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컬컬하고 불안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기는 하는데 왜 별로 변화가 잘 안 됩니까? 왜 분노하고 원망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일어납니까? 말씀의 샘물을 마시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닌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고 마셔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20-21절)
분명히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20)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집트 여인인 어머니 하갈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 신들이나 가나안 신들을 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또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 교도들, 즉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고 무슬림들은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종교적으로 그렇게 자기들을 정의합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언젠가 그들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사랑하시고 이방 민족도 사랑하십니다. 아랍 사람들도 사랑하시고, 불교도들도 사랑하시고, 무신론자들도 사랑하시고, 심지어 사탄교도들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원수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십니다. 뉴스를 볼 때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처럼, 우리도 누구나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별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구하며 하나씩 실천해나갈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인도하시는 손길을 생생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