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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ApYQ2wc53TY?t=2005
2020년 8월 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1 ✦
“믿음의 인내 끝에 주어진 르호봇의 은혜”
(창세기 26장 12~22절)
[들어가는 말]
17년 전 저희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같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희가 미시건에 있었고 그때는 있던 노스웨스트 항공(Northwest Airlines)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직항이 없고 일본 나리타공항을 경유해서 갔습니다. 그때 가족은 먼저 가고 제가 나중에 갔는데,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걸어가다가 계단을 내려갈 때 엄청나게 큰 벽에 광고가 있었습니다. 보니까 한국의 삼성 티브이 광고였습니다.
그것을 본 저는 속으로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곳은 일본의 심장인 도쿄의 나리타 국제공항이었는데, 일본의 소니 같은 제품이 아니라 한국의 삼성 광고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그 때 정도부터 한국 제품들이 일본의 소니와 다른 회사들을 추월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콜럼버스에 이사 올 때도 냉장고와 세탁기를 사려고 가보니까, 삼성과 LG 제품이 상당히 고급 제품이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오히려 거꾸로 일본의 소니 같은 데가 한국의 삼성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경쟁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놀랐습니다.
휴대전화 시장에서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의 갤럭시가 계속 경쟁해왔는데, 요즘은 중국 제품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더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특히 중국 사람들이 전 세계에 많이 있기 때문에 중국 전화기들이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21세기는 무한경쟁의 시대입니다. 끝없이 연구하며 경쟁하는 자는 살아남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해서 느슨하게 대처하면 곧바로 뒤처지는 시대가 오래 전부터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노키아(Nokia) 쓰는 분 계십니까? 블랙베리(Blackberry)나 소니 에릭슨(Sony Ericsson) 쓰십니까? 이전에는 많이 썼는데 경쟁에 뒤처져서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이런 경쟁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갈등을 겪습니다. 살아남으려면 눈에 불을 켜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성경은 마치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따라 살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본문에서 이삭이 보여주는 믿음의 인내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1. 그랄에서 복을 받은 이삭 (12~14절)
이삭은 흉년 때문에 아주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서 애굽 땅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셔서 하는 수 없이 그랄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1-2). 하나님이 가나안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니까 억지로 주저앉았을 뿐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이삭은 그랄에서 거짓말을 하고 실수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문제가 해결된 후 이삭에게 엄청난 물질적인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2-13절)
이삭은 농사를 통해 100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이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흉년이 든 때였고, 그랄은 농사를 짓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 같은 데서 무슨 농사를 짓겠습니까?
다 망할 것 같은 상황, 흉년이 들어 죽을지 몰라 남의 땅에까지 갔는데, 그때 이삭은 분명히 기도하며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셔서 100배의 수확을 함으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서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면 세상에 있는 복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잘 안 되거나 어려움이 생긴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내게 연단의 시간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어떤 것을 위해 준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로 갔는데도 어려움을 당하고 일이 안 풀린다면, 우리는 당연히 물질을 잃을 수도 있고 명예를 잃을 수도 있고 체면이 깎일 수도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우리 삶 전체를 향한 복을 얻게 되는 시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잃은 것에 비해 얻은 것이 비교도 안 되게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복을 주시는가 하면 100배를 주십니다. 100배를 이자율로 따지면 몇 퍼센트입니까? 10,000%입니다. 이런 이자율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물론 이 100이라는 숫자는 문자 그대로 100배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엄청난 복을 쏟아부어주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좋은 땅에 씨가 뿌려졌을 때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마 13:23)
사실 본전만 찾아도 괜찮은 겁니다. 그런데 두 배나 세 배를 얻었다면 굉장한 것인데, 하나님께 그런 것은 숫자도 아닙니다. 시시해서 그 정도로 안 하십니다. 기본이 30배이고 보통이 100배입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4절)
이삭은 양과 소와 종들이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목축을 해서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농사도 지었고 목축도 했습니다. 원래 목축을 하는 사람인데 농사를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농사도 잘되고 목축도 잘됐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12).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삭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풍성해지고, 돈 잘 벌고, 사업이 성공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성공하고,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넉넉한 삶을 허락해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자기 고집을 꺾고 자기 욕망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도 아이가 예쁜 짓을 하면 막 주고 싶지 않습니까?
이삭도 아브라함처럼 실수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명령에 그저 순종했을 때, 있으라고 하시니까 그냥 있었을 때,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그에게 내려주신 물질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삭도 자신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시니까 그곳에 계속 머물렀던 이삭의 부족한 순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엄청난 물질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 자기 욕심을 내려놓고 주장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세상의 성공을 통해 위로를 주기도 하십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많습니다.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며 섬길 때,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며 채워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삭도 순종하기 위해 남았지만 속이고 실수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완벽한 순종이 아니더라도,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그랄에서 쫓겨나는 이삭 (15~16절)
그런데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거부가 된 이삭에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4). 이삭이 어려운 상황에서 왔을 때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던 사람들이, 이제 이삭이 갑자기 잘되고 부자가 되니까 경쟁자로 보고 경계하면서 시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랄 사람들의 이삭에 대한 시기와 미움이 어떤 형태로 나타납니까?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5-16절)
그들은 이삭이 더 이상 목축을 못하게 하려고 일단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판 우물들을 막고 흙으로 메워 버립니다. 이것은 정말로 치사하고 더러운 짓입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우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물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을 흙으로 메워버리니 얼마나 못된 짓입니까?
차라리 자기들이 빼앗았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그것을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게다가 이 우물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겁니다. 그런데 다 흙으로 메웁니다. 그리고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아예 자기들의 땅에서 쫓아내버립니다.
제일 억울한 게 그런 겁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냥 너무 잘생긴 것, 머리가 좋은 것, 돈이 많은 것, 재능이 뛰어난 것, 학벌이 좋은 것밖에 없는데, 그런 것 때문에 ‘당신, 그만두시오.’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아니, 왜 그만두어야 합니까?’라고 하면 ‘너무 잘나서 그렇소. 그만두시오.’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자기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네가 우리보다 강하니까 나가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관계에서 생기는 일들을 보면 의외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일보다 감정으로 진행되는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기분 나빠서 관계가 나빠지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쫓겨납니다. 남의 땅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겠습니까?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당황스럽고 이해가 안 갑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땅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셔서 머물러 있었고, 그랬더니 많은 복을 내리셔서 100배의 수확도 얻었습니다. ‘야,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이렇게 되는 구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또 짐승들과 종들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떠나라고 하니까 그러한 복을 거둬 가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냥 잘 살게 두시지 왜 이런 험한 일을 당하게 하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푹 빠져서 그것을 즐기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100세에 낳았을 때 너무 좋아서 이삭에게 푹 빠져 살다가 하나님의 테스트를 받은 것처럼, 지금 이삭도 먹고 살 정도를 넘어서서 너무 풍성해지니까 조금 나태해지고 게을러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푹 빠져서 즐기며 사는 겁니다. 자기가 농사를 짓던 땅에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삶이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런 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곳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에 취해서 거기에 집착하면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그렇게 망가지고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적절한 시련도 함께 주신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이 잘되고 가는 길이 평탄하기를 원합니다. 내 삶에는 아무 문제도 없고 그냥 탄탄대로만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항상 편안하고 항상 돈도 많으면 좋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타락하고 맙니다. 논리로 설명이 안 됩니다.
퇴폐적이고 음란한 업소들이 가난한 나라에 더 많습니까, 부자 나라에 더 많습니까? 부자 나라에 몰려 있습니다. “실패를 이기는 사람은 많아도, 성공을 이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시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하시면, ‘아, 하나님이 내 삶을 기뻐하시는구나. 감사하다.’라고 생각하며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방심하고 느슨해지고 게을러질 때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과 예배의 자리로 더 나아갈 때입니다. 성공할수록 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약해질 때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 거기에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살며 ‘조금만 더 벌어야지, 조금만 더 올라가야지.’ 하고 살면 무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조금씩 쌓이면서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성공의 늪에 빠져서 무너지지 않도록 적절히 우리를 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감사가 아니라 ‘네가 잘나서 됐지. 내가 열심히 했으니까 됐지.’라고 하는 것에서 끝나버리면 거기 푹 빠지게 되고 집착하게 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잘되면 우리는 오히려 긴장해야 합니다. 걱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 바짝 차리고 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될 때 물질에 집착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놀랍게도 그런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괜찮던 사람이 시비를 걸고 좋았던 관계가 나빠지는 일로 나타납니다. 가족끼리도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타락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깨닫고 빨리 하나님께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인내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는 이삭 (17~22절)
이제 이삭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랄 사람들과 맞붙어 싸우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떤 것을 선택합니까?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7절)
아비멜렉은 자기들 가운데 사는 이삭이 자기들보다 “크게 강성”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알고 이삭에게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이때는 아직 흉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삭은 그랄 지역을 떠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대신,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골짜기로 갑니다.
우리가 이삭처럼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그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삭이 기도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이삭이 기도했을 것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지혜로는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인정하며,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하나님은 복을 주시다가 졸지에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의 이유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롬 8:28) 우리는 더욱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다 보면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아주 놀라운 아이디어와 생각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노트를 가지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생각이 떠오를 때 빨리 적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지금 당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변두리로 쫓겨난 이삭은 마음이 상당히 안 좋았을 겁니다. 그랄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향해 복수심이 일어나고 원망이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8절)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17절과 18절 사이에 이삭이 기도했다는 말은 안 나오지만 분명히 이때 기도한 겁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땅에서 쫓겨날 상황입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 그렇지, 나는 원래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목축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면 아버지가 판 우물들을 저들이 메웠지만 그것들을 내가 다시 파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번쩍 떠오른 겁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분명히 이삭의 종들 중에 그랄 사람들과 맞서 싸우자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그냥 버티자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삭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겨우 이까짓 땅이나 우물 몇 개를 지키려고 분노하며 혈기를 부리고 저들과 싸울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내 생명은 저런 것들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을 떠나 골짜기로 들어가서 장막을 쳤는데, 그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파는 지혜를 이삭에게 주셨고, 또 물도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어떤 생각이 탁 떠오르게 해주십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지혜가 번쩍 하고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 내가 지금까지 막 붙들고 씨름했던 이것이 내 생명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그러면 여유가 생깁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그것을 보는 내 눈이 바뀝니다.
여러분, 우리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살아야 한다. 집은 이 정도는 돼야 한다. 내 아이는 이런 모습으로 커줘야 하고, 이런 학교 정도는 가줘야 한다. 하나님도 이런 분이셔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나를 어리석게 만들고 망치는 길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집착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들을 놓으면 오히려 자유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삭은 기꺼이 농사를 포기했습니다. 사실 100배의 결실을 얻은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하면 그랄 사람들과의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 그랄 땅을 포기하고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물을 파는 데 전문가였기 때문에 이삭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우물 파는 데를 많이 따라다녔던 그 생각이 든 겁니다. 기도하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겁니다.
그래서 이삭은 낙심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옛날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팠던 그 우물의 위치를 기억해내서 다시 팝니다. 이것도 기적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것이 기억납니까? 몇 십 년 전 위치가 어떻게 기억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시 파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19절)
판 곳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것도 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샘이 나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랄 사람들이 와서 이 우물이 자기들 거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0절)
‘에섹’이라는 말은 ‘다툼’이란 뜻입니다. 양보를 했는데도 그랄 사람들이 또 달려들어 억지를 부리니까, 이삭은 싸우는 대신 그것을 넘겨주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팝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1절)
“싯나”는 ‘반대’ 또는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이 가만 보니까 자기가 뭘 해도 반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기와 미움으로 가득하니까, 이삭이 하는 일은 무조건 미워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끝까지 그들과 싸우지 않고 견디며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갑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2절)
우물이 넉넉해지니까 그랄 사람들도 더 이상 이삭에게 시비를 걸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이삭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넓은 장소를 주셨으니까 더 이상 다투지 않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참지 못하고 폭발하며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삭은 다 빼앗기고 잃어버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싸우자는 겁니다. 싸움을 돋우는 겁니다. 사실 우물을 빼앗으면 덤비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을 건드려서 화를 내며 싸우러 나오면 그때 박살을 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비를 거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탄의 전략이 다 그런 것들니다. 우리를 막 격동시켜서 화가 나게 하고, 이성을 잃게 하고, 그래서 싸우게 만들어서 우리를 무너뜨리는 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실 우리가 목숨을 걸 만한 일이 얼마나 됩니까? 목숨을 걸 만한 일도 아닌데 거기에 우리가 격동해서 흥분하며 싸우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삭은 거기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겁하거나 비굴하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받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 여기로 저기로 옮겨 다니는 것입니다. 결국 끝까지 인내하여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기도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정말 비겁한 사람이고 비굴한 사람이 아닙니까? 도망자가 아닙니까? 비굴한 자, 도망자가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는 순간순간마다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갔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데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하니까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일어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족끼리도 그렇고, 이웃과도 그렇고, 교인과도 그렇고, 직장이나 사업에서 다른 사람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화가 나서 혈기로 대항할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공격당하고 안 좋게 되더라도, 바로 그때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온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직접 통화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할수록 더 기도로 나아가보십시오. 그러면 양보할 수 있는 넉넉함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오히려 놀라운 승리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이삭이 우물의 이름을 정한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우물에 와서 시비를 거니까 ‘이게 다툼이구나.’ 하고 ‘에섹’이라고 이름을 짓고, 그 다음 또 와서 행패를 부리니까 ‘이게 대적함이구나.’라고 하며 ‘싯나’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이 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 저런 악질적인 놈들이 있나. 와서 다투지를 않나, 대적하지를 않나.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녀석들!’이라고 할 상황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언제 했습니까? 하나님과 둘이 있을 때 한 겁니다. 그들을 대하여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겁니다. ‘아, 하나님, 이건 싸움이군요. 이건 대적함이군요. 이건 나를 무너뜨리려는 궤계이군요. 이건 나를 공격하는 싸움이군요. 그런데 르호봇, 이제는 괜찮군요.’ 그는 기도하면서 갈등하며 아뢰다가 응답받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압니다. 우리의 기도는, 특히 관계의 어려움이 생겼을 때 드리는 기도는, 에섹에서 싯나로, 또 거기서 르호봇까지 가는 과정을 밟습니다. 다투고 대적하고 그러다 결국 넓은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막 격동되고 싸우고 그러다가,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이 응답을 주셔서 ‘야, 이제는 됐다. 감사하다.’ 하는 데까지 가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삶으로써 승리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