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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igp7UYhZIgw?t=2139

 

 

#2020-62 8/16/20(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3

망가져버린 믿음의 가정

(창세기 271~14)

 

[들어가는 말]

 

가끔 보면 재벌 가문에서 재벌 총수가 죽음이라든지 어떤 사정으로 더 이상 경영할 수 없을 경우 물려주게 되는데, 한국은 유독 오너 가족이 대를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끼리 재산이나 경영권을 놓고 다투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몇 년 전부터 L그룹에서는 형제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동생이 회장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소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유명한 H그룹의 누나와 남동생이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싸우다가 동생이 회장이 되었는데, 지금도 소송이 걸려 있습니다. 돈이 뭔데, 재벌 권력이 뭔데, 경영권이 뭔데 그렇게 형제자매끼리 싸우나 하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피를 튀는 싸움으로 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여러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F그룹, Faith 그룹, 믿음의 가문, 이삭의 가정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삭도 거의 재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축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사이의 싸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싸움이라기보다는 장자인 에서가 어머니와 동생 야곱의 작전에 속아서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기는 내용입니다. 이삭의 축복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또 동생이 형을 속이는 것입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붉은 죽 한 그릇을 받아먹고 팔아넘긴 장자권과 이삭의 축복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 사건을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해서 오랜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남기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이 귀중한 것이니까, 장자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여서라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1.   잘못된 모습으로 변해버린 이삭 (1~4)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셔서 아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바다의 모래 같이 또 하늘의 별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후손들을 주시고 가나안 땅을 주셔서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아브라함 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아들 이삭에게로 상속되었습니다. 이제 이삭에게서 그의 아들에게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기에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둘 다 본부인인 리브가의 아들이었고 쌍둥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리 쌍둥이라 해도 법적으로는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난 에서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앞으로 자기 후손이 많아지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리라는 약속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먹고 사는 일, 즐기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생을 즐기자는 주의였습니다.

 

그래서 사냥에서 돌아와 굉장히 배가 고프니까 야곱에게 붉은 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에서는 생각이 깊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이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써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이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자기의 행동에 대해 전혀 거리낌과 죄책감이 없었고,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살던 고대사회에도 풍속이 있었고 사회법이 있었습니다. 이 법은 자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지에 대해 규정하는 법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런 사회법에 의하면 당연히 에서가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법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

 

이제 이삭은 큰아들 에서를 장자로 지명하고자 에서를 부릅니다. 그런데 본문 바로 앞의 2634절을 보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40세에 결혼을 하고 공식적으로는 그때부터 독립하여 밖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불러온 겁니다.

 

이제 에서를 불러서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이삭이 하려고 하는 축복은 장자권을 아들에게 실제적으로 넘겨주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이삭이 아들을 축복하면 그 순간부터 그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는 문제에서 자신의 고집을 부리는 것을 봅니다.

 

원래 이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2523절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고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민족이 리브가의 탯속에서부터 나뉠 것이며, 분명히 핏줄은 같은데 다른 민족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민족이 나뉘는 것에는 핏줄 외에 다른 조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같은 형제나 자매나 친척이나 친구라고 해도, 신앙의 이유 때문에 완전히 나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이 민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시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성경을 봐도 그렇고, 특히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여인들의 출신 배경을 보면, 하나님은 어디 출신이냐, 무슨 민족이냐가 아니라 믿음을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바로 이 에서와 야곱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육신의 장자인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으로 됩니다.

 

하나님은 두 쌍둥이가 신앙적으로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복을 주기로 택하신 자는 동생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해서 버리시고 야곱만 예뻐하시며 너다. 네가 상속자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에서가 믿음을 버릴 것을 아셨고, 실제로 그는 믿음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길을 택해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믿음을 붙들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뿐입니다. 이렇게 다 정해져 있다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된다고 하시는 게 아니고, 그렇게 될 것을 그냥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리브가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것을 리브가가 혼자서만 알고 있겠습니까? 이삭도 분명히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것입니다.

 

죽 한 그릇을 놓고 두 아들 사이에 어떤 거래를 했다는 것도 이삭이 몰랐겠습니까?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에서를 계속 장자로 세우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서가 육신적으로 장자(큰아들)이기 때문입니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진짜는 에서에 대한 자신의 편애 때문입니다. 특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서 잡아다 별미로 만들어주는 요리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이삭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체험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믿음으로 나갔던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는 두 아들 사이에 장자권에 대한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2-4)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이제 에서를 위해 일종의 장자 취임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삭이 말한 내용을 보면, 그는 세 가지 면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을 봅니다.

 

1)  축복하려는 때가 잘못되었습니다.

 

이삭이 갑자기 에서를 축복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가 40세에 결혼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때부터 독립해서 살았다고 볼 때 그저 며칠 후에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때는 에서는 최소 70대가 된 나이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에서를 축복해야겠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에서가 70대라면, 이삭이 60세에 쌍둥이 아들을 얻었으니까 이삭의 나이는 130세가 넘은 때입니다. 자기가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서’, 즉 시력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1). 그래서 이삭은 눈이 안 보이니까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겁니다(2).

 

나이가 많고 늙었는데 갑자기 눈이 안 보이면 겁이 덜컥 나면서 이러다 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충분히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이삭이 180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가 130여 세였다고 보면, 이 축복을 한 뒤에도 40년 이상을 더 산 겁니다.

 

생명은 자기 생각이나 느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 축복을 할 때는 자신의 사역이 끝날 때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능력과 영광과 축복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후계자에게 넘겨주면서 자신은 마무리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자기 시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 내가 눈이 안 보이니까 죽을 때가 다 되었다.’라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에서를 축복하려 한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한 이삭에게 참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시력이 약해져서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식욕은 아주 왕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더 활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정말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먹을 의욕이 없어지고 잘 안 드십니다. 잘 안 먹으니까 기력이 없어지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며, 그러다 보니 정상적인 판단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식욕이 왕성하다는 사실은 아직 죽으려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자신의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이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그래도 아직 40년 이상 인생이 더 남아 있는데 왜 벌써 포기합니까? 남은 40여 년 동안을 그냥 넘겨주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겁니까?

 

이것을 보면,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살던 이삭이, 노년이 될수록 믿음으로 선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이 약해져가고 있는 것에 집중해서 몸의 상태에 따라 굉장히 괴롭고 우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 몸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약해져가는 몸을 보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육신의 생각밖에 못하는 겁니다. 육신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이 약해졌다고 아무것도 못하실 하나님이십니까? 결코 아닌데 자꾸 자기 몸에 집중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고가 흐려져서 제대로 판단을 못하고 빨리 에서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  축복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믿음의 계보를 이어갈 아들로 동생인 야곱을 말씀하셨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면서 에서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왜 그렇게 합니까? 지금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자기감정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고 합니다. 자기 생각을 먼저 내세우거나 자기감정을 더 소중히 여기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더라도 제대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3)  축복의 방식이 잘못되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나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짐승을 잡아 그것을 요리해다가 바치면, 실컷 먹은 다음에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마음껏 축복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4). 그런데 그 당시도 그렇고 특히 중동의 문화는 포도주를 마시는 문화인데, 고기로 요리한 것을 먹으며 같이 술도 마시면서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기 먹고 술 마시고 기분이 좋아야만 축복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족장들에게 축복이란, 자신의 모든 영적 능력과 지혜와 가진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아주 중요한 영적 행위입니다. 자신이 가졌던 능력의 갑절을 하나님이 후계자에게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한 것처럼,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한 것처럼 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결코 실컷 요리를 먹어서 배불러 기분이 좋아서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대사회에서 아버지가 다음 후계자 아들에게 하는 축복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은 완전히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방식으로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합니까? 이삭이 지금까지 믿음으로 잘 살았는데, 그 사이 세상적인 요소가 그의 안에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삭 안에는 자기가 살던 가나안 땅 사람들의 인생 원리와 이교적인 종교 방식이 자기도 모르게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일인 후계자 아들에게 축복하는 데 있어서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지금 육신의 눈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이삭은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그냥 실컷 먹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 마음껏 축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것이 가나안 사람들의 방식이었던 겁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할 때, 실컷 먹고 마시고 기분이 좋아서 축복해주는 것이 문화였습니다. ‘나도 그렇게 해보겠다.’라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 이삭이라도 정신을 잠깐 다른 데 두고 자기 몸에 집중하게 되니까, 세상의 방식이 무섭게 그에게 파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처럼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이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 머리와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와서 우리의 신앙이 혼탁해지고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깨어 기도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늘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로서 에서의 잘못된 삶을 바로잡아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에서와 하나가 되어, 같이 웃고 즐기고 먹으면서 기분 좋게 또 화끈하게 축복을 해주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하나님의 복을 전달해주는 것인데, 마치 자기가 복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에서에게 사냥하여 잡은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져와 자기를 기분 좋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축복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언제나 이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늘 예배와 기도와 말씀에 힘쓰며 나아가야겠습니다.

 

 

2.   망가진 이삭의 가정의 안타까운 현실 (5~12)

 

1)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리브가의 잘못된 계획

 

이삭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 될 줄로 생각을 했고, 에서도 그랬습니다. 에서는 이미 야곱에게 장자권을 팠았지만, 팥죽 한 그릇으로 그것을 야곱이 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아버지는 자기에게 장자권을 확인하면서 축복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삭은 에서가 사냥을 해서 만들어 가져올 요리를 생각하면서,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에서는 아주 신이 나서 활을 들고 들판을 마구 뛰어다니며 사냥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것은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5-7)

 

이런 것을 보고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왜 리브가가 엿들었는가 하면, 평소에 다른 데 살던 에서를 특별히 아버지 이삭이 불러오니까 이게 뭔가 중요한 것인가 보다 하고 들은 겁니다. 평소에 항상 엿들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이것을 듣고 나서 급히 야곱을 불러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8-10)

 

지금 리브가가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완전히 배신이고 반역이 아니겠습니까? 리브가의 행동에서는 이삭에 대한 존경심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리브가는 철저히 이삭을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리브가가 야곱과 함께 이삭을 속이는 작전을 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리브가가 과연 이것을 믿음으로 이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리브가는 두 쌍둥이를 낳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동생에게 복을 주시기로 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억지로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 합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비록 좋지 않은 방법이지만 음모를 꾸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속이고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면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무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리브가는 결코 믿음으로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리브가도 이삭과 같이 인간적인 편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믿음의 부부였지만, 두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믿음으로 양육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편견과 자기감정에 따라 사랑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삭은 거의 신앙의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요리한 것을 좋아하며 그것에 집착했습니다. 그에 비해 리브가는 사냥한 고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와 집에 함께 있으면서 자기와 같이 일하고 도와주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특히 야곱은 머리가 아주 뛰어납니다. 에서는 열을 말하면 한두 개 정도 알까 말까 한데, 야곱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압니다. 게다가 2634-35절을 보면, 에서의 가나안 여인들과의 결혼은 부모의 근심이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리브가의 속을 썩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합니다.

 

 

2)  굶주림의 상처를 가진 야곱의 마음

 

내적치유의 관점에서 보면, 야곱의 주된 상처는 굶주림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이삭의 편애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 특히 아들에게 있어 거의 모든 것이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해 생긴 결핍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사랑해주어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에서 역시 굶주림의 상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신기하면서도 슬픈 일입니다. 에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다가 가나안 땅 여인들과 자기 마음대로 결혼함으로 부모의 근심이 되었는데, 이렇게 이방 여인들과 마구 결혼하는 행동, 그리고 그 전에도 여기저기 막 쏘다니면서 즐기는 삶을 살았던 모든 것이 굶주린 마음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정착을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항상 뭔가에 집착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집착은 채우기 위한 집착입니다. 비어 있으니까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에서는 자신의 굶주린 마음을 채우기 위해 이리저리 사냥하고 돌아다니며 많은 여자들을 만났던 것이고, 야곱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수단으로 장자권에 집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굶주린 마음은 장자권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온 굶주림이지, 장자가 아닌 데서 온 굶주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받지 못해서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 그것을 고치거나 뭔가를 가지게 되면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집착하는 가운데 더욱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에 집착했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의 굶주린 마음을 채워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늙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는 이 이야기에는 사실 굶주림의 상처를 가진 야곱의 슬픔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에서를 대신하여 들어가 축복 받으라고 했을 때 야곱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1-12)

 

이 말에서 야곱의 슬픔이 느껴지십니까? 이삭은 에서를 볼 때마다 만졌다는 겁니다. ‘아이고, 내 아들아!’ 하며 만졌습니다. 그걸 누가 신경 썼겠습니까? 집안사람들 중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고 눈치도 채지 못했습니다. 당사자들인 이삭도 의식하지 못하고 에서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런 행동을 야곱만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야곱이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으면, 이삭이 에서를 만져줄 때마다 저쪽에 숨어서 바라보며 나도 아버지가 저렇게 만져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사랑받지 못해서 굶주린 사람은 이처럼 남보다 사랑에 훨씬 더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악순환입니다.

 

또 하나 슬픈 것은, 야곱이 갖고 있는 아버지 이삭에 대한 생각입니다.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12).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그의 이미지입니다. 아버지는 저주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사랑을 주기보다는 책망하고 야단치며, 자기가 잘못하면 저주하실 수도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 너는 왜 에서처럼 나가서 사냥하여 나를 즐겁게 해주지를 못해? 넌 뭐야?’라는 식으로 야단치고 저주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꽉 박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야곱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건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을 하나님은 나중에 라반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계속 빚으시고 치유해나가시며, 마침내 얍복 강가에서 그와 씨름을 통해 새롭게 해주십니다.

 

 

3.   인간의 악함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13~14)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하는 이런 모습은, 믿음의 사람인 이삭의 가정에서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믿음의 가정의 바른 모습일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또는 믿음의 가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지목하며 저 사람이 문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문제다’, ‘애가 문제다’, ‘부모님이 문제다라고 탓할 수 있는데,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목회자나 교회 리더들, 그리고 가정의 가장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왜 그러냐?’라고 하기보다는 ,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한가 보다.’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킨 개인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일종의 징계를 내리신 것을 봅니다. 무슨 징계를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13-14)

 

여기서 뭐라고 합니까?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려라.” 자기가 저주받을까 두렵다고 하니까 그 저주를 나에게 돌려라.’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야곱이 곧 집을 떠나게 되는데, 리브가가 안타깝게도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야곱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이 돌아왔을 때 리브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통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의 선한 계획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악한 계획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도 종종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이라든지,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고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한 것, 그런 악한 나라들을 사용하신 것, 또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악한 계획을 성취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일이 끝난 다음에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

 

이 말씀은 정말로 진리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악을 일으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악하게 할 때, 그것조차 사용하셔서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삭은 마음을 놓아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에 눈이 멀어 헛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혼란스러운 일과 혼동이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기에서도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분명히 들었을 때, 거기에 순종함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한 도구로 쓰임 받아,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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