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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ZD1ARfLLJ8o?t=2115

 

 

2020726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0

실수하는 것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창세기 261~11)

 

[들어가는 말]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만들어낸 것 같기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신력 있는 신문에도 나왔으니까 아마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모리 총리가 백악관을 방문하여 미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때 일본 외무성 간부들은 영어를 거의 못하는 모리 총리를 위해 미리 사전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총리께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먼저 다가가 ‘How are you?’(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하시면, 클린턴 대통령은 통상적인 영어로 ‘I’m fine. Thank you. And you?’(저는 잘 지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어떠세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Me, too.’(저도 잘 지냅니다.)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통역이 맡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나 막상 클린턴 대통령을 만난 모리 총리가 굉장히 당황했는지 아니면 말을 잊어버렸는지, ‘How are you?’라고 해야 할 것을 난데없이 ‘Who are you?’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발음이 안 좋아서 미국식 영어로 하우(how)’라고 해야 되는 것을 호우라고 했기 때문에 그게 (who)’라고 들렸다는 도 있습니다.

 

어쨌든 “Who are you?”라고 해서 다들 깜짝 놀라며 긴장하고 있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유머기질을 발휘해서 “Oh, I am Hilary's husband.”(나는 힐러리의 남편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모리 총리가 전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Me, too!”라고 했다는 겁니다.

 

영어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취업을 위해 회사에서 면접을 하는데, 영어 면접 시간이 되어 면접관이 영어로 질문했습니다. “아 유 레디(Are you ready)?”(준비되셨습니까?) 그러자 지원자가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No, I'm a boy.” ‘레디(ready)’레이디(lady)’로 착각한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다 웃으며 뒤집어졌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 면접자는 너무나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는데,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재빨리 한마디를 또 던졌습니다. “Oh, I'm sorry. I'm not a boy. I’m a gentleman.” 그러자 모든 사람에게서 한 번 더 폭소가 터져 나오고 다들 또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하지만 순간의 재치를 인정받은 그는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얼굴이 두꺼워야(?)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실수가 뭔지를 모르거나, 실수를 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물론 되도록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겠지만, 실수 그 자체가 아주 큰일인 것은 아닙니다. 정말 큰일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흉년이 들자 이삭이 가나안 땅을 떠나 남쪽의 그랄 땅에 가서 경험한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을 12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리로 간 것도 잘못이지만 거기서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는데,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 이후 아브라함은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그랄 땅에서 자기 아내 사라를 또 다시 누이라고 했다가 아비멜렉에게 빼앗겼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삭은 실수에 있어서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같이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삭이 가나안 땅에 잘 살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칩니다. 흉년이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던 것이 이집트에 내려갔던 12장의 사건을 말합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이 그랄 땅에 온 것은 흉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비가 아무 때나 내리지 않고, 보통 1년에 두 번 내립니다. 유명한 비가 두 번 있는데 이른 비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이른 비는 가을에 내리는 비이고, ‘늦은 비는 봄에 내리는 비입니다. 우기가 되면서 이른 비가 내리고, 우기를 마칠 때쯤 되어 늦은 비가 내리면서 건기가 시작됩니다.

 

이 두 차례의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듭니다. 그래서 이삭은 흉년을 피해서 그랄 왕 아비멜렉로 갈 것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2)

 

이전에 아브라함 때는 안 그러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가지 말라고 아예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을 보면, 아마도 이삭은 원래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는 나일 강이 있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도 버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풍성함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풍성하고 좋은 애굽으로 가지 말고 이 땅에 그냥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곳에 살라고 하셨으면 어떻게 해주셔야 합니까? 살 수 있는 환경을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살라고 하시면서 죽게 만드시면 어떡합니까? 적어도 흉년 때문에 가나안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막아 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는 이삭에게, 그리고 그에게 속한 수많은 사람들과 짐승들이 있는 이삭에게,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순종을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기는 좋은 곳이고 살 수 있는 곳인데 가지 말고 여기 죽을 곳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기근은 신들이 노해서 징계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실제로도 하나님은 흉년, 기근, 지진 등 자연재해를 통해 사람들을 징계하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당시 세상 사람들의 악한 죄를 그런 방식으로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 이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기 같이 있습니다. 지금 이 어려운 상황 속에 하나님의 사람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복의 근원이라면, 그런 어려움을 피하게 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다 고통을 당해도 이삭 만큼은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상황마다 그것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고통에 대해 믿는 사람들이 침묵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기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히 알려줍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2:15, 새번역)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저 사람들은 고통당하고 재앙을 당했지만 나는 괜찮으니까 괜찮은 거지.’ 하며 살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요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이 안타까운 게, 서로 편이 갈라져서 너무 많이 싸우고 있습니다. 미국도 편이 갈려서 싸우고 있지만 한국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그의 죽음을 놓고도 굉장히 갈라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또 소위 검언 유착또는 권언 유착사건도 있고, 또 부동산 값을 잡아야 한다고 갈등이 있습니다. 서로 편이 갈라져서 싸우는 모습들을 보면서 숨이 막혔습니다.

 

대개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대개는 어느 한 쪽으로 마음이 갈 겁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저 사람 저거 잘못했네.’라고 하거나, 아니면 왜 저 사람을 저렇게 만느나?’라고 하면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저는 지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보일 첫 번째 반응이 무엇이여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를 지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어느 한 편에 붙어서 이쪽이 맞고 저쪽이 틀리다고 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도 정치적인 성향을 나름대로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쪽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저쪽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지지자가 다 다릅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모든 것을 보는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성추행 사건이나 죽음이 벌어졌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우셨습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어떻게 이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셨습니까? 돌아가신 분은 이미 끝났습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에 의해 끝났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 유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보셨습니까? 피해자를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해보셨습니까? 아니면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면서 계속 그런 데 휩쓸리고 계십니까?

 

판단을 아예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안타까워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우리는 잘 모르지만 기도하는 겁니다. 너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안타까움이 하나님께서 지금 이런 상황을 보시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며 마음을 함께 할 때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도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우리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또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고, 나 자신이나 내 자녀의 진로 문제가 안 풀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아무 문제 없이 복만 받고 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걸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끝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결국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지켜주시는 주님이시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에도 지켜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의 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그런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함께 고통을 당하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기 원하십니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번에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우리도 형편이 어렵지만 그래도 같이 마음을 모아서 '이웃사랑기금'도 조성하고 어려운 지체들과 이웃들을 돌아보자고 했는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단순히 돈만 내는 게 아니라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판단은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따라 울기도 웃기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상황을 뛰어넘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가나안 땅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인가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3-4)

 

하나님은 여기서 네 가지의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 ‘기근이 있지만 계속 이곳에서 견디고 있으면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 그러니까 진정한 복은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은 많이 벌었는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지 않으신다면 그게 복이겠습니까?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입니다.

세 번째는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해줄 것이다.’

네 번째는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4)입니다.

 

이삭이 계속 이 땅에 머물고 있으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해주신 엄청난 복이 이어질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지금 이삭에게도 약속하시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 참된 복입니다.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진정한 복, 하늘의 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가짜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여러분, 가짜 복을 추구하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진정한 복을 이삭에게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그 진정한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더 많이 모아서 더 큰 거부가 되라거나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데 살고...

 

그런데 오직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재의 생활을 절제하며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일이 아무리 많아도 내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모든 욕망을 절제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을 다 책임져주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을 모으거나 강한 물리적 힘을 가지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로 관심이 뭐냐 하면, 정말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주로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모으려 하고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데, 많은 것을 모으고 높이 올라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실패하고 타락하는 사람보다 성공하고 타락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입니다. 성공하고도 타락하지 않으면, 더 좋아지지는 않지만 타락만 안 해도 굉장한 사람입니다. 성공하고 어떤 위치에 올라갔을 때 ,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러냐?’라고 하지만, 나도 그 위치에 갔을 때 과연 내가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장담하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성공하고 타락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고 성공해서 살면 당연히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진정한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지, 그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사니까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진정한 복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다 없어지는 것이면 진정한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1센트도 못 가져간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그토록 추구하며 삽니다. 하지만 아무리 높아봐야 그런 것을 못 가져갑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도 계속 함께 해주시는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동행하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에 대해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이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나머지는 모두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안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비결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2.   실수하는 사람을 변화시켜서 쓰시는 하나님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데 지금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네 신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에서 함께 섞여 삽니다. 그래서 경험하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실 그들과 생각이 일치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주일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는 못하지만, 이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배의 중요성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주일에 일하게 하거나, 직장에서 파티를 해도 주일에 합니다. 가족 모임이나 결혼식도 주일에 하는 경우가 많고, 요즘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등 학교들이 하필 졸업식을 주일에 합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하는 데도 있지만 주일에 하는 데가 가장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에 가야 하기 때문에 빠져야 한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합니다. ‘매주 교회 가면서 한 번쯤 빠져도 되지, 뭘 그러냐?’라고 합니다.

 

이삭이 살고 있던 환경은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가하고 죽음의 위협을 가하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 땅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이 굉장히 불안했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6-7)

 

이삭이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아내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고대에는 여성을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고 물건 취급을 해서, 누구든지 힘센 사람이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관심을 둔 여자가 어떤 사람의 누이라면 일단 빼앗고 난 다음 그 오라비와 협상을 하면 되지만, 아내이면 협상이 안 되니까 아예 남편을 죽여 버리고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곳에 오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곳에 이사를 가면 아내를 빼앗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무법천지였습니다. 무슨 경찰이 있습니까, 군대가 있습니까? 힘센 사람이 법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러한 가나안 땅의 풍조가 두려웠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이삭은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겁니다. 애굽에서 또 이 그랄 땅에서, 하나님은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겼던 아브라함을 지켜주시고 도로 찾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두 사건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분명히 그 사건들에 대해 이삭에게 말해주면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막상 자기가 그 상황이 되고 보니까 이전에 분명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할 때 신앙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모임이 있는데 왜 어제 모임에 안 왔습니까?’라고 하면,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그것이 제겐 아주 중요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못 갔습니다.’라고 둘러댑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없고, 괜히 이상하게 보이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산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 사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10:28)

 

사람도 우리 몸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둘 다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7절 끝에 이삭의 문제점이 나와 있습니다.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의 문제도 두려움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두려움 때문에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당했는데, 이삭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웠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두려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옵니다.

 

이처럼 이삭이 거짓말로 속였지만, 결국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한 사건을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8)

 

왜 이삭은 아비멜렉이 창으로 볼 수 있게 껴안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았을 수도 있고, 아비멜렉이 리브가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몰래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관계가 수상해서 정보원을 보내어 보고를 들은 것을 직접 보았다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라는 사실을 아비멜렉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9-11)

 

여기 보면 이삭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9절 중간에 내 생각에라고 합니다. 이게 문제의 근원입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렇게 했다.’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내 생각에 이렇게 했다.’라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 하면 항상 이렇게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남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죽을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아주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무서운 벌이 자기들에게 내렸을지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실 그의 이런 말은 위선입니다. 실제로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많이 훔쳐오거나 빼앗아오고 그래서 남편들을 죽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적어도 법적으로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죽을죄인 줄 알면서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무엇이 죄인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러다 뭔가 일이 터지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고 느낍니다.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은 항상 불안합니다. 왜 불안합니까? 본능적으로 자기를 심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셨으면, 이삭은 믿음으로 그 사실을 붙들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리고 있다면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라고 하셨다면 이삭은 그것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마치 망하는 길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이고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리지 않고 계속 세상의 소리만 들리고 있다면 큰일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현재의 형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있으면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을 때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만, 아직 이삭의 신앙은 이론적이었습니다. 실전에 닥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훈련으로 주신 것이 흉년이라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내 앞에 혹시 어려운 문제, 풀리지 않는 문제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 해결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냥 가나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어려워도 믿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약속을 붙들며 살라고 하십니다. 다른 데로 자꾸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셨으면, 약속해주셨으면, 거기에서 절대 굶어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며, 참된 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서 새로 살아야 했을 때처럼 우리도 불안하고 막막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랄 땅에서도 이삭과 함께 하셨고 그를 보호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삭이 실수했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하다 실수했지만,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날마다 놀라운 복을 경험하고 나누어주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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